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34화
어머니의 호평을 받은 대찬은 자신감을 가졌다.
마침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셀프셰프 제품이 출시되었다.
제품의 특성상 대량 생산은 어려웠다. 때문에 셀프셰프는 비약적인 매출 상승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경쟁 업체와의 차별화에는 성공, 필래마트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는 기여했다.
최소채소, 집밥채소, 셀프셰프.
대찬이 제기하고, 한태윤 과장이 보완하고, 서원웅이 밀어붙인 사업은 궤도에 안착했다.
매듭 하나를 완벽히 매조진 대찬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김산하를 만났다.
그녀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셀프셰프 그거, 쓸 만하더라?”
“사 먹어 봤어? 괜찮아?”
“응. 고추잡채 사서 먹어 봤는데 웬만한 중국 음식점 못지않더라고. 집에서 나름대로 분위기도 내고?”
그의 대답이 대찬에게 묘하게 들렸다.
대찬은 꽁한 얼굴로 되물었다.
“집에서 분위기 낼 만한 일이 뭐가 있어?”
“어, 그 표정 뭐야?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거? 외간남자 데려와서 고추잡채에 와인잔이라도 부딪쳤을까 봐?”
“와인은 아니어도 고량주에 고주망태 돼서 멋대로 뻗어 버렸을지 누가 알아?”
김산하는 큭큭 웃었다.
“오호라, 그래서 지금 질투를 하신다?”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냥 내 새끼 조대찬이 그럴듯한 아이디어 냈다고 해서 검사하려고 사 본 거야.”
“…그래?”
김산하는 웃음을 머금으며 대찬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 우쭈쭈, 맛있게 잘 만들었더라, 내 새끼?”
“내가 왜 누나 새끼야.”
대찬은 딴 곳을 쳐다보며 툴툴거렸다.
그러다 풋,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대찬과 김산하는 서로를 보며 비식비식 마른 웃음을 짓다가 폭소했다.
최소채소, 집밥채소, 셀프셰프의 성적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온 2/4분기의 마지막, 김태준 사장은 비정기 인사를 단행했다.
마침 납품 계약 건으로 백마진을 챙기려던 사건이 터져 몇 명이 옷을 벗게 된 차에, 대리 서원웅을 과장으로 진급시켰다.
표면적으로는 서원웅이 주도한 사업이 성공을 거뒀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입사 2년 차에 과장 진급은 이례적이었지만, 직원들은 별달리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핏줄이 다르다는 걸 그들은 인정했다.
한태윤 과장은 이달의 직원으로 뽑혔다.
약간의 금일봉과 근무 평정에서의 이점을 기대해 볼 만했다.
대찬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수고했네.”
김태준 사장이 격려차 방문해 던진 한마디가 전부였다.
대찬은 실망하지 않았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의 숨은 공로를 김태준 사장이 모르지 않을 테니, ‘수고했네.’라는 네 글자 뒤에 숨은 일말의 부채의식이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뭐 딱히 없어도 큰 상관은 없지만.’
대찬은 여느 때와 같은 표정으로, 민망한 표정을 짓는 서원웅에게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서 과장님.”
“아, 어…….”
서원웅은 미안, 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미음을 발음하려다 말았다.
‘잘했어.’
대찬은 서원웅에게 무언의 칭찬을 했다.
미안해하지 않는 것, 그건 서원웅에게 보폭 큰 걸음마였다.
그렇게 일상으로 복귀하고 일상의 업무를 소화하던 날, 도진석 상무가 대찬을 불렀다.
“네, 실장님.”
“자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휴가 다녀와.”
월요일부터 금요일, 주말을 생각하면 일주일을 통으로 쉬라는 말이었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예? 갑자기 웬 휴가입니까?”
“사장님이 특별히 지시하셨어. 자네 고생이 많았다면서 그렇게 하라시더군.”
“아…….”
갑작스러운 휴가가 당혹스러웠다.
김태준 사장이 호의를 표하는 방법이 퍽 터프했다.
고생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했으니 푹 쉬다 오기라도 하라는 뜻일 터다.
휴가 마다할 직원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달랐다.
갑자기 정해진 휴가는 남은 자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일주일이나 회사를 비우니 부담이 적잖을 것이다.
