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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32화 (131/556)

난 할 수 있어 132화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한 겁니다.”

“감사합니다.”

“소포장이 추가로 설비가 필요하거나 재료비가 과다하게 투입되지 않으니 리스크도 적습니다.”

“네. 만약 저희 판단이 틀렸다 해도 회사가 입는 손해는 극미할 겁니다.”

“조대찬 씨한테 이런 아이디어가 다 있었군요. 괜히 혼자 싸매고 있었어요. 미안합니다.”

한태윤 과장의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이 어색하게만 들렸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이런 쪽에 젬병인 건 알았지만, 자존심 때문에 같이 하자고 말을 못했습니다.”

“같이 고민하게 해 주세요. 그래야 저도 어려울 때 한 과장님께 염치 불고하고 부탁할 수 있잖아요.”

한태윤 과장은 엷은 웃음을 머금었다.

“좋아요, 조 대리 기획안을 토대로 해서 완성해 보죠.”

“감사합니다.”

한태윤 과장은 손목시계를 흘끗 보고 말했다.

“앞으로 2시간만 내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같이 의논해 봅시다.”

대찬과 한 과장은 약속한 시간을 넘겨 자정까지 기획안을 짰다.

노력의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둘 모두 만족할 만한 기획안이 완성되었다.

“허운 사원이 PT 작성에 재능이 있습니다. PT는 허 사원한테 맡기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죠. 완성되면 제가 실장님 앞에서 프레젠테이션 하겠습니다.”

“넵.”

“조 대리 덕분에 한시름 덜었습니다. 칵테일이나 한잔하고 들어가실래요?”

전례 없이 따뜻한 말에 대찬도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저, 사모님께서 안 주무시고 기다리신다고…….”

“아…….”

잊고 있던 부끄럼이 다시 한 과장의 목을 벌겋게 달궜다.

한태윤 과장은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하죠. 허운 씨도 같이. 먼저 가겠습니다.”

“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과장님.”

한태윤 과장은 민망한 마음에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대찬도 기분 좋게 웃으며 뒷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허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정을 넘은 시간, 허운은 취해 있었다.

“뭐어? 피티이? 무슨 피티!”

“기획안 형 메일로 보내 놨어. 그걸로 PT 만들어 줘, 월요일까지.”

“지금 나한테 주말 근무 지시하는 거니? 무슨 권한으로? 응?”

“내가 지시하는 거 아니야. 한 과장님 지시야.”

허운은 괴성을 지르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내가 왜! 싫어!”

“그래? 그럼 이번 기획에서 형 이름은 뺄게.”

“너 협박 한번 되게 이상하게 한다? 이름을 빼긴 뭘 빼! 애초에 이건 한 과장님 업무지, 내 업무가 아니었다고!”

“토요일에 잠깐만 고생하면 고과점수 딸 수 있는 기횐데, 나 같으면 안 놓친다.”

허운은 귀찮음에 몸부림치다가 백기 투항 했다.

“알았어. 만들면 되잖아, PT. 내 인생 와러 PT…….”

허운의 울먹거림에도 대찬은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

허운은 초췌한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광대까지 내려올 판이었다.

그는 대찬의 책상 위에 USB 하나를 내려놨다.

“다 만들었어…….”

“수고 많았어. 한 과장님께 직접 드려야지. 내가 갖다 드리면 형 공을 가로채는 거 같잖아.”

대찬은 웃으면서 아침에 사다 놓은 아이스커피를 허운의 양손에 들려 주었다.

“하나는 형 거, 하나는 과장님 거.”

“고맙다.”

허운은 조심스럽게 한태윤 과장에게 다가갔다.

쭈뼛쭈뼛 다가간 그는 USB를 건넸다.

“과장님, PT입니다. 그리고 이건 커피…….”

“수고했어요. 주말 동안 못 쉬고 만든 거라고 들었어요. 본의 아니게 폐 끼쳤습니다.”

“아, 아닙니다. 폐는요, 무슨…….”

한태윤 과장은 허운을 보며 잠깐 웃어 주었다.

허운의 눈이 커졌다.

‘저 양반 저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어……?’

한태윤 과장은 허운의 PT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계속 중얼거렸다.

도진석 상무에게 선보이기에 앞서 실수가 없도록 끊임없이 연습했다.

김영우 차장이 도진석 상무에게 가서 말했다.

