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8화
“솔직히 말씀드리면, 비즈니스적인 목적이 다분했습니다.”
“그래서 더 감사해요.”
뜻밖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신지…….”
“일방적인 호의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악수할 수 있도록 하는 호의니까. 그게 더 좋아요.”
칭찬인지 욕인지.
대찬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렇게 포장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단순한 호의는 쉽게 무너져요. 조금만 귀찮고 돈이 없고 몸이 피곤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쌀쌀맞아져요. 그런데 필래의 호의는 단순하지 않잖습니까.”
“모쪼록 단발적인 지원이 아니라 오래갈 수 있는 인연인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도진애는 대찬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게 바로 제가 원하던 대답이었어요.”
대찬은 하룻밤을 더 마을에서 보내고 상경했다.
가기 전에 약속대로 새 축구공을 사서 아이들에게 선물했다.
올라올 때의 마음은 가뿐했다.
서울로 올라올수록 별빛들이 희미해졌다.
대찬은 회사로 돌아가 보고서를 올릴 생각에 별빛은 진즉 까먹어 버렸다.
* * *
“잘했어, 조 대리!”
김영우 차장의 입이 함지박만 해졌다.
부하의 공은 곧 상사의 공이기도 했다.
상당한 기간 필래마트 17개 점포에 공급할 수 있는 양파 물량이 확보되었다.
그것도 예상가를 훨씬 밑도는 가격이 사전 계약 되었다.
기대 이상의 쾌거였다.
김영우 차장은 대찬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참 인생 쉽게 사는 양반이시네.’
김영우 차장에게 일전의 악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물론 쉽게 씻긴 만큼 얼룩은 다시 쉽게 묻을 것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의 웃음이 대찬도 꺼려지지 않았다.
“이건 전적으로 조 대리의 공이니까, 실장님께는 직접 보고하도록 해. 내가 말씀드려 놓을 테니.”
김영우 차장은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그러나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보고하기보다는 다른 분이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다른 분……?”
김영우 차장은 혹시 대찬이 자신에게 공을 넘기나 싶어 은근히 기대하는 투로 물었다.
그런 기색을 짐작한 대찬은 얼른 그의 오해를 불식시켰다.
“홍은주 씨가 보고했으면 합니다.”
“호, 홍은주? 하지만 계약직이 실장님께 직접 보고하는 건 좀…….”
“홍은주 씨 직급이 낮긴 하지만 능력과 경력 면에서 모자람이 없습니다. 충분히 자격이 있습니다. 이번 건에도 큰 기여를 했고요.”
“으음… 정 그렇다면야…….”
김영우 차장이 감 놔라, 배 놔라 할 일이 아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진석 상무에게 직접 보고하고 공을 인정받을 기회는 홍은주에게 돌아갔다.
“홍은주 씨, 보고서 준비되는 대로 차장님하고 나한테 컨펌 받은 다음에 실장님께 직접 보고하면 돼요.”
“네? 제가요……?”
“네, 홍은주 씨가.”
일이 잘되면 홍은주의 이름으로 보고서를 올리겠다는 대찬의 약속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자신에게 공을 넘길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던 차였다.
“하지만 이번 건은 전적으로 조 대리님 공이에요. 저는 자격 없어요.”
“왜 자격이 없어요? 홍은주 씨 덕에 얼마나 일을 쉽게 했는데요.”
“하지만…….”
“더 토 달지 마요. 정 이해가 안 되거든 지금까지 남들이 홍은주 씨 공 가로챈 거 보상이라 생각해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홍은주는 멍하니 대찬의 뒷모습을 보다가, 찔끔 눈물을 흘렸다.
누가 볼세라 얼른 눈을 훔쳤다.
그동안 홍은주의 노력은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항상 보조였다.
그 과실은 보조의 대상이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대찬이 홍은주의 보조가 되어 주었다.
홍은주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홍은주는 열과 성을 다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도진석 상무 앞에 섰다.
도진석 상무는 홍은주를 빤히 바라봤다.
“김 차장이 그러더군, 이번 건은 자네가 직접 보고한다고.”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야. 뭐, 자네 수고가 많았으니 조 대리가 양보한 거겠지. 고생했네.”
홍은주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번 건은 나뿐만 아니라 더 윗선에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어. 자네 정규직 전환에 큰 도움이 될걸세. 물론 이거 하나만으로 장담하긴 어렵겠지만.”
정규직, 이 세 글자는 홍은주에게 가장 절실했다.
