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3화
황경원 대리는 엉금엉금 기어 제 자가용 운전석에 올라타려고 했다.
그리고 부릉, 시동을 걸었다.
대찬은 머리에 흐르는 피가 바싹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저 미친 새끼가!”
다급한 상황에 대찬의 입도 거칠어졌다.
정신이 일순 말짱해졌다.
대찬은 전속력으로 뛰어 황경원 대리의 차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운전석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황 대리가 다시 발광했다.
“꺼져! 꺼지라고! 너 왜 자꾸 내 앞길 막고 지랄이야!”
“지금 막는 앞길은 저승길이거든? 이 새끼가, 차라리 길거리에서 자다 뒤지든가, 누구 생사람을 잡으려고 운전대를 잡아!”
“뭐, 뭐? 너 지금 이 새끼라고 했냐!”
“했다, 개새끼야!”
“뭐! 개새끼!”
대찬은 더 이상 입씨름하지 않았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남은 건 무력뿐이었다.
대찬은 매몰차게 황 대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멱살이었으면 버텼을 텐데 머리끄덩이라 버티지 못했다.
황 대리는 그대로 운전석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머리를 붙잡고 몸을 비틀었다.
“야, 너… 아, 아, 아파! 아파, 이 새끼야!”
“이 와중에 아픈 건 아나 보지?”
대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황경원 대리는 속수무책이었다.
대찬은 한 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채를 휘어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멱살을 잡았다.
그런 채로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이, 이 개새끼가 사람 잡는다! 사람 살려요!”
사람들이 곤히 잠든 새벽녘에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니, 대찬은 멱살을 풀고 그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면 납치라도 하는 줄 알 상황이었다.
다행히 대찬의 집도 근방이라 소동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집 안에 들어와서도 황 대리의 발광은 멈추질 않았다.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욕하는 것에도 꼭 지 성격 나오네. 창의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으니까 하는 욕이라곤 그저 개새끼뿐이지.”
“개새끼야!”
“닥쳐!”
“내가 너만, 너만 없었어도 이런 수모는 안 당했는데……!”
그 말에 대찬도 격분했다.
“수모?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양심이 있으면 수모 같은 말 못 지껄이지, 나한테.”
“네까짓 것한테… 네까짓 것한테 내가… 내가 미시건주립대 나왔는데……!”
“아, 미시건주립대씩이나 나오셔서 마다가스카르 고사리 하나 제대로 못 파세요?”
“이 개새끼야!”
“욕도 좀 창의적으로 하라고 했지.”
말이 궁해진 황경원 대리는 우왁! 소리를 지르며 대찬에게 달려들었다.
술이 잔뜩 취해 절제되지 않은 힘이 대찬을 짓눌렀다.
황 대리는 그동안의 울분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그 울분을 모아 대찬의 목을 짓누르려고 했다.
어설프게 당해 주다간 죽을 판이었다.
“진짜… 민폐도 가지가지……!”
대찬은 황 대리의 몸을 확 밀어냈다.
뒤로 벌렁 몸이 무너진 황 대리는 좀비처럼 다시 일어나 대찬의 목을 짓누르려고 했다.
인내심이 바닥난 대찬은 주저 없이 황 대리의 아래턱에 주먹을 꽂았다.
퍽!
그걸 얻어맞고 황 대리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대찬은 그를 옷방에 갖다 버리고 진절머리를 내며 서둘러 잠을 청했다.
이 소동으로 대찬은 수면 시간을 1시간은 족히 뺏기고 말았다.
아침 7시.
출근 준비를 위한 마지노선이었다.
대찬이 모든 준비를 마친 그때도 황경원 대리는 일어나지 못했다.
대찬은 혹여 죽은 건 아닌가 싶어 콧구멍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염병, 숨은 잘만 쉬네.”
대찬은 소리도 지르고 등짝도 갈겨 봤지만 복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를 버리고 대찬 홀로 출근했다.
그의 머리맡에 쪽지 1장만 놔뒀다.
-간밤에 만취하여 음주 운전을 시도하는 등 민폐가 극심해 부득이 우리 집에 재웠습니다. 그랬더니 제 목 졸라 죽이려고 하셔서 부득이 한 방 박아 드렸습니다. 깨워도 안 일어나서 먼저 출근합니다. 일어나면 부끄러운 줄 아시고 출근 서두르세요. -조대찬
출근 시간을 2시간이나 넘겨서도 황 대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는 통에 답답해진 송희근 과장이 대찬에게 물었다.
“조 대리, 황 대리 뭔 일 있어?”
“글쎄요.”
대찬은 더 얽히지 싫어 그렇게만 말하고 관뒀다.
황 대리는 오후 3시가 돼서야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건수를 잡은 송희근 과장이 혀를 차며 꾸짖었다.
“황 대리, 이게 무슨 경우야!”
“…죄송합니다.”
“턱은 뭐야? 왜 그렇게 됐어! 누구랑 싸웠어?”
“…아닙니다.”
황 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대찬을 쏘아봤다.
