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9화
대찬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는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는데 야구는 자신이 없어요. 황 대리님이랑 김산호 씨가 야구 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계주는 제가 할게요.”
그때 김영우 차장이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야구에 자신이 없어?”
“애초에 잘 몰라요.”
김영우 차장의 눈이 순간 빛났다.
김영우 차장과 황경원 대리는 찰나에 시선을 교환했다.
김영우 차장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
“…네?”
“다 해 보면서 배우는 거지. 해 봐.”
“그, 그래도.”
“해. 계주는 산호 씨가 하지.”
그러자 김산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그런데 달리기는 조 대리님이 잘하신다고…….”
“어허, 그래도 1살이라도 어린 산호 씨가 낫겠지. 토 달지 마.”
김영우 차장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황경원 대리는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또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날렸잖아요. 제가 미시간주립대 4번 타자였습니다. 야구는 김산호 씨 대신 제가 나가죠.”
“그래? 역시 해외파는 문무 겸비군. 그렇게 해! 조 대리 부족한 부분을 황 대리가 잘 메워 봐.”
“그러겠습니다. 쉽진 않겠지만요.”
황경원 대리는 낄낄 웃으며 대찬 쪽을 훑어봤다.
대찬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퇴근길에 대찬은 김산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조 대리님, 아니지, 퇴근했으니까 이건 사적인 통화죠? 형님, 오늘 참개구리끼리 저녁 식사 했는데요.”
“뭐야, 그 모임이 아직도 유효해?”
도진석 상무와 김영우 차장의 비위 몇 번 맞춰 준 걸로 저 빌어먹을 비공식적 모임이 해체됐을 줄로 믿었다.
요 며칠 업무 외적으로는 별다른 갈등도 없었다.
김영우 차장은 야구 못한다는 대찬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들어 야구를 시켰다.
대찬은 그걸 보고 여전히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감지했다.
하지만 여태 황소개구리 타령을 하고 있을 줄이야.
대찬은 기가 막혀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뭐래?”
김산호가 말한 참개구리란 황소개구리 대찬에게 대항하는 김영우 차장부터 오다혜까지를 이르는 말이었다.
물론 김산호와 오다혜는 황소개구리의 이중 스파이였지만.
“이번 체육대회가 은근히 사내 평판에 영향을 미칠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말이지?”
“사장님이나 부사장님이 굉장한 스포츠맨들이셔서 운동에 소질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고 해요.”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다부진 몸과 군인에 가까운 투철한 사상을 떠올렸다.
김산호의 말이 절로 수긍됐다.
이동수 부사장이야 정평이 난 야구광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응, 그런데?”
“형님을 투수로 내세우신다는데요? 차장님이 적극 추천했대요.”
“투수?”
“네. 타자는 삼진 먹고 들어와도 되지만 투수는 못하면 티가 확 나니까. 사장님, 부사장님이 보는 앞에서 망신살 좀 뻗치게 할 생각인가 봐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유치하긴!”
“그래서 형님이 자신 있는 계주는 또 못하게 한 거고요.”
“나 하나 엿 먹이자고 노력 많이 하셨겠는데.”
“어떡하죠? 전 사원 다 보는 앞에서 망신당하면 좀…….”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아.”
“네?”
“괜찮다고.”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체육대회 당일.
볕이 쨍했다.
체육대회 하기에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특히 야구를 하기엔.
약식으로 5회까지만 하기로 했다지만, 대찬은 투수로서 저 쨍한 볕 아래 오래 서 있어야만 했다.
물론 엉망진창으로 실점 릴레이를 펼치면 1회도 채 못 채우고 강판당할 테지만, 대찬은 그럴 요량이 아니었다.
계주, 피구, 줄다리기가 끝나고 야구 차례가 돌아왔다.
송희근 과장이 노파심에 대찬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투수를 바꿔 달라고 하는 게 어때?”
“네?”
송희근 과장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조 대리 야구 못한다며. 여기서 지면 사장님 금일봉이 저쪽으로 넘어간다니까.”