실장의 입에서 희망 섞인 관측이 나오니,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홍은주의 얼굴도 자연스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음, 나가 봐.”
홍은주가 나가고 도진석 상무는 중얼거렸다.
“조대찬 그 자식! 홍은주 위하는 척하면서 제 공이랍시고 나한테 더 어필하고 있잖나. 여우 같은 자식.”
양파가 출하될 시점이 되자 시세는 고공행진을 했다.
예상된 일이었다.
필래마트는 양파 가격이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확보한 물량을 일시에 쏟아 냈다.
게다가 가격은 평소보다도 더 낮게 책정했다.
필래마트는 양파를 팔아서 이문을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싼 가격에 양파를 풀어서 고객들의 방문을 본격적으로 유도해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필래마트의 이 한 수는 경쟁사들에게 유효타를 먹였다.
양파를 비롯한 신선 식품들의 매출이 크게 뛰었다.
도진석 상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최 부장? 이번에 월간 영업 보고서 봤지? 거봐, 내 뭐라고 했어.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니까? 우리 부서에서 언제까지 상품기획부 수발을 들어 줘야 하냐구. 이번에 임원 회의에서 한마디 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따끔하게 야단 좀 맞아야 돼, 당신은.”
최 부장이 왁왁거리려는 찰나, 도진석 상무는 뚝 전화를 끊었다.
그는 남들 몰래 입을 가리고 애처럼 큭큭 웃었다.
도진석 상무는 최 부장의 얼굴에 똥물을 뿌릴 심산으로 임원 회의에서 양파 물량 확보의 건을 큰 소리로 떠들었다.
자연히 김태준 사장도 그 일에 관심을 갖고 보고서를 직접 챙겨 읽었다.
그는 이동수 부사장과 티타임을 가지면서 말했다.
“이것도 조대찬이 그놈이 한 짓이라지?”
“네, 사장님. 함평의 양파영농조합에서 양파를 싹쓸이해 왔다고 합니다.”
“난 놈은 난 놈일세. 허! 참 나.”
“덕분에 양파 공급에 차질이 전혀 없습니다. 위마트보다 32퍼센트, 업하우스보다는 48퍼센트 저렴한 가격에 양파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그런데 이 보고서가 조대찬 대리가 아니라 동행한 홍은주로 되어 있습니다.”
“홍은주? 그 사람은 직급이 어떻게 되는데?”
“그게… 고졸 계약직입니다.”
이동수 부사장의 말에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리랑 고졸 계약직이 같이 진행했는데 왜 계약직 이름으로 보고서를 올리지?”
“글쎄요. 도 상무도 영문을 잘 모르겠다고 그러더군요.”
잠깐 고심하던 김태준 사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난 알 거 같군.”
“조 대리가 왜 그랬을까요?”
“그놈이 나를 잘 알고 있어.”
“예?”
이동수 부사장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대찬은 서원웅의 보완물이어야 한다. 딱 그 정도여야만 한다. 과한 재능은 모자란 재능만 못하다.”
“자신은 공을 남에게 돌릴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사장님께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김태준 사장은 픽 웃었다.
“의도는 그렇겠지만 이게 어떻게 우회적인가. 내놓고 아우성을 치는데. 일개 보조한테도 공을 양보할 줄 아니 서원웅에게는 더더욱 그러겠다는 표시를 하는 거야.”
“뭐, 사장님의 생각이 맞다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차라리 이러는 쪽이 더 좋지.”
김태준 사장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대찬과 홍은주의 합작품으로 확보한 양파 물량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었다.
고객들은 싼값에 귀한 양파를 사 갔으니 좋았고, 회사 입장에서는 그걸 미끼로 더 많은 고객을 유치했으니 좋았다.
김태준 사장은 이 일로 당연히 흐뭇했고, 대찬에게 더 큰 호의를 품었다.
도진석 상무는 앙숙인 최 부장에게 거들먹거리고 그를 음해할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도진석 상무는 김영우 차장에게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김영우 차장은 대찬에게 품은 앙금을 조금은 녹였다.
“조 대리, 수고 많았어! 실장님이 법카 맘대로 긁으라고 하셨으니까 오늘은 진탕 마셔 보자고!”
“하하. 감사합니다, 차장님.”
“내가 감사할 일이지!”
김영우 차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칼바람만 불던 전략기획실에 모처럼 훈풍이 불자 직원들의 경직된 얼굴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날 대찬은 만취 상태가 되어 집까지 비틀비틀 좀비처럼 걸어갔다.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일이 몰려들었다.