그 부담은 다시 대찬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런 아랫것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김태준 사장은 턱, 휴가를 안겼다.
도진석 상무부터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사장님 지시사항이니 푹 쉬다 오도록 해.”
“…알겠습니다, 실장님. 감사합니다.”
대찬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도진석 상무 앞에서 물러났다.
대찬은 점심시간에 같은 부서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김영우 차장이 쯧, 입술을 비틀었다.
“다음 주는 고생 좀 하겠군.”
“죄송합니다, 차장님. 다녀와서 2배로 일하겠습니다.”
“당장 빵꾸 난 건 어떡하게요? 조 대리도 일주일을 통으로 비우는 건 좀 거시기하죠?”
“예. 그렇긴 하지만…….”
사장 지시인 걸 나보고 어쩌라고.
그렇게 톡 쏘아 주고 싶은 걸 속으로 참았다.
김영우 차장이 말했다.
“뭐, 꼭 회사에 있어야만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예?”
“업무 자료 메일로 보내 줄게요. 집에서 쉬면서 쉬엄쉬엄 처리하면 되겠네.”
“아…….”
“왜, 그건 또 싫어요?”
“그건 아니지만.”
“솔직히 사장님 지시긴 하지만 일주일 내내는 양심 없지.”
“예, 뭐…….”
피곤한 일이 끝나자마자 김영우 차장과 대립각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본래 뜻하지 않던 휴가니 출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때 송희근 과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습니까, 차장님.”
“뭐라고요?”
“최소채소부터 셀프셰프까지 조 대리 수고한 거 모르는 사람 여기 없잖아요.”
김영우 차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 대리 포함해서 한 과장, 서 대리, 아니 서 과장이 그쪽에 신경 쓰는 동안 원래 업무 우리가 다 떠맡지 않았습니까?”
“떠맡으면 얼마나 떠맡았다고요.”
“송 과장님!”
송희근 과장의 공세에 김영우 차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저 양반?’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지원사격이 고마우면서도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김영우 차장과 사이가 안 좋다지만, 자기 이득이 걸려 있지 않은 일에 저렇게 나선 건 이례적이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사장님이 직접 지시한 휴가를 차장님이 무슨 권리로 방해하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권리요? 나 조 대리 직속 상사입니다. 됐습니까?”
“아, 군대에서 소대장도 직속상관이지만 대통령도 직속상관인 거 알죠? 소대장이 대통령 뜻 거스르려고 합니까?”
“여기가 군댑니까!”
“비유가 그렇다는 거죠. 못 알아들으시는 건지, 아니면 못 알아들으시는 척하시는 건지.”
배배 꼬는 화법에 김영우 차장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송 과장님, 아무리 저보다 연차가 많아도 저 송 과장님 상사입니다.”
“논리로 따지셔야지, 직급으로 찍어 누르십니까? 여기가 군대냐면서요.”
“이익, 진짜……!”
김영우 차장의 얼굴은 이제 숫제 잘 익은 사과였다.
그때 한태윤 과장이 끼어들었다.
“조 대리가 자리 비우는 동안 제가 조 대리 업무 맡아서 하겠습니다.”
“한 과장님.”
“조 대리 고생한 거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그런데 저랑 서 과장만 이득 봤습니다. 조 대리한테 이 정도 보상도 허락 못하면 누가 자기 시간 버려 가면서 일에 뛰어들겠습니까.”
한태윤 과장이 나서자 서원웅이 거들었다.
“네. 저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가 조 대리 업무 부담하겠습니다.”
허운과 유채경도 동참했다.
“저희도 조 대리님 일 나눠서 할게요.”
김산호와 오다혜도 같은 말을 했다.
홍은주도 마찬가지.
“다 같이 나누면 충분히 감당할 만합니다.”
“…….”
김영우 차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경원 대리만 빼고 전략기획실의 모든 직원들이 대찬의 역성을 들고 나섰다.
김영우 차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대찬을 향해 눈총을 쐈다.
“아주 푹 쉬다 오세요, 조 대리!”
그러고는 성큼성큼 화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다들 감사합니다.”
송희근 과장이 헤벌쭉 웃으면서 말했다.
“아냐, 아냐. 모처럼 사장님이 휴가까지 주셨는데 부려 먹으면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해?”
