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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26화 (125/556)

난 할 수 있어 126화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홍은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요. 지도 앱에는 그냥 공터로 돼 있는데.”

“그래요? 산골 분교 하나까지 빠지지 않고 다 나와 있는데 여기는 공터로 표시된다?”

“그러게요. 학교가 아닌가?”

학교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외관이 너무 학교 같았다.

대찬은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어, 산호 씨, 나야.”

“어! 형님! 아… 조 대리님, 무슨 일이세요?”

김산호는 반가운 목소리를 내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얼른 차분하게 톤을 낮췄다.

“사회공헌팀에서 지원할 시설 명단 아직 다 못 채웠다고 했지? 그거 아직도 유효할까?”

“바로 알려 드릴게요.”

김산호는 전화를 끊고 정확히 1분 후에 대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5곳 더 채워야 한다고, 추천할 시설 있으면 말씀하시라는데요?”

“좋아. 한 자리는 꼭 남겨두라고 전해 줘. 그리고 사회공헌팀에서 지원하는 사항들 PT로 정리된 거 있으면 내 이메일로 쏴 주고.”

“양파 사러 가신 분이 갑자기 왜 그런 건 챙기신데요?”

“까라면 까세요.”

뚝, 끊긴 전화를 보고 김산호는 투덜거렸다.

“이럴 때 보면 김산하랑 판박이라니까.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김산호는 제멋대로 툴툴거리며 곧장 대찬에게 준비된 자료들을 넘겨주었다.

대찬은 다른 쪽에도 전화를 걸었다.

갑자기 여기저기로 바쁘게 전화를 하는 대찬을 보고 홍은주는 어리둥절했다.

“앗, 서, 선배님!”

“잘 지냈어?”

“네, 물론이죠! 선배님은 잘 지내십니까?”

“나야 뭐 그럭저럭.”

대찬이 전화를 건 곳은 에피니키온의 신사업국이었다.

까마득한 선배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찬은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 에피니키온이 주력 사업으로 밀고나가는 것들은 모두 대찬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단순히 선배들의 지원을 받아 떵떵거리던 게 아니라, 창업 동아리라는 간판에 걸맞게 주체적으로 사업을 꾸려나가는 풍토 역시 대찬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후배들이 싹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주셨어요?”

“아직 웜샤인하고 협업 잘되고 있지?”

“그럼요! 워낙 선배님께서 기초공사를 잘 해놓으신 덕분에요.”

“정기 교류 하는 시설 여유 좀 있니?”

“한두 곳은 더 추가할 수 있어요.”

좋았어, 대찬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럼 내가 오늘 중으로 한 곳 추천해 줘도 괜찮을까?”

“그럼요! 선배님 지시는 뭐든 따르겠습니다.”

“지시라고 하긴 좀 그렇고… 부탁이라고 해 두자.”

“지시든 부탁이든 말씀만 하십쇼.”

후배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대찬의 입가도 절로 올라갔다.

“고맙다. 나중에 애들 모아서 술 한번 살게.”

“별말씀을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대찬은 홍은주에게 말했다.

“홍은주 씨는 영농조합 사무실로 먼저 가 봐요. 가서 샬롯마그넷 사람들 아직 있나 정황 주시하고 나한테 연락 주면 됩니다.”

“예? 저 혼자요?”

“나도 곧 따라갈게요.”

홍은주는 까닭을 더 묻지 않고 대찬의 말을 따랐다.

그녀를 먼저 사무실로 보낸 대찬은 운동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스탠드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학생들이 들어왔다.

아침에 봤던 학생들에 더해 몇몇이 더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스탠드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양복 차림의 대찬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개중 야무진 인상의 키 큰 여학생이 물었다.

“아저씨 누구예요?”

“어, 안녕. 그냥 이 주변 둘러보러 왔다가 잠깐 쉬고 있는데?”

“이 주변을 왜 둘러보러 오셨는데요?”

물어 오는 말투가 불친절했다.

그럼에도 대찬은 부드럽게 대꾸했다.

“풍경이 좋아서.”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도 양파 때문에 온 거죠?”

