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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3화 (132/556)

난 할 수 있어 133화

김태준 사장은 그날 저녁, 서원웅과 대찬을 한 중식당으로 불렀다.

대찬이 의문을 표했다.

“사장님이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혹시 미리 언질 받은 게 있나 해서.”

서원웅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게 있으면 너한테 진즉 말해 줬겠지.”

“하긴.”

대찬과 서원웅은 나란히 약속 장소로 향했다.

중식당에 도착하자 김태준 사장이 미리 와 있었다.

별실에 마련된 회전식 테이블에는 고가의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즐비했다.

안으로 들어오는 둘을 보고 김태준 사장이 알은체를 했다.

“어, 왔군.”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대찬과 서원웅은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앉지.”

“예.”

대찬과 서원웅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김태준 사장과 마주앉았다.

“일단 배들 고플 테니까 밥부터 먹자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 쩝쩝, 맛있게도 음식을 먹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긴장한 탓에 입맛이 별로 없던 대찬의 입에도 자연히 침이 고일 정도였다.

주저하며 젓가락을 드는 둘을 보고 김태준 사장이 피식 웃었다.

“팍팍 먹어. 같이 먹는 사람 입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도미찜 맛있네. 들어.”

한동안 별실에서는 젓가락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김태준 사장은 술로 입안을 헹구고 말했다.

“이번에 조 대리가 낸 아이디어가 제법 성적이 좋아.”

“다행입니다.”

“전국 17개 지점에 확대할 생각이야. 그러고도 반응이 좋으면 제품을 좀 다양하게 생산해 보고.”

“옳으신 판단입니다.”

“그런데 좀 아까워.”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

“일개 대리가 이 정도 스케일의 사업을 끌고 가기엔 적당하지 않단 말이야.”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아, 물론입니다. 이 아이템은 한태윤 과장의 주도로 이뤄졌으니 저보다는 한태윤 과장님이 적임입니다.”

“알고 보면 한태윤이도 자네 아이디어에 편승한 거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도미의 살을 헤집으며 받아쳤다.

“그렇지 않긴 뭐가 그렇지 않아. 상사라고 감싸 줄 거 없어.”

“저는 단지 실마리만 던졌을 뿐, 그다음부터는 한태윤 과장, 허운 사원과 함께 기획했습니다.”

“그 실마리가 전부잖나.”

“아닙니다. 처음 시작과 최종 결과물은 천지 차이입니다. 양배추가 야생 겨자에서 시작된 거 만큼요.”

“공치사는 그쯤 해 두고.”

김태준 사장은 애초부터 대찬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생선살을 뒤적이던 젓가락으로 서원웅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원웅한테 넘겨.”

“…예?”

대찬은 얼떨떨했다.

서원웅 역시 예기치 못한 말에 어리둥절했다.

“자네한텐 사이즈가 과분해. 서원웅이 이걸 맡아서 해내도록. 조대찬은 서포트 하고.”

“…….”

대찬이 침묵하는 사이 서원웅이 나섰다.

“사장님, 저는 이 아이템에 기여한 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아이템을 맡는 건 도둑질이나 다름없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었다.

“주인이 넘겨주면 그건 도둑질이 아니라 양도잖아. 조 대리, 서원웅한테 줄 거지?”

“…예, 그러죠.”

싫다고 해서 안 할 양반도 아니었다.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웅은 혼란스러운 듯 김태준 사장과 대찬을 번갈아봤다.

김태준 사장이 서원웅에게 말했다.

“어차피 조 대리가 꿀꺽 삼키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큰 아이템이었어. 별로 기여도 없는 한 과장에게 넘기는 것보단 절친한 서원웅한테 넘겨주는 쪽이 조 대리한테도 더 좋을 거야.”

김태준 사장은 멋대로 대찬의 속내를 판단하고 논의를 종결했다.

그는 그렇게 말해 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지. 천천히 들다 가. 자네들 생각해서 차려 놓은 거니까.”

김태준 사장이 나가자 넓은 별실이 더 휑뎅그렁하게 느껴졌다.

대찬과 서원웅 사이에 잠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대찬의 공로를 엉겁결에 뺏어간 꼴이 된 서원웅이 이 어색함을 잠재울 순 없었다.

결국 대찬의 몫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밥부터 먹자. 사장님 때문에 긴장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대찬아, 그…….”

서원웅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렵게 입을 연 다음에도 어려운 말을 해야 한다는 걸 대찬은 잘 알았다.

