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130화 (129/556)

난 할 수 있어 130화

4번 타자 황경원이 올라왔다.

장 대리의 팔뚝에 힘줄이 돋았다.

‘아하.’

그제야 대찬은 장 대리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는 씩 웃음을 머금었다.

연거푸 장 대리에게 물 먹은 황 대리는 끝내기 안타로 승리의 주역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장 대리가 그의 뜻대로 되도록 놔두지 않았다.

장 대리는 있는 힘껏 공을 던졌다.

쐐애액, 공은 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날아갔다.

퍽!

정확히 황 대리의 엉덩이에 명중했다.

“으악!”

찰나의 순간에 불주사를 맞은 황 대리는 괴성을 지르며 넘어졌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장 대리는 모자를 벗으며 빙긋 웃었다.

3루에 있던 대찬은 밀어내기로 천천히 홈을 밟았다.

장 대리는 패전투수가 됐다.

황 대리는 승리의 주역이 됐다.

정확히 말하면 황 대리의 엉덩이가 승리의 주역이었다.

전력을 다해 던진 공 때문에 황 대리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대찬이 홈을 밟을 때까지 황 대리는 몸을 좌우로 비틀며 고통스러워했다.

대찬은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을 리 없었다.

황 대리는 찌릿 대찬을 노려봤다.

대찬은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승리를 거둔 직원들은 관중석에서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황 대리 대신에 대찬에게로 몰려갔다.

그들은 대찬의 사지를 제멋대로 잡아끌더니 하늘 높이 헹가래를 쳤다.

대찬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유채경은 카메라를 꺼냈다.

그러고는 찰칵, 셔터를 눌렀다.

하늘 높이 떠오르는 대찬.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구는 황경원 대리.

대찬을 받을 준비를 하는 허운과 서원웅.

입이 째지는 송희근 과장, 그리고 허탈한 얼굴의 김영우 차장.

이쪽을 돌아보며 찡긋 한쪽 눈을 감는 장 대리.

그 풍경을 담는 유채경의 얼굴에는 미소가 떴다.

대찬은 체육대회의 MVP가 되었다.

상금으로 받은 금일봉은 부서 전체 회식에 보탰다.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왔을 때, 김산호가 대찬에게 물었다.

“왜 야구 못하신다고 그러셨어요?”

대찬은 연기를 한껏 빨아들이고는 대답했다.

“그래야 날 내보냈을 테니까. 소소한 엿 한번 먹여 보겠다는 알량한 심산이야 뻔하지.”

그날 밤, 황경원 대리는 쓰린 엉덩이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엎드린 채로 집에서 홀로 술을 마셨다.

2009년 5월.

업무가 차츰 안정되었다.

출신이 모두 다른 직원들이 모여 처음에는 삐거덕거리던 것이 이제는 제법 합이 맞았다.

여전히 김영우 차장과 송희근 과장은 서로를 증오했다.

황경원 대리와 대찬의 관계도 여전히 원만하진 않았다.

그래도 업무가 원활히 돌아갈 정도로는 공과 사가 구분되었다.

이즈음 전직 대통령이 높은 곳에서 몸을 던져 죽었다.

그를 좋아했든 싫어했든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는 태생부터 찬성과 반대가 있다.

그에 관해 무얼 말하든 동지가 생기고 적이 생겼다.

동지를 만드는 것보다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직장 생활에 이롭다.

직장인들은 공연히 정치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날의 이슈를 화젯거리로 삼아 말을 던지던 송희근 과장도 뚱한 얼굴로 자판만 두드렸다.

뉴스에서 한 가지 소식만 알려 대니 주절거릴 다른 이슈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모처럼 조용히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리던 때, 임원 회의를 마친 도진석 상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턱, 턱, 턱.

도진석 상무의 걸음 소리가 거칠었다.

안 그래도 조용한 사무실이라 걸음 소리는 직원들의 귀에 꽂히듯 들렸다.

대찬과 허운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도진석 상무의 휘하에서 일한 지 어언 반년.

걸음 소리만 들어도 그의 기분을 능히 짐작했다.

‘저기압이다. 그것도 열대성저기압이다.’

직원들은 긴장했다.

“홍은주 씨! 냉커피 한 잔 타 와요.”

