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4화
그 장면을 마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던 도진석 상무가 목격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상품기획부 최 부장 있잖습니까.”
“또 그 인간이 말썽이야?”
최 부장의 얘기가 나오자 도진석 상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잖습니까.”
“뭐라고 또 지랄을 하는데?”
도진석 상무의 말은 전례 없이 다듬어지지 않고 거칠었다.
“매출은 뚝뚝 떨어지는데 이번에는 이름이 뭐더라? 아로니아? 별 거지 같은 걸 또 들여온다지 않습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걸 최 부장도 알 텐데. 지금 양파 품귀 때문에 난리잖아. 양파 물량만 확보해도 전체 매출이 쭉 오를 텐데!”
도진석 상무의 말대로 전국의 대형 마트들이 양파 물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지천에 흔하게 널린 게 양파인데, 기습적인 냉해와 노균병의 창궐로 대뜸 품귀 현상이 예상되었다.
지천에 널린 만큼 웬만한 요리에 쓰이는 양파 가격이 높게 형성되면 100원, 200원에 민감한 주부들은 양파 가격에 주목할 것이다.
주부들은 대형 마트에게 큰손이다.
당연히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양파 물량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만 했다.
김영우 차장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품기획부도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양파 물량 확보에 모든 유통 업체들이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라 애써 외면하고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것 같습니다.”
“양파도 없는 대형 마트에 어느 주부가 발을 들이겠냔 말이야. 양파 물량 확보가 전체 매출 증진의 키포인트라는 걸 왜 몰라!”
“최 부장도 모르진 않겠죠……. 다만, 그건 자기 부서 실적에 들어가지 않는 무형의 결과물이니까, 헛힘 쓰고 싶지 않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놈들 때문에 회사가 이 모양 이 꼴인 거야! 에잇! 홍은주 씨!”
평소 냉정을 유지하는 도진석 상무는 이날따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름을 받은 홍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실장님.”
“커피 좀 타 와요. 얼음 왕창 넣어서!”
“예, 옙! 실장님.”
그때 대찬의 머리에 허운과 유채경이 스쳤다.
발소리 작은 홍은주가 탕비실을 급습하면 민망한 상황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대찬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홍은주를 도로 앉혔다.
“제가 실장님께 커피 갖다 드릴게요. 저도 마침 한 잔 마시려던 참이었거든요.”
“아… 감사합니다.”
‘나 참, 내가 왜 이런 서비스까지 해 줘야 하는지.’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탕비실 앞에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색한 공기가 바로 느껴졌다.
허운과 유채경은 침을 꼴깍 삼키며 어정쩡한 자세로 대찬을 바라봤다.
허운이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어쩐 일이야?”
“탕비실에 어쩐 일은, 커피 타러 왔지. 둘이 너무 아슬아슬한 거 아냐?”
“아슬아슬은, 인마! 우리도 커피 타러 왔어!”
대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입술에 묻은 파운데이션이나 지우고 말해. 차라리 미숫가루 타 먹고 있었다면 믿겠다.”
그의 지적에 허운은 허겁지겁 입술에 침을 바르고 소매로 닦았다.
대찬은 도진석 상무에게 커피를 갖다주고 돌아오는 홍은주에게 물었다.
남에게 안 들리는 작은 목소리였다.
“홍은주 씨,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예, 물어보세요.”
“실장님 오늘따라 엄청 화내시는데… 평소 차분하시던 분이 저러시는 게 의아해서요.”
“아, 상품기획부 최 부장님하고는 월드몰 시절부터 앙숙이었거든요. 두 분이 원래 동기인데, 두 분이서 임원 자리 놓고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화려하게 다퉜어요.”
“아하.”
“원래는 부부 동반으로 유럽 여행까지 다녀오던 사이였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실장님께 집에서 기르는 시츄랑 최 부장님이 물에 빠지면 누구 구하실 거냐고 여쭤보면 아마 시츄 구한다고 하실걸요.”
“그랬군요. 고맙습니다.”
“뭘요. 저 대신 커피 타다 주신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홍은주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대찬은 그제야 왜 도진석 상무가 전략기획실과는 관련 없는 상품 기획 업무를 맡겼는지 감을 잡았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한 몸 불사르겠다던 양반이, 겨우 그런 개인적인 감정으로 업무 영역을 침범하고 그랬단 말이야?’
