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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27화 (126/556)

난 할 수 있어 127화

도진애 조합장은 샬롯의 면전에 대고 직설적으로 쏘았다.

“4년 전, 한마음조합을 결성하고 매년 샬롯마그넷 측에 유통 라인을 축소해 양파를 좋은 가격에 제공하자는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내내 묵묵부답이셨죠?”

“그, 그게…….”

“그러시더니 양파가 품귀 현상을 빚으니까 여기까지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아예 판을 엎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기셔야죠.”

도진애 조합장의 말에 샬롯마그넷 측은 할 말이 궁했다.

‘그래서 시원하게 도장을 안 찍어 준 것이었군.’

그제야 대찬은 거래가 지지부진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샬롯마그넷은 굳이 이문이 크게 남지 않는 양파를 조합과 직접 거래하지 않았던 것이다.

4년 전부터라면 필래마트는 완전히 사세가 쪼그라졌을 때니 조합과 직거래할 만큼 많은 물량이 필요하지 않았을 터였다.

덕분에 조합 측의 인심을 잃지는 않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었다.

도진애 조합장은 대찬을 바라보며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마을회관은 어째 주무실 만하셨나요?”

“그건 어떻게…….”

“거기서 고스톱 치시는 분들이 전부 저희 조합원이신데요. 모를 리가요.”

“신세 졌습니다.”

“신세는요. 일단 비즈니스부터 논하시죠.”

대찬을 향한 도진애의 말투는 샬롯을 대할 때와는 달리 부드러웠다.

샬롯 쪽에서는 배알이 꼴렸다.

필래마트나 샬롯이나 제시할 수 있는 가격은 제한적이었다.

어쨌거나 필래마트와 샬롯마그넷 모두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물량을 확보하려고 조합을 방문했다.

예산도 한정적이거니와 낮은 가격에 거래를 성사시켜야만 자신의 능력을 회사에 알릴 수 있으니, 상대를 의식해 덜컥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기에 숫자만 가지고 벌이는 입씨름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때 대찬이 조합장에게 말했다.

“가격 측면에서 샬롯마그넷에 비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드리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 말씀은, 샬롯마그넷과 계약을 맺어도 필래 측에서는 딱히 할 말은 없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금전적 조건 대신 외부적인 조건을 추가로 약속드리고 싶습니다.”

“외부적인 조건이요?”

“예. 조합장님께서는 한마음영농조합의 조합장이시면서 한마음학교를 운영하고 계시죠?”

그 말에 도진애 조합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마을 분위기가 여느 시골하고는 참 많이 달라서요.”

아이들은 많은데 그들의 부모가 될 만한 사람들이 없다.

그리고 마을의 학교는 인터넷으로 검색이 되지 않는다.

또 결정적으로, 영농조합과 학교의 이름이 같다.

대찬은 도진애 조합장이 아이들이 생활하고 교육받도록 학교를 만들었다는 걸 확신했다.

전남의 벽지임에도 도진애 조합장은 걸쭉한 호남 사투리를 구사하지 않았다.

즉, 그 역시 외지인이란 뜻이다.

“용케도 알아내셨군요. 얼뜨기 봉사자들이 많아서 일부러 외부에는 알리지 않고 있었는데요.”

“주제넘게 비밀을 들춰내려고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조 대리님 허물로 돌리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그 말씀은 왜 하시는 거죠? 비즈니스를 하시는 분이.”

“필래마트는 사회 공헌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는 기업입니다.”

도진애 조합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런데요?”

“저희 쪽과 거래를 터 주시면 저희 측 사회 공헌 사업의 지원 시설로 채택하겠습니다. 조합장님도 상당히 만족하실 수 있는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하네요.”

“또한 원하신다면 필래그룹 산하의 사회적 기업인 웜샤인, 그리고 웜샤인의 핵심 중추인 고원대학교 창업 동아리 에피니키온이 한마음학교의 정기 교류 파트너가 되어 드릴 수 있습니다.”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샬롯마그넷의 존재감은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그들에게는 필래마트가 제시하는 가격보다 몇 푼 더 얹어 주겠다는 것 말고는 별도의 무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파 사러 오는데 돈 말고 다른 게 필요할 리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갑자기 주저리주저리 사회 공헌이니 정기 교류니 떠들어 대는 대찬이 이상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못마땅한 눈빛만 보낼 뿐 침묵했다.