비단 금일봉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야구에 2명이나 투입하게 된 건 송희근 과장 때문이었으니, 대찬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팀이 패배하면 비난의 화살이 자기한테 꽂힐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그러자 김영우 차장이 싹둑 잘랐다.
“그래도 이미 정해진 사항 아닙니까. 정히 그러시면 첫 실점 하면 바꾸시죠.”
그는 어떻게든 대찬을 망신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찬은 웃으면서 김영우 차장에게 말했다.
“그럼 차장님만 믿고 편하게 던지겠습니다.”
마운드에 오르는 대찬의 뒷모습을 보고 김영우 차장이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4번 타자 황 대리가 있잖습니까.”
“으음…….”
송희근 과장은 불쾌한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대찬은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편의 1번 타자는 영업부의 장 대리였다.
한창 월드몰 출신 직원들과 전보된 직원들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서명 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장 대리는 대찬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때 대찬이 나서서 남은 사람들의 서명을 대신 받아 준다고 했다.
게다가 문제가 서명 운동의 효과 이상으로 잘 풀렸다.
그러니 그가 대찬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장 대리는 야구 헬멧의 챙을 잡고 살짝 고개를 숙여 대찬에게 알은체를 했다.
대찬도 웃음으로 화답했다.
장 대리는 제법 그럴듯한 폼으로 타석에 섰다.
대찬은 모자를 벗고 가볍게 고개 숙였다.
장 대리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1구 들어갑니다…….”
대찬은 중얼거리고 와인드업 했다.
그러고는 역동적인 폼으로 손목을 챘다.
공이 쐐애액, 빠르게 날아갔다.
“팡!”
대찬의 공은 포수의 미트에 정확히 빨려들어 갔다.
예상보다 강력한 구위에 포수의 손이 저릿했다.
장 대리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물론 가장 놀란 건 김영우 차장과 황경원 대리였다.
“뭐, 뭐야……. 못한다더니.”
“…….”
황 대리의 얼굴이 썩었다.
장 대리는 난처하게 웃으며 대찬에게 말했다.
“살살하십시오!”
“금일봉이 걸렸는데 어떻게 그래요.”
대찬은 웃으면서 제2구를 던졌다.
밋밋하게 날아오던 공은 갑자기 아래로 쑥 꺼졌다.
장 대리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조 대리님! 변화구라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하하, 죄송합니다.”
야구를 모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기본적으로 대찬의 운동신경은 출중했다.
미네소타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탁구 클럽에 들었지만 종종 야구도 즐겼다.
황 대리만 미국에서 그랬던 게 아니다.
군대에서도 그랬고, 이동수 부사장 못지않게 대찬도 야구를 좋아했다.
장 대리는 세 번째 공에도 맥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삼구삼진.
장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대찬과 같은 팀인 허운과 서원웅, 유채경이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대찬은 2번 타자와 3번 타자도 가볍게 잡아내고는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관중석으로 돌아오는 대찬을 같은 팀 사람들이 박수로 맞았다.
송희근 과장도 입을 헤벌쭉 벌리며 대찬을 칭찬했다.
“뭐야, 조 대리! 야구의 야 자도 모른다더니!”
“힘으로 던졌는데 운이 좋았어요.”
“변화구까지 던져 놓고 변명이 너무 구차하네.”
송희근 과장은 친히 생수 뚜껑을 따 주는 호의까지 보였다.
김영우 차장과 황 대리의 얼굴은 뻣뻣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경기를 즐기던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역투를 보고 미소를 띠었다.
“저 자식은 너무 얄미워.”
“얄밉다니요?”
바로 옆의 이동수 부사장이 물었다.
“뭐든 싱겁게 뚝딱 해내니까.”
“그렇긴 하군요. 운동에까지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얄미운 자식!”
김태준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웃음이 번져 있었다.
상대편의 투수는 장 대리였다.
타석에서는 대찬에게 맥없이 삼진을 먹었지만 투수로서는 그도 제법이었다.
1번 타자로 나선 허운에게 볼넷을 내주긴 했지만 1회를 실점 없이 무사히 틀어막았다.
자칭 미시건주립대 4번 타자 황경원 대리도 힘찬 헛스윙으로 삼진을 먹었다.