최 부장에 대한 증오심.
그런 까닭으로 평소 예뻐하던 황경원 대리가 개떡 같은 아이템을 들고 오자 차가운 눈빛을 쐈던 것이다.
그리고 대찬이 제법 그럴듯한 기획을 제안하고 성공을 거두자 평소와는 사뭇 다르게 대찬을 대했다.
도진석 상무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고, 김영우 차장을 불러 뭔가를 지시했다.
김영우 차장은 이를 다른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실장님께서 우리 팀이 양파 물량 확보에 나서야 한다고 지시하셨습니다.”
“저번에 이어서 또 상품기획부 일을 떠맡으란 말씀입니까?”
송희근 과장이 볼멘소리를 하자 김영우 차장이 눈빛을 쐈다.
“실장님 지시가 단순히 남의 부서 일 떠맡기기로 보이십니까?”
“그, 그건 아니지만…….”
송희근 과장은 김영우 차장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로 대담해졌지만, 도진석 상무에게 대들기에는 턱없었다.
도진석 상무를 내세워 송희근 과장의 입을 다물게 한 김영우 차장은 말을 이었다.
“실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부서 내 팀을 나누지 않은 건 회사에 유익한 사업에 언제든지 투입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실장님께서 지시하신 사항을 반드시 이행하도록 합시다.”
“실장님께서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하시진 않으셨나요?”
한태윤 과장의 물음에 김영우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러려고 월급 받는 거 아닙니까?”
“…네.”
“저번과 마찬가지로 주니어들이 수고 좀 해 줘야겠습니다. 뭐 많이도 필요 없겠지. 2명만 수고합시다. 자원할 사람?”
김영우 차장의 말에 주니어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리 업무가 바쁘다지만 양파 찾아 삼만 리보다는 나을 것이다.
단순히 양파만 구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싼값에 구해야 한다.
품귀 현상을 빚는 통에 싼값에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도진석 상무에게 미운털만 박히는 수가 있었다.
대찬 역시 그 일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이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원. 그럼 내가 임의로 지명할게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니어들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이런 쪽에 둔한 대찬의 시선이 가장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김영우 차장의 눈과 대찬의 눈이 마주쳤다.
김영우 차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조 대리가 수고 좀 합시다.”
“…아.”
“싫어요?”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대찬은 삐질 땀을 흘리며 웃었다.
‘시발.’
하기야 김영우 차장에게 선택지가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원웅을 건드리자니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회장님이 무섭고, 허운이나 유채경에게 맡기자니 영 미덥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김산호나 오다혜에게 맡기자니 체급이 더 떨어졌다.
여러모로 대찬이 이 짐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게 대들었던 경력이 있는데 능력은 쓸 만하니, 이 골칫덩이를 떠넘기기에는 적격이었다.
“조 대리한테 나머지 1명 지명할 기회를 드리죠. 2명이 합을 맞춰서 꼭 실장님 지시사항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합시다.”
“예, 차장님.”
이제 대찬의 동료들은 슬금슬금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찬도 누군가의 이름을 덥석 부르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 홍은주가 손을 들었다.
“저라도 괜찮으면 조 대리님과 같이 하겠습니다.”
“아.”
대찬은 환영이었다.
홍은주가 비록 고졸 계약직이긴 하지만 일머리는 다른 사원들보다 오히려 나았다.
대찬은 웃으면서 김영우 차장에게 말했다.
“홍은주 씨와 같이 해도 괜찮겠습니까?”
“계약직 사원보다는 대졸 사원이 더 낫지 않겠어? 조 대리만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김영우 차장은 면전에서 홍은주를 깔아뭉갰다.
대찬은 얕게 한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홍은주 씨 업무 능력은 대졸 사원 그 이상입니다. 문제없습니다.”
“좋아. 그럼 잘해 보라고.”
“네,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홍은주와 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는 홍은주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김영우 차장의 모욕적인 발언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닐까.
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홍은주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아요, 대리님.”
“어, 어?”
“김 차장님이랑 일한 게 벌써 올해로 4년째예요. 김 차장님 화법이야 진즉 익숙해졌다고요.”
“아, 그럼 다행이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거에 신경 쓸 시간 없잖아요? 이 일, 얼른 해치워 버리고 원대 복귀 해야죠.”