도진석 상무가 최 부장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인 덕택에 그쪽의 업무를 억지로 떠맡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략기획실의 업무 자체가 원체 바빴다.
필래마트가 본격적으로 출범한 첫 해이니 업무의 부담은 더욱 심했다.
사람은 본시 약한 존재라, 이런 과중한 업무가 어깨에 실리면 짜증이 많아지고 옹졸해진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하지만 일체유신조, 모든 것은 몸의 상태에 달린 경우도 심심찮았다.
황경원 대리가 허운을 보며 말했다.
“허운 씨, 이번 분기 매출 항목별 그래프랑 서머리 완성됐어요?”
“아, 아직…….”
“여태 그거 하나 못하고 뭐 했습니까? 이번 주 발등에 불 떨어진 거 몰라요?”
“죄송합니다! 바로 하겠습니다.”
허운은 어깨를 움츠리며 업무에 열중했다.
이런 판국이니 허운과 유채경의 연애도 쪽잠을 자듯 피로하게 연명되는 수밖에 없었다.
둘만의 탕비실 연애도 눈코 뜰 새 없는 일정 때문에 잠정 휴업에 들어갔다.
김영우 차장과 송희근 과장의 갈등도 다시 수면 위에 올라왔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서원웅의 체력이 방전 직전까지 치달았다.
모두들 야근의 귀신이 되었다.
늦은 밤까지 전략기획실 사무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 날이 숱했다.
“자, 오늘 저녁은 간단히 샌드위치로 할까 하는데, 다들 어떻습니까.”
김영우 차장은 당연히 야근을 상정해 놓고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그렇게 물었다.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기실 그 의견에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암묵적으로 동의하자 홍은주가 일어났다.
“메신저로 드시고 싶은 메뉴 보내 주시면 맞춰서 사 오겠습니다.”
그런 나날의 반복이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윗선에서 속 편한 결정이 내려왔다.
“한마음체육대회를 연다네.”
과장 회의에서 돌아온 송희근 과장이 말했다.
임원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됐다고 했다.
스포츠맨을 자처하는 이동수 부사장의 아이디어라고 했다.
갈 길이 구만 리인 전략기획실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속 터지는 소리였다.
황 대리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탄식했다.
“귀찮네요.”
오다혜 사원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날도 슬슬 더워지는데 쓸데없이 땀 빼게 생겼네요.”
“나는 오랜만에 몸도 풀고 좋을 거 같은데…….”
김산호가 다른 반응을 보이자 오다혜는 찌릿 눈총을 쐈다.
김산호는 어깨를 움찔거리고 멋쩍게 웃었다.
송 과장은 턱을 괴고 잔뜩 권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치어리더는 내 몫이니까 땡볕에서 땀 흘리는 건 당신들이 하라고. 국민학교 시절부터 운동장은 딱 질색이었으니까.”
“치어리더가 들창코 아저씨여서야 선수들이 힘이 나겠어요?”
홍은주가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송 과장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 뭐야?”
“어머,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진심을.”
“버르장머리하고는!”
“그래서 종목은 뭡니까?”
대찬이 묻자 송 과장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계주랑 피구, 줄다리기, 야구.”
“야구는 좀 뜬금없네요.”
“그렇지? 부사장님이 야구광이잖아. 그래서 축구 대신 야구가 들어간 모양이야.”
이동수는 송 과장의 말대로 야구광이었다.
“선수는 어떻게 할까요?”
“나는 치어리더니까 빠질 거고, 피구는 여사원 종목이라 음… 홍은주 씨가 좋겠군.”
송 과장은 허약해 보이는 오다혜 대신 옹골찬 면이 있는 홍은주를 지목했다.
“알겠습니다.”
홍은주는 군더더기 없이 대답했다.
“줄다리기는 산호 네가 나가라. 아무래도 제일 팔팔하니까.”
“넵.”
“남은 건 계주랑 야군데, 야구는 우리 팀에서 2명 차출하라더군.”
인원도 적은 전략기획실에서 야구에 2명이나 차출하는 까닭을 알았다.
이건 전적으로 송희근 과장의 무르고 유약한 성품 덕택이다.
학창 시절에 축구는 예사로 하지만 야구를 즐기는 인원은 많지 않다.
아마 다른 팀에서도 야구에 능한 직원이 부족할 터였다.
그러니 당해도 싫은 소리 못하는 쭉정이의 팀에 2명씩이나 선수를 배정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