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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25화 (124/556)

난 할 수 있어 125화

맛깔 나는 전라도 밥상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길바닥에 기름만 뿌리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판이었다.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있는데, 겸상한 늙은 농부가 귀띔을 해 주었다.

“여 무안 바닥은 돌아 봤자 헛수고일 테고, 쩌그 함평에 가믄 특이한 조합이 한 군데 있어라.”

“함평이요? 특이한 조합이라뇨?”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다.

시종 동태 눈깔이던 대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거그도 양파 농사를 제법 크게 허는디 조합장이 여자여. 그것도 서울서 온 여자여.”

“서울에서요.”

늙은 농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덜 같은 촌사람보담은 같은 서울 사람끼리 말이 좀 안 통하겠어라? 거기 가서 통사정 해 보믄 양파 쪼까 내줄지도 모르제.”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는 무슨.”

소식을 들은 대찬은 당장에라도 함평으로 차를 몰고 싶었다.

그의 들썩거리는 엉덩이를 본 농부가 따끔하게 당부했다.

“갈 때 가더라도 밥그릇은 다 비우고 가야제. 안 그럼 못 보내.”

“암요, 이 맛있는 걸 남기고 제가 어떻게 갑니까.”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허겁지겁 밥을 먹어 치웠다.

홍은주는 그런 대찬을 보고 픽 웃고는 그와 보조를 맞춰 먹었다.

“함평이라…….”

대찬은 농부가 일러준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이라.”

대찬은 홍은주를 보며 웃었다.

“영농조합치고는 좀 간지러운 이름이네요?”

“왜요, 예쁘기만 하구만.”

홍은주는 대찬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찬은 싱겁게 웃으며 한마음양파영농조합으로 핸들을 꺾었다.

한마음조합은 시골 함평에서도 외진 곳에 있었다.

꼭두새벽에 출발했는데도 서울에서 무안까지, 또 무안에서 숱한 영농조합들을 만나 허탕을 치고 함평의 벽지까지 오게 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홍은주가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찾아뵙는 건 예의에 어긋나겠죠?”

“그렇겠네요. 시간도 늦었고, 사전에 약속을 잡아 놓은 것도 아니니까.”

“근방의 숙소에서 자고 내일 아침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찬은 홍은주의 말에 동감했다.

그런데 숙소 찾기도 쉽지 않았다. 모텔은커녕 여관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경로당을 겸한 마을회관에는 저녁을 먹고 모여 수다를 떠는 노인들이 많았다.

외지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그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찬은 그들에게 꾸벅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실례합니다.”

“누구요?”

“서울에서 왔습니다.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서 마을회관에서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해서요. 돈은 지불하겠습니다.”

대찬의 말에 노인들은 피식피식 웃었다.

“을매나 대단한 여인숙이라고 돈까정 낸다요. 남는 방 있응게 거서 이불 펴고 자소.”

“근디 밤중에 색시랑 의뭉헌 짓은 허지 말어. 방음이 안 돼서 노인네 어둔 귀에도 잘 들링게.”

한 할머니의 짓궂은 말에 노인들은 와르르 웃었다.

대찬의 뺨이 달아올랐다.

정작 홍은주는 덤덤한 얼굴이었다.

대찬이 급히 부정했다.

“그냥 직장 선후배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입사일은 제가 빠른데, 그럼 제가 선밴가요?”

홍은주는 와중에 농담까지 쳤다.

대찬의 해명에도 어른들은 믿지 않았다.

“시골 깡촌꺼정 같이 온 걸 봉게로 예사 사이가 아니구먼.”

“둘이 잘 어울링게 이참에 서방 색시 하소.”

“어르신!”

대찬은 진땀을 뺐다.

홍은주는 웃으면서 대찬을 올려다봤다.

“뭘 그렇게 당황해요, 저한테 흑심 있으신 것처럼.”

“흐, 흑심이라니. 홍은주 씨,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마세요.”

“또 그렇게 매몰차실 건 없잖아요?”

홍은주는 찌릿, 가볍게 눈총을 쐈다.

노인들과 홍은주의 등쌀에 대찬은 난감할 뿐이었다.

대찬은 노인들이 빙 둘러앉은 한가운데 펼쳐진 화투판을 봤다.

진녹색 담요에 빨간 화투패가 자극적이었다.