그 어려운 말을 그가 대신 해 주었다.

“됐어. 나도 사장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

“하지만 네 아이템이잖아.”

“사장님께도 말씀드렸지만 한 과장님, 운이 형이랑 같이 만든 아이템이지.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전략기획실 아이템이고, 또 어떻게 보면 우리 회사 아이템이야.”

“아무리 그래도…….”

대찬은 서원웅의 어깨를 턱 잡았다.

서원웅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정도면 네가 엄청 미안해하는 거 알았으니까 그쯤 해 둬.”

“하…….”

“과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사장님이 억지로 너한테 떠안긴 거라고. 그러니까 너는 더 사양하지 말고 날아오는 떡 잘 받아먹어.”

“…….”

“사장님이 내가 괜히 미워서 저러시는 게 아닌 거, 너도 알잖아. 결국 네가 커야 나도 살고 사장님도 사니까.”

서원웅은 심호흡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래. ‘미안해.’보다는 ‘고마워.’가 훨씬 낫다. 밥 먹자. 벌써 식었다.”

대찬은 식은 요리들로 허기를 달랬다.

둘은 한참 음식에만 집중했다.

집으로 돌아온 대찬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 3개비를 연달아 피웠다.

시선은 길 건너의 필래마트 일산점에 한참 머물렀다.

최소채소는 서원웅의 몫이 되었다.

대찬은 한태윤 과장을 설득했다.

서원웅은 잘못이 없다.

사장님께서 서원웅을 키우려고 다른 사람의 마음은 돌보지 않으신 결과다.

대찬이 그렇게 운을 떼고 구구절절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으려 하자, 한태윤 과장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이런 일에 있어서 대찬과 한태윤 과장은 같은 부류였다.

“더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무슨 뜻인지 잘 알았습니다.”

“…네, 과장님.”

한태윤 과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조 대리는 참 재밌네요.”

“예? 뭐가…….”

“따지고 들자면 이건 조 대리 아이템입니다. 저한테 구태여 변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변명의 당사자가 조 대리가 될 필요는 더더욱 없고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합니다.”

한태윤 과장은 대찬의 팔을 잡고 살짝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조 대리만 서원웅에게 배팅한 게 아니에요. 나도 그렇습니다. 시작은 내 의지로 배팅한 게 아니고 회장님의 의중에 따라 배팅이 된 거지만, 아무튼 그래요.”

“아…….”

“앞으로는 이런 시시콜콜한 일들로 속 썩지 맙시다.”

한태윤 과장은 대찬의 등을 툭툭 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대찬과 한태윤 과장은 서원웅을 확실하게 밀어주었다.

지금까지 밤낮을 머리 쥐어뜯어 가며 회의한 내용을 꼭꼭 잘게 씹어 어미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듯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다.

덕분에 서원웅은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사업을 완전히 이해했다.

서원웅이 이 사업을 담당하게 되자 김태준 사장은 전폭적으로 그의 뒤를 밀어주었다.

비단 대찬과 한태윤 과장을 붙여 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다.

사업과 관련된 모든 부서에 이 사업을 최우선시 하라고 지시했다.

사장의 추상같은 엄명에 각 부서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한태윤 과장에게 말했다.

“확실히 같은 사업이라도 누가 밀어주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네요.”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새삼스럽게.”

한태윤 과장도 웃었다.

최소채소는 필래마트 전국 17개 지점에서 성황리에 판매되었다.

최소채소의 형태는 2가지였다.

첫째는 한 종류의 채소만 소포장 한 단순한 형태.

둘째는 손님들이 자주 해 먹는 음식에 맞게 종류와 양을 조절한 채소를 소포장 해 놓은 것이었다.

이건 집밥채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2가지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는 톡톡히 거두었다.

판매 물량이 늘어나니 규모의 경제로 인해 제품의 생산 단가도 크게 낮아졌다.

필래 측의 사주를 받은 경제지들이 최소채소를 기사화했다.

채소 코너 앞에서 엄지를 치켜든 서원웅의 사진이 실렸다.

-필래마트, 소포장으로 ‘1인 가구·신혼부부’ 공략한다!

큼지막한 표제 아래 부제가 달렸다.

-‘徐 회장 차남’ 대리 경험 살린 야심작

김태준 사장이 기사를 통해 아우성 치고 싶은 건 표제보다 부제였다.

