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31화
다른 상사라면 이렇게까지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태윤 과장이라 이렇다.
이래저래 정도 쌓이고 덕도 봤고 인품도 좋아서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오지랖도 심하면 병이라지만, 슬쩍 흘리듯 귀띔해 주는 정도야 괜찮지 않을까, 대찬은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번뜩이는 아이디어라는 게 대찬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찬은 퇴근 시간이 되어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무리에 섞이지 않고, 아직 한창 영업 중인 매장으로 향했다.
사무실 문을 나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로 시끌벅적한 매장이었다.
필래마트 일산점은 필래마트 본사가 입주해 있어 실질적인 본점으로 간주되었다.
그 위상이 무색하지 않게 일산점 매장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특히 신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저녁이 되어 퇴근한 직장인들이 매장을 찾아 더욱 시끌벅적했다.
대찬은 아무 생각 없이 매장을 천천히 거닐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매장 이곳저곳을 훑고 다니니,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혹시 본사에서 무언가 꼬투리를 잡으려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대찬은 그런 시선을 감지했다.
표정을 부러 부드럽게 하고, 목에 건 사원증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집어넣었다.
대찬은 채소 코너를 지나고 있었다.
채소 코너는 매장에서 필래마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었다.
월드몰, 크라즈망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채소 코너였다.
그들은 외국계 기업으로서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한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식성을 고려하지 못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부실한 채소 코너였다.
한국인의 채소 소비량은 세계 최상위권이었다.
2008년 한국인은 평균 223킬로그램의 채소를 먹어 치웠는데, 이는 세계 평균인 129킬로그램의 2배에 가까웠다.
월드몰의 본사가 있는 미국은 117킬로그램, 크라즈망의 본사가 있는 프랑스는 100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실한 채소 코너는 한국 손님들의 외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국인이 즐겨 먹는 쌈 채소가 구비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상추 없는 삼겹살을 상상하기 어렵다.
즉, 쌈 채소의 미비는 정육 코너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월드몰을 인수한 필래마트는 경쟁 업체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채소 코너를 구축하려 노력했다.
넓은 공간을 할애했던 의류 코너를 좁은 본래의 채소 코너로 밀어 버리고, 그곳에 채소를 진열했다.
다양한 종류, 충분한 물량, 높은 신선도를 갖춘 채소는 필래마트의 경쟁력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다.
대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양파 물량 확보에 성공하면서 이런 경쟁력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심도 가지던 차였다.
대찬은 그런 채소 코너를 가만히 선 채로 바라봤다.
채소를 사려는 손님들이 무수히 스쳐 갔다.
그런데 손님들이 많이 지나가긴 했는데 진열대의 채소들이 잘 팔리지 않았다.
채소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님들은 그저 보기만 하고 그대로 채소 코너를 지나갔다.
‘뭐지?’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후로도 손님들은 채소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지나갔다.
의아한 일이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질도 좋았다.
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대찬이 답을 얻은 건 집에 돌아온 이후였다.
보통 퇴근 후에는 대찬 혼자 간소하게 저녁을 차려 먹었다.
이따금 본가에서 반찬을 싸 오긴 했지만 대개는 직접 만들어 먹었다.
“재료가…….”
대찬은 냉장고 채소 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와 콩나물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며칠 좀 집에서 안 먹었다고 이러네.”
대찬은 난감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파 한 단을 사와 혼자 먹으려면 일주일이 족히 걸렸다.
그것도 꼬박꼬박 저녁을 집에서 챙겨야 가능했다.
바빠서 편의점에서 대충, 주말에 친구들이랑 술 한잔하다 보면 예사로 보름을 넘겼다.
아무리 신선한 채소라도 보름을 넘길 정도로 생명력이 강인하지 못하다.
파는 누렇게 시들다가 이내 못 먹게 되었다.
콩나물이야 진즉 부패한 냄새를 풍기며 갈변되었다. 사 놓고 먹지 않는 대찬을 원망하는 듯했다.
대찬은 쯧쯧 혀를 차며 시든 파와 콩나물을 버렸다.