“상무님, 한 과장이 신사업 발굴 아이디어를 PT로 준비했다고 합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죠.”

“엉? 신사업 발굴?”

도진석 상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을 깜빡거렸다.

김영우 차장이 되레 당황하여 말했다.

“사, 상무님이 지시하신 건 있잖습니까?”

“어? 아, 아아, 그랬지. 그래, 가지.”

도진석 상무가 회의실에 들어가자, 한태윤 과장은 좌우에 대찬과 허운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도진석 상무를 보고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도진석 상무도 고개를 까딱이며 알은체를 했다.

그는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궁싯거렸다.

“거 대충 보고서 만들어서 올리면 되지, 무슨 PT까지 하고 그래요?”

“그래도 공들여 만들었으니 모쪼록 예쁘게 봐 주십시오.”

“예뻐야 예쁘게 보지.”

도진석 상무는 팔짱을 끼고 삐딱한 자세로 PT에 임했다.

한 과장은 프레젠테이션의 적임이었다.

다부진 체격은 좋은 옷걸이가 됐다.

발성은 또렷했다.

아이디어를 내는 데 서툰 만큼 발표에 능했다.

허운의 PT도 잘 만들어졌다.

과하게 꾸미지 않아 세련됐고, 일목요연했다.

대찬은 셋의 팀워크가 훌륭했다고 자신했다.

도진석 상무가 딴죽을 걸면 그건 심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확신했다.

“1, 2인 가구를 위한 소포장 채소를 출시하는 것이 이번 기획의 골자입니다. 최근 1, 2인 가구가 급증하고, 또 우리 마트가 위치한 지역에는 특히…….”

1, 2인 가구를 위한 소포장 채소.

그리고 더 나아가 요리법에 알맞도록 제품을 다양화하는 방안이 덧붙여졌다.

제육볶음용 최소채소에는 파, 양파, 마늘, 양배추 따위가 포함되었다.

콩나물국용에는 콩나물, 파, 마늘, 그리고 멸치와 다시마 약간.

“혼자서도 충분히, 간단히 집 밥을 만든다. 그럼으로써 신선 식품의 주 고객층이 아니었던 이들을 마트로 이끌어 내는 겁니다. 그리함으로써 채소 코너의 매출을 증진할 수 있습니다.”

“음…….”

“감자처럼 손질이 어려운 상품의 경우, 바로 조리하도록 공정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도진석 상무가 의문을 제기했다.

“미리 감자 껍질을 벗겨 놓으면 갈변될 텐데?”

“진공 포장을 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진공 포장은 장기 보관도 가능해서 고객들의 대량 구매도 유도할 수 있습니다.”

한 과장은 또박또박, 그러나 지루하지 않게 프레젠테이션을 이어 갔다.

“기존에 확보된 물량을 활용하여 간단한 공정을 거치면 되기 때문에, 비용 문제에 있어서도 큰 부담은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태윤 과장은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도진석 상무는 턱을 괸 채로 잠깐 침묵했다.

“수고가 많았습니다. 나쁘지 않네요.”

도진석 상무은 무리하게 트집을 잡을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평가에 대찬과 허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태윤 과장은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한 과장의 꽉 막힌 사고로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텐데, 한 과장 아이디어 맞습니까?”

“조대찬 대리가 주도적으로 기획했습니다.”

시종 성질을 건드리는 말에도 한 과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대찬에게 공을 돌렸다.

대찬이 거론되자 도진석 상무는 건조하게 대찬을 칭찬했다.

“조 대리,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허운 사원도 수고가 많았습니다.”

“그래. 수고했군, 다들.”

도진석 상무는 건성으로 치하하고 자리를 끝냈다.

허운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잘한 거지?”

“그런 거 같은데?”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과장님. 멋있으셨습니다.”

“조대찬 씨 덕분입니다. 고생했어요. 허운 씨도 PT 잘 만들었습니다.”

한 과장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터덜터덜 걷는 품이 처량해 보였다.

고비를 잘 넘겼다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대찬은 그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티는 안 냈지만 부하 직원 앞에서 완전히 깔아뭉개진 기분이야 오죽할까.

도진석 상무는 이 아이템을 쓸 만하다고 판단했다.

실효성도 있고, 트렌드를 반영하기도 했고, 실패 시 뒤따르는 리스크도 적었다.