도진애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재밌네요. 필래마트 자체적인 지원 사업에 저희를 포함시키는 거야 그렇다 치고, 웜샤인과 고원대 동아리까지 움직인다는 게요.”

“무슨 뜻이신지……?”

“고작 대리잖아요. 일개 대리가 어떻게 회사 외적인 부분까지 컨트롤할 수 있는지 선뜻 믿어지지가 않는걸요.”

“제 입으로 공치사하기 민망합니다만, 대학 시절 에피니키온 소속으로 웜샤인을 제 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요? 웜샤인이 맨 처음 출범했을 때 제법 신선하다 싶었어요. 꽉 막힌 재벌가 늙은이가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 역시 젊은 오빠 손에서 만들어진 거였군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모쪼록 좋게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합장님께 결코 나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진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양파는 팔아야 해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니까…….”

“그럼…….”

도진애는 오래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는 대찬을 바라봤다.

“필래마트 측에 전량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희비가 엇갈렸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꽤 훌륭한 부산물을 많이 얻었으니까요.”

도진애는 대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찬은 얼른 악수에 응했다.

샬롯마그넷 직원들은 잔뜩 얼굴을 구긴 채로 자리를 떴다.

그들로서는 복장이 뒤집힐 일이었다.

천하의 샬롯마그넷이 이제 막 기지개를 켠 필래마트에 당해 버렸으니 속이 쓰릴 만도 했다.

대찬은 즉석에서 계약서를 작성했다.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은 상당히 좋은 가격에 양파를 공급할 것이다.

필래마트 지원 사업과 웜샤인의 정기 교류 약속은 한마음조합에 상당한 이득이 되는 동시에 부담이었다.

대찬은 은근히 지원 사업과 정기 교류가 3년마다 갱신된다는 점을 도진애 조합장에게 알렸다.

그 말뜻을 도진애 조합장이 모를 리 없었다.

가격을 너무 섭섭하게 책정한다면, 이쪽에서도 섭섭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이에 필래마트는 양파 품귀 현상에도 불구, 저렴한 가격에 양파를 매장에 진열하게 되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홍은주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홍은주 씨, 고생 많았어요.”

“대리님이 다 하셨는데요, 뭐.”

“그런 섭섭한 말 말아요. 홍은주 씨 없었으면 이 건 힘들었어요.”

“네? 저는 한 게 없는데…….”

“미안한데 홍은주 씨 화장품을 좀 가져가야겠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홍은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곧장 한마음학교의 일일 화장법 강사로 초빙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한창 홍은주의 화장법 강연이 진행되는 사이, 도진애가 대찬의 옆에 섰다.

“지원 사업에만 눈이 멀어서 필래랑 거래 튼 게 아니에요.”

“네?”

“고민 없이 결정한 건 대리님 공도 큽니다.”

“제 공이라뇨?”

대찬은 웃으면서 물었다.

“어제 걸게 벌인 화투판 다음으로 더 걸게 벌인 술판 덕택이에요.”

“할머니들하고요?”

“네. 어젯밤에 싹싹한 서울 총각이 너무 좋다고, 그쪽이랑 계약하자고 하더군요.”

“그러셨군요.”

“제가 조합장이긴 하지만 할머님들도 다 조합원들이에요. 조합원들이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쪽을 선택하는 건 조합장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꼬마 조합원들도 한몫 거들지 않던가요?”

아침 댓바람부터 땀 빼 가며 축구를 같이 했던 아이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자 도진애가 장난스럽게 대찬을 째려봤다.

“이제 보니 처음부터 잔뜩 계산적인 생각을 갖고 노린 일이군요?”

대찬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노렸죠.”

도진애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대찬은 시골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많은 수의 학생들, 그리고 인터넷 검색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교를 보고 이곳이 보통의 영농조합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리고 발 빠르게 움직여 그들의 구미가 당기게 할 조치를 취했다.

물론 화투로 잃은 3만 원의 위력도 적지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자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대찬과 홍은주는 푸짐한 잔칫상의 상석으로 모셔졌다.

도진애 조합장은 물론 마을 노인들과 한마음학교 학생들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업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대찬과 홍은주는 마음 편히 잔칫상을 받았다.

도진애는 친히 대찬에게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대찬은 공손히 잔을 받고 막걸리 병을 넘겨받았다.

도진애는 잔을 받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오늘은 일 생각은 하지 마시고 푹 쉬다 올라가요.”

