난 할 수 있어 135화
대찬의 가족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박 4일.
행선지는 일본 북해도였다.
누나인 조수진도 휴가를 내고 함께했다.
모처럼 일가족 4명이 단란하게 휴가를 떠났다.
지금까지는 누구 하나가 여유로워지면 또 누구 하나가 바빠지는 까닭에 일가족 모두가 여행을 떠날 일이 없었다.
여유가 생겨도 부족한 잠을 보충하느라 멀리 가지 못하고 가평이나 충주처럼 가까운 곳만 맴돌았다.
“죽기 전에 비행기를 다 타 보는구나.”
어머니는 좁은 이코노미석에도 기뻐했다.
대찬은 죄송스러운 마음에 멋쩍게 웃었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은 조수진이 말했다.
“엄마, 작년에도 우리 몰래 계모임 아줌마들이랑 청도 갔다 왔잖아.”
“1시간밖에 안 걸려서 비행기 타는 기분도 안 나더구나.”
어머니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렇게 받아치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바글바글한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여행은 지양했다.
대찬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휴식이 최우선이었다.
어느덧 환갑 고개를 바라보는 부모님에게도 여기저기 명소를 돌아다니며 스탬프를 찍는 게 목적인 여행은 알맞지 않았다.
“여기가 우리 숙소예요.”
대찬은 가족들을 숙소로 안내했다.
한적한 산골에 있는 료칸이었다.
세련된 호텔이 아니라 옛날의 가옥 형태에 마련된 숙소였다.
방도 널찍하고 개인 노천탕도 딸려 있었다.
대찬은 편한 잠자리를 위해 객실을 2개나 예약했다.
부모님은 노천탕을 보고 눈동자가 커졌다.
“아이구, 방 잡는 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아녜요. 이럴 때 안 쓰면 언제 돈 써요.”
대찬은 여유만만하게 대꾸했지만 무리한 측면이 없지는 않았다.
김태준 사장의 금일봉을 모두 소진하고도 대찬의 입장에서는 꽤나 부담되는 금액을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가치는 충분하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여름이지만 야밤의 북해도 산중은 소매 사이로 추위가 스몄다.
“아으, 춥다.”
대찬은 종종걸음으로 얼른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바구니에 사케 술병을 올려놓고 천천히 여유를 즐길 참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젖히고 밤하늘을 바라봤다.
산중에 별이 밝게 빛났다.
‘좋네…….’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여유인가.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한없이 귀하게 여겨졌다.
온천에 피로로 뭉친 몸이 녹았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때 반대편에서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조수진의 목소리였다.
가족들의 목소리에 대찬은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풍경 좀 봐라, 얘. 얼마나 좋니.”
“그러게. 여기가 우리 집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풍경도 가끔 봐야 좋지, 매일 보면 질린다.”
“그럼 조대찬한테 돈 벌어서 이런 곳에다 별장 지어 달라고 해야겠다.”
“네가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동생 등골 빨아먹을 생각부터 하니?”
“사서 월급에 별장이 가당키나 해?”
“아이구, 그럼 뭐 대찬이 월급에는 가당하구?”
“사서보단 대기업 직원이 더 가능성 있지.”
“차라리 잘생긴 부자나 하나 꼬셔 봐라. 혹시 아니, 시댁에서 눈 튀어나올 정도로 호화스런 별장 하나 턱 지어 줄지.”
“엄마는 꼭 기승전시집이야.”
“알면 좀 가, 이 기집애야! 다 늙은 딸 밥 차려 주는 것도 이제 아주 이골이 나, 이골이!”
대찬은 모녀의 장난스러운 입씨름을 편안히 즐기며 술을 따랐다.
온천의 열기로 미지근하게 데워진 술이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아이고야, 물 따시고 좋다…….”
“그치? 풍경이 좋아서 그런지 더 좋네.”
“그래. 물도 좋고 풍경도 좋고 다 좋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살짝 울음에 잠겼다.
“아이고, 우리 엄마 또 센치해졌다.”
“센치해진 게 아니고 기분이 좋은 거야. 오죽 좋으면 눈물이 다 나오니.”
“기분이 좋으면 웃어야지, 울기는 왜 울어…….”
그렇게 말하는 조수진의 목소리도 먹먹해졌다.