“네, 실장님.”

도진석 상무는 평소에 자신이 냉철한 지식인인 양, 합리주의자이며 원칙주의자인 양 행세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전략기획실에서 가장 다혈질이었다.

임원 회의에서 심사가 뒤틀릴 만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대찬은 영업부 장 대리와 마주쳤을 때 그 내막을 알았다.

장 대리 쪽에서 먼저 운을 띄웠다.

“조 대리님, 오늘 도 상무님 기분 괜찮으셨어요?”

“아뇨, 영 안 좋으시던데요.”

“그럴 만도 하죠.”

대찬은 팔짱을 끼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임원 회의에서요, 사장님한테 흠씬 혼나셨나 봐요.”

“네? 요즘 저희 부서 분위기 좋았는데 왜…….”

“할머니 산나물하고 양파 물량 확보 덕분에 기획실 분위기 좋았잖아요? 그러고 보니 둘 다 조 대리님 작품이네.”

“저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네, 그거 덕택에 저희 부서 기 좀 폈죠.”

“그게 오히려 독이 됐대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장 대리의 말을 듣고 대찬은 아차 싶었다.

분명 도진석 상무의 지시를 받아 대찬이 해낸 일들은 회사에 유익했다.

하지만 회사의 이익이란 숫자만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당장의 이익이 실은 회사의 기둥뿌리를 갉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태준 사장은 아랫사람이 멋대로 활개 치는 걸 두고 보지 못한다.

도진석 상무가 상품기획부 최 부장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전략기획실의 영역을 벗어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찬에게야 귀책 사유는 없었다.

도진석 상무의 지시를 받아서 업무를 이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도진석 상무의 월권은 김태준 사장이 보기에 도전에 가까웠다.

장 대리는 도진석 상무가 김태준 사장에게 공개적으로 면박당한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김태준 사장의 성격을 아는 대찬은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장 대리는 대찬의 팔을 가볍게 잡으며 당부했다.

“암튼 조심해요. 불똥 튈라.”

“귀띔해 줘서 고마워요, 장 대리님.”

“에이, 뭘요. 조 대리님이 해 주신 게 얼만데.”

대찬은 장 대리와 눈인사를 나누고 서로 갈 길을 갔다.

장 대리와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갔는데, 나섰을 때보다 공기가 더 냉랭했다.

대찬은 김산호에게 업무를 물어보는 척하며 속닥거렸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김산호는 아무 말 없이 대찬을 탕비실로 이끌었다.

그는 대찬의 몫까지 커피를 타며 말했다.

“말도 마세요. 한바탕 쓸고 지나갔어요.”

“쓸고 지나가다니, 뭐가?”

“상무님이요.”

“상무님이 왜?”

김산호는 목소리를 더 죽이며 말했다.

“한 과장님 막 몰아붙이셨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 과장님을? 우리 부서에서 제일 일 잘하시는 분인데.”

“그거야 다 알죠. 아까 갑자기 한 과장님 부르셔서는, 과장 정도 되면 액티브하게 새로운 사업을 발굴하고 추진해야 하는데 하라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하느냐고 그러시더라고요.”

“참 나.”

“필래 출신들은 죄다 하라는 일만 하라는 군대식 타성에 젖어 있다고, 한 맺힌 사람처럼 열변을 토하시던데요.”

“아, 그래?”

대찬은 도진석 상무가 왜 한태윤 과장을 걸고넘어졌는지 알아챘다.

김태준 사장에게 뺨 맞고 한태윤 과장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다.

업무 능력으로 치자면 한태윤 과장이 송희근 과장보다 훨씬 나았다.

그럼에도 도진석 상무가 송희근이 아닌 한태윤에게 악을 쓴 건, 아마 한태윤 과장이 김태준 사장의 기질을 닮은 까닭이리라.

김산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암튼 그래서 한 과장님이 갑자기 신사업 발굴 업무를 떠안게 됐어요.”

“난감하시겠군.”

“한 과장님이 주어진 일은 뚝딱 잘해내시지만, 아무래도 융통성이 없으셔서…….”

“그러시겠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탕비실을 나섰다.

그러고는 한태윤 과장을 흘끔 건너다봤다.

척 봐도 세상 모든 고뇌를 혼자 끌어안은 듯한 표정이었다.