대찬은 픽 웃었다.
대찬은 2, 3, 4회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발군의 능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넥타이 부대를 때려잡는 덴 무리가 없었다.
장 대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9번 타자에 배치된 서원웅은 주야장천 번트만 대다가 아웃되기 일쑤였다.
김태준 사장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재미없는걸. 모름지기 야구는 점수가 나야 재밌는데.”
“사장님! 뭘 모르시는 말씀! 야구의 묘미는 바로 투수전입니다. 저는 아주 가슴이 뛰는걸요!”
야구광인 이동수는 제멋대로 떠벌리다가 김태준 사장의 눈총을 맞고 입을 합 다물었다.
사장님이 재미없다면 재미없는 것이다.
0 대 0의 팽팽한 균형이 이어졌다.
대찬은 5회까지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완벽한 투구에 같은 팀의 직원들은 열광했다.
5회 말.
여전히 장 대리가 마운드에 버티고 있었다.
그가 마운드에 올라가려고 하자 그의 상사인 영업부장이 붙들었다.
“이봐, 장 대리.”
“예?”
“이번 회에 적당히 져 줘.”
승부욕이 강한 편인 장 대리는 난색을 표했다.
게다가 이 팽팽한 투수전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합니까?”
“왜는! 이대로 무승부로 가면 연장전인데 저기, 사장님 표정을 좀 봐.”
영업부장은 슬그머니 사장 쪽을 가리켰다.
잔뜩 지루한 얼굴이었다.
장 대리도 영업부장의 말뜻을 이해했다.
“아.”
“연장전 가서 이겨 봤자 뭐가 남겠어. 다른 직원들도 슬슬 지겨워하니까 적당히 져 줘. 알았지.”
장 대리도 물불 못 가리는 천둥벌거숭이는 아니었다.
못내 아쉽긴 했지만 사장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8번 타자부터 시작이었다.
8번, 9번은 능력이 떨어지는 타자를 배치했다.
대찬의 팀도 사장의 지루한 표정을 감지했다.
여기서 승부를 봐야 했다.
맥없이 헛스윙만 하는 8번보다는 그럴듯한 대타가 필요했다.
감독 겸 치어리더인 송희근 과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자네가 8번 대타로 나가.”
“그, 그럴까요?”
대찬은 8번 타자의 헬멧과 방망이를 넘겨받았다.
투타를 바꿔 다시 마주한 대찬과 장 대리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어차피 져 줄 거…….’
장 대리는 밋밋한 직구를 던졌다.
대찬은 그걸 정확한 타이밍에 받아쳤다.
공은 1, 2루 사이를 빠져나갔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우익수가 따라갔다.
그사이에 대찬은 전력 질주로 1루를 밟았다.
우익수의 연약한 어깨에 공이 비실비실 날아갔다.
그걸 본 대찬은 내친 김에 2루까지 달렸다.
달리기에 자신 있다고 공언한 만큼 대찬은 여유 있게 2루를 밟았다.
“좋았어!”
송희근 과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찬은 장 대리 쪽을 바라보며 민망하게 웃었다.
좋아하기에는 너무 봐준 투구였다.
장 대리는 모자챙을 살짝 내리며 대찬의 웃음에 화답했다.
다음은 9번 타자 서원웅.
번번이 번트만 대던 그가 이번에도 번트 자세를 취했다.
‘불쌍한 서 대리.’
장 대리는 그에게도 자비를 베풀었다.
역시 밋밋한 직구가 날아갔다.
공은 서원웅이 방망이를 갖다 댄 자리를 정확히 찾아갔다.
툭, 방망이에 맞은 공이 1루 쪽으로 굴러갔다.
번트를 댄 셈이었다.
대찬은 그사이에 3루를 밟았다.
제 몫을 다한 서원웅은 박수를 받았다.
이어 장 대리는 2번, 3번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만루.
‘왜 저러시지?’
그냥 안타 하나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기왕 져 주기로 한 게임을 굳이 질질 끌고 가는 이유를 몰랐다.
대찬은 그 이유를 곧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