“그럼 나 말고 누가 또 양파 사러 왔니?”

“샬롯마그넷 직원들이 왔다고 들었어요. 아저씨도 시커먼 속내 가지고 온 거잖아요.”

여학생은 초면임에도 따갑게 쐈다.

남들 같으면 벌써 얼굴이 붉어지고 목소리가 커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찬의 얼굴은 천하태평이었다.

“양파 사러 온 게 왜 시커먼 속내인지 모르겠네.”

“그 아저씨들 와서는 여기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뒷돈 준다고 막 그랬거든요? 그게 그럼 시커먼 속내가 아니면 뭐예요?”

샬롯의 영업 방식이 참 더럽다 싶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는 뒷돈 줄 돈도 없다, 야. 그런 바보 천치들하고 나를 똑같이 보면 좀 섭섭하지.”

“말은 다 그렇게 하겠죠.”

대찬은 그 학생과 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무리 중에 축구공을 신줏단지처럼 껴안은 학생을 발견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였다.

“너 축구 좀 하니?”

“네! 아저씨보다 잘할걸요!”

“과연 그럴까? 아저씨도 축구 엄청 잘해!”

“에이, 뻥 치지 마요!”

“진짜라니까!”

대찬은 애처럼 응수하고서는 학생의 품 안에 있던 축구공을 뺏었다.

그러고는 축구공을 높이 들며 외쳤다.

“아저씨랑 축구할 사람!”

“나 할래, 나!”

“저요!”

대찬은 축구공을 바닥에 툭 내려놓고 뻥, 멀리 차 버렸다.

그러자 학생들이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대찬도 이에 뒤질세라 열심히 달렸다.

운동에 적합하지 않은 양복바지가 꽉 꼈다.

대찬에게 시비를 걸었던 여학생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남학생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축구를 했다.

내심 자신 있던 대찬은 그들의 꽁무니를 쫓기에 바빴다.

대찬이 팔자에도 없는 축구공을 차는 동안, 홍은주는 홀로 영농조합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은 간판만 사무실이지, 가정집이나 다름없었다.

들어가니 맞이하는 직원도 없었다.

그때 열린 문틈으로 소리가 들렸다.

“값은 정말 좋게 쳐 드리겠습니다.”

“요즘 값 나쁜 양파가 어디 있어요?”

“하하, 그렇긴 합니다만…….”

홍은주는 그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조합장과 샬롯마그넷 직원들인 듯했다.

협상이 그리 잘 풀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홍은주는 다시 밖으로 나와 곧장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헉… 헉헉… 어, 홍은주 씨… 허억, 어때요, 거기?”

“샬롯마그넷 쪽 사람들이 조합장 만나고 있어요. 대리님도 와 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그, 그래요……. 헉…….”

대찬은 거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홍은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리님, 숨소리가 왜 그래요?”

“아, 뭘 좀 헉… 하고 있어서…….”

대찬의 숨소리는 홍은주로 하여금 이상한 상상을 하도록 유도했다.

“뭘 하시는데요? 설마 저 먼저 보낸 게 그런 이상한 거 하시려고 그러신 거예요?”

“그런 이상한 거라뇨? 축구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꽁무니를 쫓던 대찬은 스탠드에 앉아서 말했다.

“추, 축구요?”

“그래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겁니까, 홍은주 씨.”

홍은주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어쨌든 빨리 조합 사무실로 오세요. 이러다 샬롯한테 물량 뺏길 수도 있어요.”

홍은주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고는 뚝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당황하기는.”

“아, 뭐예요, 아저씨! 왜 하다 말아요!”

“아저씨는 힘들어서 더 못하겠다.”

“뭐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치사해!”

학생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말로 대찬에게 항의했다.

대찬이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아저씨가 여기 떠나기 전에 축구공 새 거 사 주고 갈게. 그럼 봐줄 거지?”

“정말요?”

“약속은 꼭 지킨다니까.”

그러자 축구를 즐기지 않는 여학생들이 항의했다.

“아저씨! 우리는요!”