긁어 볼 만한 복권이었다.

시작은 자신의 심술이었지만, 어쨌든 전략기획실에서 추진하는 아이템이니 가장 큰 수혜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최소채소 이거, 일단 일산점 한 군데에서 시범적으로 해 보도록 하죠. 반응이 좋으면 전 지점으로 확대합시다.”

도진석 상무가 의욕을 갖고 추진하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한 과장이 맡아서 하도록 해요. 조 대리, 허운 씨가 서포트 하고.”

“알겠습니다, 실장님.”

이후로 숱한 회의의 연속이었다.

보고서상의 간단한 몇 줄 문장이 현실에서는 무수한 회의와 보고서로 이어졌다.

무슨 채소를 몇 가지나 소포장 상품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소포장 작업을 매장 내에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가, 아니면 협력 업체에 위탁해야 하는가.

끊임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회의실을 들락거렸다.

“휴. 수고 많으셨습니다, 과장님.”

“수고했습니다, 허운 씨. 조 대리도 고생했어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저희 일단 한숨 돌린 기념으로 맥주라도 한잔할까요?”

한태윤 과장은 홀가분한 웃음을 지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오늘은 제가 한턱내죠.”

“채경이도 부르면 안 될까요?”

“오늘은 칙칙한 남자끼리 마십시다. 최소채소가 명분이잖습니까.”

한태윤 과장의 말에 대찬이 적극 동의했다.

“그래. 피앙세 데려오고 싶은 마음은 알겠다만, 그렇게 치자면 우리 한 과장님도…….”

“조 대리!”

한태윤 과장이 얼굴을 삽시에 붉히며 말을 끊자, 대찬은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뭐야, 과장님하고 조 대리 사이에 무슨 비밀 있어요?”

“비, 비밀은 무슨! 없습니다, 그런 거.”

대찬은 큭큭 웃으며 한태윤 과장에게 말했다.

“오늘 좀 거하게 마셔도 괜찮겠죠, 과장님?”

“…조 대리도 그렇게 인성이 좋지만은 않군요.”

셋은 제법 값나가는 안주를 앞에 두고 맥주가 가득 찬 500cc 유리잔을 부딪쳤다.

대찬이 제안한 최소채소의 반응은 숫자로 나타났다.

2명이 먹기에 적당한 양으로 소포장 된 채소들을 손님들은 부담 없이 사 갔다.

게다가 요리 초보들을 위해 요리법에 알맞은 종류와 양으로 포장돼 있으니 반응이 더 좋았다.

적은 양만 시범적으로 내보이기는 했지만, 최소채소는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했다.

종이 위의 숫자가 아니라 현실의 반응을 보고 싶었던 대찬은 짬을 내서 매장으로 나갔다.

그는 채소 코너의 현장 직원에게 슬쩍 물었다.

“최소채소 반응이 어떤가요?”

“잘 팔려요, 잘 팔려. 썩힐 염려 없다고, 바로 요리할 수 있으니까 간편하다고 많이들 찾아요. 특히 젊은 사람들이.”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직원은 웃으면서 덧붙였다.

“요 며칠은 정육 코너에도 제육볶음용 최소채소를 비치해 봤거든요. 그랬더니 제육볶음 할 때 쓰는 전지나 후지 매출도 오르고, 최소채소도 잘 팔리고 그렇다네요.”

“다행이네요.”

“간혹 물어보는 손님들이 있어요. 된장찌개용, 샐러드용 제품을 내놓을 생각이 없냐고요.”

“그렇게 기대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니 기쁘네요.”

대찬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일산점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최소채소는 전국 17개 지점에서 판매하기로 결정되었다.

임원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김태준 사장이 도진석 상무를 불렀다.

“도 실장.”

“네, 사장님.”

“최소채소, 아이템 괜찮던데. 그쪽 팀 누가 낸 아이디업니까?”

“아, 제 지시로…….”

“지시는 도 실장이 했겠지만 아이디어는 도 실장 게 아니잖아. 누구 거냐고, 아이디어가.”

도진석 상무는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태윤 과장이 주도하고, 아이디어 자체는 조대찬 대리가 낸 걸로 압니다.”

“조대찬이. 알았습니다.”

용무가 끝나자 김태준 사장은 코 푼 휴지 버리듯 도진석 상무의 곁을 떠났다.

도진석 상무의 속이 배배 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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