“그래, 울지 말아야지. 나이가 드니까 주책맞아진다. 이렇게 좋은데. 잘 자란 아들딸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는데 울 시간도 아깝지, 그럼…….”
어머니의 목소리에 대찬도 덩달아 눈가가 벌게졌다.
두 번째 삶을 살면서도 주위를 잘 돌아보지 못했다.
대학에서는 에피니키온에만, 졸업 후에는 회사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고 각오하고 또 각오했는데.
같은 과오는 반복하지 않는 대신 또 다른 과오를 범하는 건 아닌지.
‘정신 차리고 살자, 조대찬. 이런 귀한 기회 받았으면 값을 해야지.’
대찬은 산중의 찬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술 맛 좋냐.”
그때 아버지가 탕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눈을 뜨고 아버지를 맞았다.
“아, 네. 한잔하실래요?”
“사케는 일본 사람 흉내 내는 거 같아서 별로다. 먹던 술이 아니라 어째 잘 안 먹히더구나. 연하고 느끼해서.”
“그러세요.”
“우리 입맛엔 맥주가 좀 낫지. 맥주 한잔할 테냐?”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탕에 오래 있었더니 시원한 게 당기던 참이었어요.”
“옛다.”
대찬과 아버지는 동시에 캔 맥주의 뚜껑을 땄다.
콱,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대찬은 꿀꺽꿀꺽 맥주를 마셨다.
그의 울대가 박자에 맞춰 울렁거렸다.
차가운 맥주가 대찬의 식도를 타고 전신에 짜릿한 기운을 퍼트렸다.
“캬아.”
대찬과 아버지는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맥주가 좋네요.”
“어허, 시원하다.”
“이거 마시고 한 잔 더 마셔야겠어요.”
“너무 빨리 마시지 마라. 중간에 화장실 다녀오면 흥 깨진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버지는 맥주를 마시며 먼 곳을 바라봤다.
이제 해는 완전히 졌다.
불빛 하나 없이 완전히 암흑이 된 풍경은 그것대로 운치가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풍경을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말했다.
“대찬아.”
“네.”
아버지가 대찬을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어서 대찬은 어쩐지 쑥스러웠다.
아버지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아버지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찬 역시 그것으로 충분했다.
부자는 잠깐 서로를 응시하다가 다시 맥주를 마셨다.
대찬은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남은 휴가는 오롯이 휴식에 썼다.
김산하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내 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김산하는 만남을 거부했다.
“뭐야, 왜 안 만난다는 거야? 삐쳤어?”
“삐치긴. 너 여태 맘 놓고 못 쉬었잖아. 이참에 푹 쉬어 두라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줄 알고.”
“난 괜찮은데…….”
“됐어.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녀오는 게 어디 보통 일이냐. 푹 쉬고, 다음 주에 술이나 한잔하자.”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월요일이 되어 대찬은 다시 회사에 근했다.
일주일의 달콤한 휴가가 꿈처럼 느껴졌다.
대찬은 다시 생활의 무게에 두 어깨가 짓눌린 채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북해도 특산의 과자를 한 박스씩 돌렸다.
시로이 코이비토(白い恋人), 하얀 연인이라는 이름의 과자였다.
삭막한 사무실 사람들에게 주기에는 이름이 아까웠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생색을 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보기 싫게 툴툴거리는 사람이 한둘씩은 꼭 나온다.
과자를 죽 돌리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대찬을 향해 허운은 곁눈질했다.
그를 보자마자 허운이 웃었다.
“조 대리님, 얼굴이 아주 죽을상입니다?”
“죽을상 안 짓게 생겼어? 젠장.”
“실컷 놀다 왔으면서!”
“군대 백일 휴가 복귀하는 기분이었어.”
“그렇게 말하니 좀 와 닿긴 하네. 근데 이걸 어쩐다.”
“왜?”
허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돌아오자마자 업무 폭탄인데.”
“뭐야, 차장님 앞에서는 내 업무 다 나눠서 대신 해 줄 것처럼 말하더니, 그대로 놔뒀던 거야?”
대찬이 김영우 차장의 비어 있는 자리를 흘끔 보고는 말하자 한태윤 과장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대찬을 바라봤다.
“우리 의리를 뭘로 보고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조 대리 업무는 진즉 다 끝내 놨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럼 업무 폭탄이라는 건…….”