일주일 뒤, 김영우 차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한태윤 과장의 경직된 사고와 부족한 창의력이 빚어 낸 졸작이 부른 화였다.

본디 김영우 차장이 얼굴을 붉힐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도진석 상무는 김영우 차장에게 한태윤 과장의 아이템을 책임지고 감독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 탓으로 김영우 차장은 한가롭게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한 과장, 이건 좀 곤란하지 않아?”

“죄송합니다.”

“어쩌면 보고서에 쓰인 한 글자, 한 글자가 이렇게 고루하고 딱딱해? 자네는 그냥 군인이 딱이야.”

“더 고민하겠습니다.”

김영우 차장은 노골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한 과장은 착잡한 표정으로 김영우 차장의 앞을 떠났다.

한 과장은 로봇처럼 일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주변 사람의 동정심을 더 불러일으켰다.

대찬은 집에 돌아와서도 한태윤 과장이 내내 눈에 밟혔다.

밥을 깨작거리던 대찬은 결국 한태윤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대리, 이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

“저 오지랖인 거 알지만, 과장님이 진행하시는 신사업 발굴 건이요.”

“네.”

“제가 좀 도와 드릴 일은 없을까 해서요.”

대찬의 말에 한태윤 과장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 대리 맡은 일만 해도 빠듯한 거 나도 압니다. 뭐 하러 남의 짐까지 뺏어 짊어지려고 해요?”

“그래도 서포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아이디어 제기 차원입니다. 다른 부서랑 협의해서 간단한 보고서만 작성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그럼 언제라도 도움 필요하시면 부담 없이 말씀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안 그럴 거잖아요.’

대찬은 전화를 끊으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한태윤 과장의 성격에 앓으면 앓았지, 다른 사람한테 손을 뻗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아는 대찬은 내내 한태윤 과장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한태윤 과장은 하루하루 말라 갔다.

얼굴이 수척해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자, 오늘 간단히 맥주나 한잔하고 들어갈까?”

퇴근 시간이 임박해 김영우 차장이 직원들에게 제안했다.

권유의 틀을 빌린 명령이었다.

직원들은 군말 없이 일어났다.

한태윤 과장도 그럴 참이었다.

그런데 김영우 차장이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과장도 가게? 상무님이 말씀하신 거 다 끝났나?”

“아… 아닙니다.”

“일 안 끝내고 마시면 술 맛 안 나.”

한태윤 과장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직원들은 한태윤 과장만 남겨두고 맥주를 마시러 갔다.

대찬이 뒤를 돌아보자, 한태윤 과장이 웃으면서 얼른 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흘렀다.

한태윤 과장은 번번이 김영우 차장에게 퇴짜를 맞았다.

도진석 상무가 한태윤 과장을 들볶은 건 홧김이기도 해서, 그는 한태윤 과장에게 지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가물가물 잊어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김영우 차장은 악착같이 한태윤 과장을 들볶았다.

김영우 차장 역시 꼬장꼬장한 한태윤 과장에게 쌓인 게 많다는 뜻이었다.

허운은 대찬과 바람을 쐬러 옥상에 나와서 말했다.

“참 신기하지.”

“뭐가 신기해?”

“한 과장님 말이야, 다른 일은 척척 해내는데 유독 저런 일에는 완전 쥐약이시잖아.”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다들 주특기가 다르다지만 한 과장님은 좀 그런 경향이 뚜렷하시지.”

“원래 안 되는 건 죽을힘을 다해도 안 돼. 나도 치킨 끊으려고 진짜 별 짓을 다 했는데 어제도 시켜 먹었다니까?”

“그건 좀 결이 다른 얘기 같은데.”

대찬과 허운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 한태윤 과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관한 얘기를 하던 대찬과 허운은 입을 닫았다.

대찬이 겸연쩍게 웃으며 한태윤 과장에게 알은체를 했다.

“담배 피우러 나오셨어요?”

“아, 조 대리. 담배는 아니고, 그냥 좀 답답해서.”

“아, 예…….”

“담배 다 피웠으면 먼저 들어가요. 난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대찬과 허운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도 한태윤 과장을 한번 흘끗 돌아봤다.

한태윤 과장은 벤치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