“음… 너희는 아저씨랑 같이 온 예쁜 언니가 화장하는 법 알려 줄 거야. 화장품도 선물해 줄걸?”

한창 꾸미고 가꾸는 데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그럼에도 변변찮은 솜씨와 얇은 주머니 때문에 마음껏 꾸미지 못하기 마련이다.

대찬의 제안은 그들에게 솔깃했다.

대찬에게 눈빛을 따갑게 쐈던 학생도 흥미가 동하는 눈치였다.

대찬은 스탠드에 놓았던 서류 가방을 들고 외투 상의를 어깨에 걸치며 자가용으로 걸어갔다.

“양파 사고 다시 올게.”

그렇게 말하고 터벅터벅 걸어가던 대찬은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벌써 멀찍이 떨어진 학생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야! 근데 하나만 묻자!”

그 말에 학생들이 뒤를 돌아봤다.

“뭔데요?”

“너희 학교 이름이 뭐니?”

“한마음학교요!”

한 학생이 큰 소리로 대답하자 대찬의 입가가 올라갔다.

“고맙다!”

그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들을 등졌다.

조합 사무실에 도착하니 홍은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찬은 홍은주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말했다.

“홍은주 씨, 화장품 좋은 거 써요?”

“…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대찬은 멋쩍게 웃고는 사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홍은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홍은주가 말한 대로 샬롯마그넷 직원들이 여태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굳이 1박을 할 필요도 없었을 터.

거래가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샬롯마그넷 정도 되는 대형 마트와 거래를 트는 건 조합 쪽에서도 반가운 일이어야만 했다.

게다가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형 마트와 직거래를 하면 아무래도 값도 좋게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얘기가 지지부진하다니, 이상했다.

대찬은 샬롯마그넷이 고전하는 만큼 자신도 애를 먹지 않을까 긴장했다.

“실례합니다.”

대찬은 샬롯마그넷의 자리에 끼어들었다.

또 다른 양복 차림의 외지인이 방문하자 샬롯 직원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대찬과 홍은주를 바라봤다.

한 중년 여인이 샬롯 측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시죠?”

“안녕하십니까. 한마음양파영농조합 조합장님이십니까?”

“그런데요?”

조합장의 외모는 40대 후반쯤 돼 보였다.

그럼에도 자기 관리에 투철한 편인 듯 몸에는 군살이 없었다.

대찬은 명함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필래마트 상품기획부 조대찬 대리라고 합니다.”

“아… 필래마트요?”

대찬이 신분을 밝히자 일순 분위기가 싸해졌다.

특히 샬롯 직원들의 표정이 볼만했다.

조합장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그는 대찬을 향해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조합장 도진애입니다.”

“예, 반갑습니다.”

“필래마트에서 여기까지 오신 걸로 봐서는 여기 샬롯마그넷 분들과 같은 용건이시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양파 물량을 확보하러 왔습니다.”

대찬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자 샬롯 쪽에서 반발했다.

“이봐요, 필래는 상도덕도 없습니까?”

“예?”

“우리가 먼저 와서 조합 측과 가격을 조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난입해서 일을 망치고 있잖습니까?”

대찬은 슬며시 웃었다.

“그렇게 치면 샬롯 역시 상도덕이 투철하다고는 못하겠는데요.”

“뭐요?”

“양파 물량이 부족해서 어쨌거나 조합 측에 읍소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조합 측에서는 샬롯과 필래마트를 동시에 상대하는 쪽이 더 유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찬은 도진애 조합장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러자 도진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샬롯마그넷에서는 단지 먼저 왔다는 구실만으로 협상을 독점하려고 하고 있으니, 사업 파트너인 한마음조합에 대한 상도덕이 결여돼 있는 것이죠.”

샬롯 측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거래가 진행 중이니 그쪽은 일단 빠지는 게 맞지.”

“그건 샬롯이 아니라 조합 측에서 판단할 문제인 거 같은데요?”

대찬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도진애는 일단 대찬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필래 대리님의 말씀이 제 귀에는 더 솔깃하군요.”

“조합장님!”

“이게 싫으시면 저희와 굳이 거래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합은 대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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