홍은주는 씩씩한 구석이 있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량을 어떻게 확보할지 의논을 해 봅시다.”
“우리와 선이 닿아 있는 중간 상인들을 컨택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렇지. 그 양반들이 시세에는 우리보다 더 빠삭한데 낮은 가격에 제공할 리가 없으니까.”
홍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지와 직접 컨택하는 쪽이 나을 겁니다.”
“산지라고 사정이 다를까요? 아마 대부분 선점됐을 텐데…….”
“혹시 아나요? 노다지가 남아 있을지. 일단 산지 쪽으로 내려가 보는 게 어떨까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가닥이 잡힐 거 같은데.”
홍은주의 말에 대찬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은주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일단 가서 상황을 두 눈으로 봐야겠어요.”
“배차 신청 해 놓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죠. 아, 그리고.”
“네?”
“양파 물량 확보 계획 보고서 작성해서 과장님께 올려 주세요.”
“네? 근데 그건 대리님 이름으로 올려야…….”
“저번에 보니까 보고서 쓰는 건 홍은주 씨가 훨씬 낫던데요. 지금 일 떠넘기는 거니까 군말 말고 해 줘요.”
“네? 하지만 이건 실장님께 직접 올라가는 보고서라 대리님이 하시는 편이…….”
대찬의 말에 홍은주는 놀랐다.
지금까지 그녀는 업무에 있어 한 번도 주역인 적이 없었다.
온갖 잡일, 허드렛일이 그녀의 몫이었지, 자기 이름으로 보고서를 올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래요. 홍은주 씨 이름 뒤에 숨으려고. 잘못되면 저 대신 홍은주 씨가 깨져 줘요.”
“하, 하지만…….”
“이번 건은 홍은주 씨가 책임자로 가는 겁니다? 영농조합 목록 뽑고, 미팅 일정 잡고, 숙소 예약하는 건 내가 할게요.”
대찬과 홍은주의 업무가 바뀌었다.
홍은주는 순간 뭉클해져 어깨를 움츠렸다.
“고맙습니다, 대리님.”
“일 떠넘긴다는데 고맙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다음 날 대찬과 홍은주는 바로 출장을 떠났다.
행선지는 전라남도 무안이었다.
전국 최대의 양파 생산지였다.
대찬은 운전석에 앉으며 홍은주에게 말했다.
“운전은 내가 할게요. 보고서 준비하느라 피곤할 텐데 눈 좀 붙이세요.”
“어떻게 그래요. 조 대리님도 조합에 연락 돌리시느라 고생하신 거 저도 다 알아요.”
“그렇다고 홍은주 씨 피곤한데 눈 뜨고 있을 필요 없어요.”
“지금 저 테스트하시는 거죠? 안 넘어가요.”
“홍은주 씨가 그런 농담도 다 할 줄 아네.”
대찬은 피식 웃었다.
“가는 동안 말벗이라도 해 드릴게요.”
“홍은주 씨 입담이 얼마나 좋은지 어디 들어 봅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해요?”
둘은 웃는 얼굴로 옥신각신했다.
팀 내에서 공공연히 표정 없는 여자로 불리던 홍은주였다.
다른 팀원들이 보면 기함할 일이었다.
필래마트의 로고가 또렷이 새겨진 승용차는 무안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대찬과 홍은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루하지 않았다.
무안에 도착한 둘은 끼니도 거른 채 바로 영농조합들과의 만남에 나섰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서울서 오니라 욕봤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농조합 사람들은 대찬과 홍은주를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반가운 응대와 달리 논의에 진전이 없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물량이 태부족이라 그쪽에 내드릴 여유분이 없어요. 진즉 도매상들이 다녀갔제.”
“아아…….”
“맘 같아서는 도와드리고 싶은디 어쩔 수가 없어라.”
“그렇네요. 어쩔 수가 없네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첫 술에 배부르랴, 그렇게 합리화를 하고 다음 영농조합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물건을 직접 취급해 온 도매상들은 얼뜨기 대형 마트보다 한발 빨랐다.
벌써 한바탕 무안군 일대를 쓸고 지나갔다.
난감할 따름이었다.
너덧 군데를 돌았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빈손으로 보내려니까 맘이 안 좋네. 식전이면 밥이나 한술 뜨고 가소.”
마음씨 좋은 농부들은 대찬과 홍은주에게 식사를 대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