“고맙습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 나도, 나도 막걸리 먹을래요!”

축구공을 들었던 남학생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학생들은 모두 도진애를 엄마라고 불렀다.

그러자 도진애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히 거부했다.

“씁, 안 된다고 했지!”

“나도 먹고 싶은데…….”

한 할머니가 도진애에게 말했다.

“조합장! 막걸리는 술도 아니여. 좋은 날 한 잔씩들 허는 게 머시 나쁘다고 엄히 군당가.”

“그런 말씀 마세요. 술은 곱게 배워야죠.”

“어른헌티 배우는 게 곱게 배우는 거랑게. 이러다 나중 가서 지들끼리 몰래 처마시고 술버릇 버린당게로…….”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도진애의 태도는 단호했다.

대찬은 막걸리 대신 학생들에게 콜라를 따라 주었다.

“이게 더 맛있어.”

콜라를 받은 학생은 여전히 어른들의 문화가 부러웠는지 콜라가 든 컵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건배!”

그러자 어른들은 일제히 웃으면서 그 정도 장단은 맞춰 주었다.

“건배!”

하얗고 까만 잔들이 경쾌하게 부딪쳤다.

대찬 역시 사발에 가득 찬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렇게 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대찬은 시골 바람을 쐬려고 논두렁으로 나갔다.

가로등도 드문 시골이라 별이 잘 보였다.

그렇게 목이 시큰해지는 줄도 모르고 별을 헤는 대찬에게 도진애가 다가왔다.

“별이 참 예쁘죠?”

“네, 그렇네요. 서울에서는 하늘이 희뿌얘서 보기 힘든데.”

“서울에서 보기 힘든 건 하늘이 뿌얘서가 아니에요.”

“네?”

도진애는 웃으면서 말했다.

“서울 불빛이 너무 밝아서 그래요. 네온사인, 가로등, 밝은 건물의 창문, 자동차 헤드라이트.”

“아, 그런가요.”

“밝은 밤은 바쁜 삶이에요. 퇴근 후에 어떻게든 한잔하느라 네온사인이 켜지고, 밤에도 분주히 사람들이 오가니까 가로등이 켜 있고, 야근하느라 건물 창문이 밝고, 그렇게 수고한 다음 집에 들어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또 밝고.”

대찬은 얕은 숨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조합장님 말씀이 맞네요. 저마다 자기 삶 챙기느라 밝네요, 서울은.”

“그러니까 별을 못 보는 거예요. 주변을 못 보는 거예요. 시골이 서울보다 나은 점이 몇 없긴 하지만, 제일 좋은 건 별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주변을 볼 수 있어요.”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거야말로 다른 단점들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멋진 장점이네요.”

“그렇죠? 대찬 씨도 종종 내려와요. 별도 보고, 시원한 공기도 마시고.”

“회사가 저를 그러도록 놔두진 않지만, 여유가 생기면 꼭 그러겠습니다. 정말 좋네요, 공기도 별도.”

한동안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던 도진애가 말했다.

“제가 여기로 내려온 건 5년 전이에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찬은 흘끗 그녀를 바라봤다.

도진애는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대안학교를 세우겠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태국에 간 적이 있었어요. 칸차나부리라는 지방에 무반텍이라는 학교가 있거든요. 우리말로 하면 어린이 마을쯤 될까.”

“그런데요?”

“대안학교도 학교일 뿐이에요. 아이들 먹고사는 문제까지 신경 쓰지 않죠. 그런데 무반텍에서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먹여 주고, 재워 주고, 공부까지 시켜요.”

“한마음학교는 무반텍을 벤치마킹 하신 거군요.”

도진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시세끼 못 챙기는 아이들, 잘 곳 걱정하는 아이들이 많거든요. 태국보다는 먹고살만 하다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거든요.”

“그렇겠죠, 아무래도.”

“그런 아이들이 먹고 자는 걱정 안 하고, 남의 눈치 안 보고 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할머니 몇 분만 남은 이 마을에 한마음학교를 지었어요.”

“학교에 영농조합까지 만드신 건…….”

“기부나 봉사 같은, 남들의 호의나 배려에만 기대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가 땀 흘려서 우리 손으로 먹고살도록, 그래서 당당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돕는다고는 하지만 저랑 연로한 할머님들 손만으로는 아무래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차에 감사한 제안을 해 주셨습니다.”

대찬은 민망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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