말라비틀어진 푸성귀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보기 좋게 널브러졌다.
“아까워.”
대찬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파와 콩나물을 바라보다가 탁, 음식물 쓰레기통을 닫았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닫는 그때, 대찬은 채소 코너가 외면 받는 이유를 깨달았다.
대찬은 다시 부랴부랴 사무실로 향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은 어두웠다.
발소리도 굉음처럼 들릴 만큼 적막했다.
차단된 시야와 적막한 공기에 대찬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하필이면 지난주 김산하와 같이 본 공포 영화 장면이 떠올라 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그냥 집에서 할걸.’
대찬은 가볍게 진저리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는 홀로 사무실에 앉았다.
절약이 화두인 시대였다.
회사에서도 불필요한 지출을 아껴 보자는 목소리가 컸다.
종이컵 사용이 엄격히 금지됐고, 간식비도 반 토막 났다.
도진석 상무는 여기에 열렬히 호응하여, 직원들에게 지급되던 마트 상품권을 자율적으로 반납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모든 직원에게 같은 값만큼 지급되는 마트 상품권이 공산주의라고 했다.
그래서 마트 상품권을 모두 회수한 다음, 이 달의 우수 사원을 뽑아 그에게 몰아주는 것으로 방침을 세웠다.
그런 절약 방침의 일환이 바로 전기세 절약이었다.
사무실에 5인 미만이 머무를 때는 에어컨 사용이 금지되었다.
에어컨을 켜고 끄는 시간을 일지로 작성하게 했다.
일개 대리인 대찬도 그 지침에 따라야만 했다.
에어컨은 언감생심이요, 어둑어둑해져 가는 사무실에서 형광등도 켜지 않았다.
컴퓨터의 밝기도 최소한으로 해 놓고 대찬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거북목을 했다.
그러고는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어두우니까 집중이 더 잘되는 거 같기도 하고.’
토독, 토독.
대찬은 자판을 두드렸다.
그때 사무실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대찬은 그 순간 얼어붙었다.
직원이 남아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웅웅거리던 말소리는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졌다.
‘누구지?’
대찬은 일단 자판 두드리기를 멈췄다.
몰래 야근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 들키든 그랬다.
도진석 상무, 김영우 차장이 최악이었다.
뭐 때문에 야근을 하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그럼 결국 한태윤 과장을 도우려고 나왔다고 실토하는 수밖에 없다.
한태윤 과장을 도우려던 일이 도리어 그에게 불똥만 튀기는 꼴이 된다.
다른 직원들에게 들켜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누구나 튀는 동료는 좋게 보이지 않기 마련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찬은 모니터의 전원을 끄고 의자를 최대한으로 낮췄다.
사각지대에 위치한 대찬의 자리는, 부러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는 이상 대찬의 존재를 알기 어려웠다.
그는 불의의 방문객이 금방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뭘 놓고 가서 다시 가지러 온 거겠지.’
대찬은 숨죽인 채로 가까워지는 목소리를 기다렸다.
벌컥.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그의 그림자가 대찬의 책상 쪽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켰다.
깜깜한 사무실 조명 덕택에 안으로 들어오는 이는 대찬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대찬은 얼른 모니터를 껐다.
숨죽인 채, 그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기를 바랐다.
“자기, 밥 먹었어?”
그의 목소리를 대찬은 바로 알아들었다.
한태윤 과장이었다.
부인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찬은 낭패감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태윤 과장은 자신을 돕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
그래서 초안이 완성되기 전까지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찬의 불안감을 모르는 한태윤 과장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나? 나는 지금 막 밥 먹고 들어왔징. 조금만 더 일하다 들어갈게잉.”
“……?”
“나두 보고 싶징. 근데 오늘 더 안 하면 차장한테 깨진단 말이얌. 태범이는 밥 잘 먹었어? 샌드위치 먹였다구? 아잉, 밥 먹이지.”
“……?”
“그래그래, 자기야. 나두 사랑하고 나 오기 전에 졸리면 먼저 자. 알았지?”
“…….”