한태윤 과장은 대찬의 어깨를 살짝 짚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회사 걱정은 절대 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대찬은 뭉클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걸 보고 직원들도 마찬가지의 웃음이 얼굴 가득 퍼졌다.
갑자기 하늘에서 휴가가 뚝 떨어졌다.
‘그래, 정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와야겠어.’
따지고 보니 정말 휴식을 위한 여행은 대학 졸업한 이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잡념은 다 물리치고 오로지 휴식에만 집중하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대찬은 생각했다.
‘누구랑 가지?’
여러 이름들이 떠올랐지만 선택지는 둘로 좁혀졌다.
가족, 그리고 김산하.
날짜를 고려하면 가족과 한 번, 김산하와 한 번 여행을 가기에는 힘들었다.
대찬은 퇴근하고 김산하와 만났다.
휴가 얘기를 하니 김산하는 자기 휴가처럼 기뻐했다.
“잘됐다! 너 요즘 다크서클이 볼까지 내려왔잖아. 이참에 푹 쉬어.”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는데.”
“여행, 좋지. 직장인한테 일주일 휴가는 진짜 꿈같다. 무리하면 미국도 갔다 오겠는데?”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흔치 않은 기회지.”
“나랑 갈래?”
“괜찮아?”
“그럼! 우리 회사 완전 프리하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들뜬 표정을 짓던 김산하는 무언가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너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녀온 적 있어?”
“음, 고등학교 때 제주도 다녀온 거?”
“그건 부모님 모시고가 아니라 부모님이 널 데리고 가신 거잖아.”
대찬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렇긴 하지.”
“이 불효막심한 놈아! 당연히 부모님 모시고 여행 다녀올 생각부터 해야지, 여자랑 시시덕거릴 생각부터 해?”
“…먼저 가자고 한 건 누난데.”
“닥쳐! 부모님 제치고 나랑 다녀오신 거 부모님이 아시게 되면 날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뭘 그런 거부터 생각해?”
“사람은 멀리 내다봐야 하는 법이야. 결론 났네. 부모님이랑 해외여행이나 다녀와. 여름 더우니까 동남아로 모시면 효도 여행 아니라 불효 여행인 거 알지?”
대찬은 김산하를 보면서 지그시 웃었다.
그 웃음에 김산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알았냐고. 대답은 안 하고 왜 그렇게 웃는데, 징그럽게.”
“고마워서 그렇지.”
“고마울 것도 많다.”
“다녀와서 우리 둘이 드라이브라도 갔다 올까?”
“갔다 와서 생각해. 여행 다녀오고 나면 집에서 쉬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김산하의 사려 깊은 말에 저절로 웃음이 번졌다.
휴가를 떠나기 전 금요일.
이동수 부사장이 대찬을 잠깐 불렀다.
대찬이 그를 찾아가니 봉투 하나를 쑥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금일봉이야. 사장님이 자네한테 주라고 하셨어.”
“이걸 왜…….”
“쉬는 동안에 집에서 라면이나 축내지 말고 어디 바람이나 쐬고 오란 뜻이야. 아주 큰돈은 아니니까 부담 없이 받아.”
대찬이 거둔 수확에 비해 휴가는 그다지 성에 차지 않는 보상이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생각은 사뭇 다를 터였다.
일주일 특별 휴가에 금일봉까지 턱 받아 버리면 대찬의 공로가 어떻든 배가 아프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금일봉만큼은 이동수 부사장을 통해 슬쩍 건네주는 것이었다.
대찬은 사양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공손히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나는 심부름만 했는데 뭐가 고마워. 사장님한테 고마워해야지.”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봉투 하나에 아니꼽던 마음이 녹고 고맙단 생각마저 든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엄청 큰돈 아니라더니.’
앞에 ‘엄청’을 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바람이나 쐬라고 준 돈치고는 큰돈이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사냥개로서는 후하게 대접해 주고 있었다.
사업으로 얻을 평판은 사람이 먹는 밥이다.
사냥개인 대찬에게 사람이 먹는 밥을 내줄 수는 없다.
그러니 사냥개에게 적당한 개 사료만 푸짐하게 부어 주었다.
휴가와 금일봉이 개 사료였다.
개 취급을 하니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그나마 노고를 알아라도 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대찬의 기분은 겨울의 노천탕처럼 시리면서도 뜨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