당장 신문 기사 하나에 서원웅을 띄웠다 해서 그의 체급이 일약 서승학만큼 커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성과가 차곡차곡 쌓인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서승학과 겨뤄 볼 정도로 성장할 것이란 게 김태준 사장의 판단이었다.

대찬은 모두의 공로가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서원웅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현실이 조금 씁쓸하기는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씁쓸함은 담배 한 개비에 씻어 낼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깟 것에 흔들리지 않기로 대찬은 마음을 다잡았다.

“최소채소를 쿠킹 박스 사업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싶어요.”

대찬은 더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김태준 사장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으니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듯 잘 나갔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내가 선장이 아니라고 날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쿠킹 박스……?”

대찬의 말에 서원웅과 한태윤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들이 지금 숨쉬는 2009년에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종류의 채소만 소포장한 최소채소, 레시피에 맞게 구성된 집밥채소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겁니다.”

한태윤 과장이 손을 모아 턱을 괴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채소는 물론이고 육류, 해물, 육수, 양념까지 한 제품으로 묶는 겁니다. 그 제품만 구입하면 집에서 바로 조리가 가능하게요.”

“그렇게 되면 단순히 채소를 소포장 하는 것보다는 품이 많이 들 텐데요. 당연히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고.”

한태윤 과장의 반론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쿠킹 박스의 경우에는 질에서 승부를 봐야 합니다. 편리할 뿐만 아니라 외식에 뒤지지 않는 맛이 보장돼야 손님들의 지갑을 열 수 있을 겁니다.”

“음, 확실히 최소채소보다는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되네요.”

대찬은 웃으며 말했다.

“네. 그러니 사장님이 확실히 밀어 주시는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기야 지금이 적기이긴 하군요. 서 대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서원웅은 잠깐 고민하더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레시피 연구나 포장 디자인, 재료 품질 관리까지 고려할 부분이 최소채소보다는 두드러지지만,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서 대리가 괜찮다면 사장님께서도 흔쾌히 오케이 사인 내려 주실 겁니다. 한번 밀어붙여 보죠.”

대찬이 제의한 쿠킹 박스 사업은 셀프셰프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셀프셰프는 집에서 쉽게 해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러면서도 단순한 끼니 해결이 아니라 분위기도 낼 수 있는 음식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를 테면 냄비 가득 쇠고기와 배추를 겹겹이 채운 밀푀유나베나 여러 가지 재료가 소량씩 필요한 월남쌈 등이 선택을 받았다.

김태준 사장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믿고 현실로 구현해 주었다.

물론 구현되기까지는 시장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한 담당자들의 피땀 어린 노고가 뒷받침되었다.

그 일원이자 기안자로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대찬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대찬은 셀프셰프 제품의 생산을 담당한 같은 계열사, 필래식품 산하의 연구소를 제집 드나들듯 했다.

일산 집에서 연구소가 있는 구파발까지 심할 때는 하루에 세 번을 오가기도 했다.

연구소에서 나온 결과를 필래마트 상품기획부와의 미팅을 통해 계산기를 두들겨 봐야 했다.

연구소에서는 한우육개장, 수육전골에는 사골 엑기스를 활용하는 편이 좋지만, 기름 맛이 두드러지는 밀푀유나베와 깔끔한 맛을 추구해야 하는 버섯전골에는 멸치와 다시마 육수가 좋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상품기획부에서는 난색을 표했다.

멸치 내장을 제거하는 건 순수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인건비가 지나치게 많이 소모된다는 지적이었다.

대찬은 둘 사이를 오고 가며 의견을 절충하고 새로운 방법을 도출해 내려 진땀을 흘렸다.

결과적으로 버섯전골에 들어가는 표고버섯을 차가운 물에 담가 자연스럽게 육수를 추출하고, 불린 표고버섯은 진공 포장을 해서 전골에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표고버섯의 감칠맛이 우러난 만큼 멸치의 양을 줄여 인건비를 줄이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그렇게 시제품이 나왔을 때, 대찬은 가장 먼저 어머니에게 그걸 선보였다.

“맛이 어떠세요?”

“음, 먹을 만한데? 일단 간편하니까 좋구나. 재료 따로따로 안 사도 되고, 칼질 따로 안 해도 되고.”

“드실 만하세요? 다행이네요.”

“물론 내 손맛에는 못 따라오지만.”

“아이고, 그거야 말하면 입만 아프죠.”

대찬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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