화장실에 다녀온 송희근 과장이 물을 털며 들어왔다.
한태윤 과장 대신 그가 대답했다.
“사장님발 폭탄이야.”
“예? 사장님이요?”
“어.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라고 하셨는데 그게 꽤 덩어리가 큰 거라.”
“뭡니까, 그게?”
송희근 과장은 물을 홀짝이고 말했다.
“SSM.”
“아이고야.”
그의 말을 듣자마자 대찬은 고뇌에 찬 탄식을 뱉었다.
허운이 킥킥거리며 말했다.
“벌써 일주일 전에 겪은 충격에 뒷북치는 꼴이 볼 만한데?”
“허운 씨, 조 대리는 허운 씨 상삽니다. 꼴이라니 말조심하세요.”
한태윤 과장의 꾸지람에 허운은 어깨를 움츠렸다.
한태윤 과장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남들이 모두 차분해진 지금, 뒤늦게 충격에 휩싸인 대찬을 보고 풉, 웃음을 흘렸다.
SSM.
슈퍼슈퍼마켓(Supersupermarket)의 약자다.
대형 마트보다 작지만 슈퍼마켓보다 큰 상점을 의미했다.
대형 마트 체인을 보유한 기업들은 대부분 SSM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같이 SSM을 보유한 건 다른 이유가 없었다.
돈이 됐다.
진공 청소기의 흡입부가 폭이 넓어 좁은 구석을 청소하지 못할 때, 솔이 달린 얇은 흡입부로 교체해 작은 먼지까지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대형 마트가 진입하지 못하는 골목 구석구석에 SSM을 설치했다.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것.
그것이 기업의 사명이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대찬의 표정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는 송희근 과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장님, 하지만…….”
“더 말 안 해도 알아. 걱정된다는 거지?”
“예. 좀 많이요.”
“조 대리가 아는 걸 높으신 분들이라고 왜 모르겠어. 이미 임원회의에서 말들이 많았대.”
“아무래도 그랬겠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임원 회의에서 김태준 사장이 SSM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좌중은 잠잠했다.
잠잠하니 김태준 사장이 누구 하나를 콕 집었다.
“부사장, 어떻게 생각해요?”
“음…….”
웬만한 상황이라면 이동수 부사장은 사장의 말에 즉시 맞장구를 쳤다.
그럼에도 SSM이라는 말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김태준 사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왜, 별론가요?”
“아, 아뇨. 별로는 아닌데… 우려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력으로 미는 경영 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거죠.”
“마, 맞습니다.”
SSM은 압도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골목 상권을 공략하는 일이다.
불량배가 코 묻은 돈 갈취하는 걸 곱게 보는 사람은 없다.
SSM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영세 상인들이 대부분인 골목 상권에 침투해 생태계를 망가뜨린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니 지금까지 윤리 경영, 상생 경영 따위를 내세웠던 필래마트의 이미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필래마트가 경쟁 업체를 맹추격할 수 있는 건 이런 긍정적인 이미지의 덕택이 컸다.
섣불리 SSM 사업에 뛰어들었다가는 실익도 없이 이미지만 망칠 공산이 다분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덧붙였다.
“게다가 SSM 시장에서 우리는 후발 주자입니다.”
이미 목 좋은 곳은 위마트와 샬롯마그넷, 업하우스의 SSM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필래마트에게 남은 건 부스러기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동수 부사장은 사장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하지만 SSM 사업을 안 할 수는 없어요. 알짜 사업이야. 부사장 말마따나 우리는 출발이 늦습니다. 더 지체할 수는 없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적어도 5년 안에는 SSM이 안정적으로 굴러가야 합니다. 대형 마트 하나만으로는 생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이쯤 되니 이동수 부사장도 김태준 사장을 만류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깐 한숨을 토하고 김태준 사장에게 물었다.
“그럼 따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실 겁니까?”
“일단 전략기획실에서 보고서를 받아야겠어. 도 상무.”
김태준 사장이 도진석 상무를 부르자 그는 몸을 살짝 틀며 대답했다.
“네.”
“그쪽에서 기획서 만들어 봐요.”
“알겠습니다.”
“아, 기안자는 서원웅 과장으로 합시다.”
공을 서원웅에게 돌리겠다는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