“뭐? 나 올 때까지 기다린다구? 늦게 들어온 벌? 어떻게 줄 건데? 나 기대해도 돼? 하하, 알았어, 알았어. 나도 사랑사랑해- 쪽쪽!”
“…….”
대찬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뭐야……?’
차라리 누가 한태윤 과장를 성대모사 하는 거라 생각하는 게 말이 됐다.
‘조 대리, 뭐 하러 남의 짐까지 뺏어 짊어지려고 합니까?’
‘응응, 지금 막 밥 먹고 들어왔쪄.’
동일인의 말이었지만 매치가 안 됐다.
혼란스러웠다.
탁.
그때 사무실에 불이 들어왔다.
밝은 형광등이 사무실의 어둠을 일순 몰아냈다.
한태윤 과장은 무의식적으로 대찬 쪽으로 몸을 틀었다.
둘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
“…….”
둘은 얼어붙은 채로 서로의 얼굴만 한참 바라봤다.
한태윤 과장은 옴짝달싹못하는 채로 얼굴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과, 과장님, 퇴근 안 하셨어요……?”
“그, 그러는 조대찬 씨는…….”
한 과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업무가 좀 남아서 다시 왔습니다. 집이 근처라서요.”
“그, 그런가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한태윤 과장은 대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방금 전 일은…….”
“아, 사모님하고 금슬이 좋으신 거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그게 아니라!”
“네?”
한태윤 과장의 얼굴은 숫제 홍당무가 됐다.
“다른 직원한텐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 비밀…….”
비 맞은 강아지 꼴의 한 과장을 보고 대찬은 슬며시 웃었다.
하기야, 꼿꼿하기가 대나무 같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한태윤 과장이다.
이 상황이 포르노를 보다 걸린 것만큼 수치스러울 터다.
대찬은 한태윤 과장의 당부에 즉답을 내리지 않았다.
“왜, 왜 바로 대답 안 합니까?”
“알겠습니다. 비밀로 하겠습니다. 대신 제 부탁도 하나 들어주시면 안 됩니까?”
“부탁이라니.”
대찬은 반쯤 완성된 기획안을 출력해서 한 과장에게 다가갔다.
“괜찮다고 하셨지만, 과장님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능력이나마 돕게 해 주십시오. 오지랖 떨어서 죄송합니다.”
“뭘 어떻게 돕겠다는 겁니까?”
한태윤 과장의 말투는 그대로였지만 전처럼 가시 돋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기획안 좀 잠깐 봐 주시겠습니까?”
대찬이 내민 기획안을 한 과장은 순순히 받았다.
그걸 유심히 보던 한 과장은 천천히 발음했다.
“최소채소……?”
“네. 1, 2인용으로 소포장 채소를 팔아 보면 어떨까 해서요.”
“소포장 채소라.”
“저도 근처에서 혼자 자취하는데요, 마트에서 파는 채소를 사 오면 다 못 먹고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을 만큼만 판다?”
“네. 주변에는 혼자 사는 젊은 직장인이나 신혼부부가 많잖습니까. 비단 일산점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비중은 가시적으로 늘고 있고요.”
한태윤 과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1, 2인 가구의 비중이 늘어나는 건 통계가 말해 주니까.”
“그건 우리 마트의 채소 매출을 봐도 그렇습니다. 오늘 채소 코너 앞에서 망설이다가 그냥 가는 손님들이 많더라고요.”
“그랬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부분이 젊은 부부였습니다. 아마 맞벌이일 테죠.”
“지금 판매하는 채소들이 젊은 부부들이 소비하기에는 너무 크게 포장돼 있다는 거죠?”
“네. 젊은 부부는 자녀도 적고, 외식 비중이 높아서 아무래도 큰 단위의 채소를 제때 소비하기에 어려울 겁니다.”
“괜찮은데요.”
‘그래. 괜찮다고 해야겠지.’
안 했다간 비밀이고 뭐고 확 다 불어 버릴 테니까.
한태윤 과장은 그런 대찬의 속마음을 짐작했는지 사족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