그리고 노인들의 옆에는 각자의 몫이 분명한 동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고스톱 치고 계셨나 봐요.”

“시골서 패라도 안 쥐믄 먼 재미로 산당가.”

“그럼 저도 잠깐 껴도 될까요?”

“서울서 돈도 많이 벌 양반이 쩜 오십에 재미 붙일 수 있을랑가 모르겄네.”

“쩜 오십이라니, 어르신들 배포 한번 크십니다. 이거 다리 후들거려서 치겠습니까, 어디.”

대찬은 그러면서 용케 빈자리를 비비고 들어가 앉았다.

기어코 화투판에 끼어드는 대찬을 보고 홍은주는 놀랐다.

“안 주무세요?”

“오랜만에 화투, 재밌잖아요.”

새벽부터 운전대를 잡느라 피곤이 쏟아질 터였다.

웬만한 도박광이 아닌 이상 잠 대신 화투를 택할 리 만무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홍은주에게 말했다.

“홍은주 씨는 먼저 들어가 주무세요. 저는 좀 놀다 잘게요.”

“예, 그러세요…….”

홍은주는 여전히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착착 능숙하게 패를 섞었다.

“첫 판은 제가 광 팔게요.”

홍은주가 자리를 깔고 누운 건넌방까지 대찬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홍은주도 피곤하긴 매한가지였지만 어쩐지 건넌방의 목소리에 귀가 쫑긋 섰다.

조 대리님이 왜 저러실까, 잠도 안 자고.

대찬은 노인들의 화투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적당히 돈도 잃어 주었다.

“또 광박 썼네요, 이거 참.”

“배울 만큼 배운 양반이 어째 못 배운 할마씨들을 못 이긴다요.”

“대학에서 고도리 내는 법 가르쳐 준답니까. 어르신들 손끝이 너무 야무져서 이길 도리가 없네요.”

“밤마다 화투패 만졌응게 관록이란 게 생겨부러.”

“그것도 그런데 워낙 손끝들이 야무지시니까. 어째 그 야무진 손끝으로 양파 농사 재미들 좀 보셨어요? 날씨가 많이 궂었는데.”

대찬은 자연스럽게 양파 얘기로 넘어갔다.

그제야 홍은주는 대찬이 피곤한 몸을 굳이 화투판으로 이끈 까닭을 알게 되었다.

업무의 연장이었다.

이 근방 사람들은 한마음양파영농조합과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을 게 분명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들 무리에 섞이면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고,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홍은주는 자리를 깔고 눕고 나서야 대찬이 허투루 판에 끼어든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찬의 질문을 받은 할머니들이 대답했다.

“여기라고 뭐 다르겠어. 흉작이지.”

“무안 쪽은 초비상이라고 하더라고요.”

“거긴 숫제 쑥대밭이고, 여긴 무안보담은 사정이 나아.”

“그렇군요. 그래도 어르신들이 잘 돌보신 덕에 아주 나쁘진 않은 모양이네요. 다행입니다.”

대찬은 그러면서 패를 돌렸다.

그는 순식간에 3만 원을 잃었다.

점당 50원으로 쳤으니 혹독하게 당한 것이었다.

대찬은 노인들에게 투정을 부렸다.

“속상해서 막걸리 한잔 먹고 자게 3천 원만 개평으로 줘요.”

“승부의 세계는 냉호건 것인디.”

“암만 냉혹해도 함평 인심이 막걸리 한잔 못 먹게 합니까.”

노인들은 손자의 재롱을 보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그라믄 개평 대신 울 집 막걸리나 좀 대접해야 쓰겄구마.”

“거 점순네 집에 막걸리허고 묵은 감자 좀 안 있는가. 감자전 부쳐 먹으면 막걸리 안주로는 그만이제.”

개평 3천 원이 감자전과 막걸리로 뻥튀기 되었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노인들은 군말 없이 막걸리와 감자를 가져와서는 즉석에서 감자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감자전까지……. 어르신들, 너무 밑지는 장사 아니에요?”

“이녁은 귄 있응게 우리가 쪼까 손해 봐도 괜자녀.”

“귄 있다니, 무슨 뜻이에요?”

“귀염성이 있다고, 귀염성이.”

“제가 어르신들한테 인기 좀 있는 편이긴 하죠.”

대찬은 웃으면서 막걸리를 따랐다.

금세 함평 노인들의 수양 손주가 된 대찬의 모습에 홍은주는 놀라면서도 기가 찰 따름이었다.

회사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걸림돌을 빼 버리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 여기서는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주며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돌아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문틈 사이로 고소한 감자전 냄새가 스몄다.

‘미치겠네.’

냄새를 맡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무안에서 허겁지겁 점심 한 끼를 얻어먹은 것 빼고는 공복이었다.

홍은주도 슬그머니 일어나 냄새의 근원을 향해 조심스레 접근했다.

대찬이 홍은주를 보고 씩 웃었다.

“배고프죠? 와서 들어요.”

“아, 네. 그럼…….”

홍은주는 겸연쩍게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렇게 막걸리와 감자전을 나누는데, 한 할머니가 대찬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그 함평꺼정 머덜라고 왔어?”

“아, 그게…….”

“양파 사러 온 겨?”

할머니는 대찬보다 빨리 정답을 말했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어저께도 서울서 사람이 내려왔거든. 양파 사겄다고.”

할머니의 말을 들은 대찬의 표정이 일순 심각하게 굳었다.

“네? 저희 말고도 온 사람이 또 있어요?”

좋지 않은 징후였다.

경쟁자가 한발 앞서 이곳에 왔다.

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거, 어디라고 혔더라.”

한 할머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자, 그 옆의 할머니가 대신 말했다.

“살려 먹으네? 고 비슷허게 말혔던 거 같은디.”

“혹시 샬롯마그넷 아니었습니까?”

“이이, 맞어, 맞어! 살려마그.”

대찬의 낯빛이 흐려졌다.

홍은주도 쥐었던 젓가락을 내려놨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일개 도매상이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필래마트의 경쟁력을 등에 업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샬롯마그넷은 업계 2위의 대형 체인이었다.

지갑 두께로 필래마트가 우위를 장담할 수 없었다.

난감했다.

“그래서 샬롯마그넷하고 조합 쪽하고는 얘기가 잘된 것 같습니까?”

“그건 나도 모르제. 조합장이 어련히 잘헝게 우린 신경 쓰덜 않어.”

“그렇군요…….”

속이 답답해진 대찬은 막걸리를 쭉 들이켰다.

다음 날, 대찬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속이 불편했다.

막걸리 때문인지 샬롯마그넷 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홍은주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화장실로 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러곤 주름지지 않게 잘 걸어 놓은 양복을 입고 마을회관 밖으로 나갔다.

시골의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흠뻑 들어왔다.

저녁에 도착하는 바람에 보지 못했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밭이 펼쳐졌다.

“저게 다 양파란 말이지…….”

대찬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여차하면 그림의 떡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재잘재잘 말소리가 들렸다.

척 봐도 10대 청소년들로 이뤄진 무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노인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궁벽한 시골과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어느새 잠이 깬 홍은주는 눈을 비비며 나왔다.

홍은주 역시 그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골에 애들이 저렇게 많네요.”

대찬은 그들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관내에 학교가 있나? 제일 큰 녀석은 고등학생이고, 어린 녀석은 초등학교 저학년인 거 같은데.”

“근방에 초등학교가 있는데 중, 고등학교는 여기서 너무 먼걸요. 대중교통도 마땅치 않고.”

야무진 홍은주는 빠른 검색으로 대찬이 원하는 정보를 주었다.

대찬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홍은주 씨, 이 주변 돌아다니면서 3, 40대 본 적 있어요?”

“3, 40대요?”

“네, 저 친구들 부모가 될 만한 사람들.”

“아뇨, 그런 분들은 못 봤어요. 동네를 뒤지면 몇 분이야 계시겠지만요.”

대찬은 홍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잠깐 드라이브 좀 하시죠.”

“네?”

대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홍은주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는 말한 대로 일대 한 바퀴를 드라이브했다.

대찬은 운전을 하면서 전후좌우를 살폈다.

그는 동네 풍경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그러는 영문을 홍은주는 몰랐지만, 일단 상사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천천히 달리던 대찬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 차를 멈췄다.

그는 왼쪽 차창을 통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홍은주도 자연히 그쪽을 바라봤다.

“어? 학교네요?”

“학교 같죠?”

대찬과 홍은주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에는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올라가 있었다.

작게나마 운동장도 있어서 대찬과 홍은주는 그곳이 학교라는 걸 쉽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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