분노가 가시지 않은 대찬도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지은 죄가 큰 황 대리는 얼른 눈을 깔고 자리에 앉았다.
송희근 과장은 최후의 최후까지 그를 야단쳤다.
“어후, 술 냄새! 황 대리, 변명의 여지가 없지? 이거 근무 평정에 반드시 반영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알겠습니다.”
황경원 대리는 머리를 푹 숙이고 더 말하지 못했다.
2009년 새해가 밝았다.
설날이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가까워졌다.
대보름 언저리가 되자 위마트, 업하우스, 필래마트는 경쟁적으로 각종 나물들을 진열대에 올렸다.
이 사소한 각축전에서 필래마트는 우위를 점했다.
계속 출시되던 할머니 산나물은 금세 동났다.
합리적인 가격의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도 제 몫을 했다.
황 대리는 결국 죽 쒀서 황소개구리 준 꼴이었다.
기실 죽 끓이던 냄비는 대찬의 것이었으니 덜 억울할 일이었다.
일이 있고 나서 황 대리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오장육부가 털린 기분이었다.
이제 대찬을 잡네, 마네 할 계제가 아니었다.
김산호, 오다혜, 홍은주는 처음부터 대찬의 편이었다.
도진석 상무와 김영우 차장도 마냥 황경원 대리의 우군은 아니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황 대리도 백기 투항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옥상에서 대찬과 마주쳤다.
대찬은 덤덤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 지나치려고 했다.
황 대리가 그런 대찬을 불러 세웠다.
“…조 대리.”
“네?”
대찬도 가던 걸음을 멈추고 대꾸했다.
“내가 미안해.”
“뭐가 미안하세요?”
대찬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황 대리는 대찬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냥, 미안해.”
“아, 네.”
“그, 음주 운전 말려 줘서 고마웠고…….”
“인사가 조금 늦긴 하셨지만, 네, 알았습니다.”
“목 졸라서 미안하고…….”
“네. 저도 실례했습니다, 주먹.”
“…….”
대찬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를 떴다.
황 대리는 엉거주춤 선 채로 대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줄담배를 태우고 나서야 사무실로 돌아갔다.
황 대리의 추태와 조 대리의 교활한 일화가 회사 전체에 공공연히 퍼졌다.
입이 가벼운 편인 김산호 덕분이었다.
좋든 싫든 대찬은 집중되는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 원흉이 김산호인 걸 안 대찬은 사석에서 한참을 나무랐다.
굳이 그렇게 들쑤시지 않아도 바람 잘 날 없는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대찬의 사내 위상은 확고해졌다.
누구도 그를 어설프게 넘겨짚지 않았다.
필래마트 역시 업계에서의 입지를 견실하게 다졌다.
대찬의 공로는 벽돌 1장에 지나지 않았다.
김태준 사장은 수완이 있는 사람이었다.
공격적인 마케팅과 과감한 투자로 위마트와 샬롯마그넷을 무섭게 추격했다.
그리고 한국 시장에서 실패하기는 했지만 월드몰은 세계 1위의 대형 할인점 체인이었다.
그들의 축적된 노하우와 탁월한 안목으로 선정한 부지는 가장 합리적이었다.
좋은 입지를 바탕으로 김태준 사장의 수완이 빛을 발했다.
보고를 받은 서청수 회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단 이번 인수는 성공이라고 봐야겠지?”
“그렇습니다, 회장님. 탁월한 판단이셨습니다.”
비서실장은 능숙하게 서청수의 비위를 맞췄다.
“매출이 좀 더 안정세에 들어서면 적극적으로 점포를 늘려 가자고. 아직 위마트와 업하우스에 비하면 우리 점포 숫자가 너무 적어.”
“더 면밀한 상권 분석으로 확실한 수익을 낼 수 있는 곳에 점포를 내겠습니다. 그쪽을 타깃으로 잡고 확장 전략을 펼치면 금방 샬롯마그넷을 따라잡을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라고 보는 눈, 듣는 귀가 없을 리 없지. 한 발짝 앞서 나가야 돼. 우린 한 발짝 뒤처져 있으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
“필래마트는 느낌이 좋아. 각별히 관심도 가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체 신임하는 김태준이 사장으로 가 있고, 아픈 손가락인 서원웅의 직장이었다.
김태준과 서원웅만큼은 아니지만 서청수 회장이 주목하는 대찬의 터전이기도 했다.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린 서청수였지만, 특별한 애착이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대찬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오너의 관심은 기회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심기일전하고 죽어라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미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 말은 티가 잘 난다는 뜻이었다.
성과를 내도 티가 잘 날 것이고, 실패를 해도 티가 잘 날 것이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나가고 싶고, 가족들과 무난한 코미디 영화 한 편 즐기고 싶어도 대찬은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는 난감하게 웃었다.
전략기획실은 회사의 관제탑이었다.
다른 부서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만큼 전략기획실도 하루하루 바쁜 나날이었다.
대찬이 처음 전략기획실로 발령을 받았을 땐 편한 생활을 기대했던 게 은근한 속마음이었다.
큰 덩어리의 계획만 세워 두면 회사가 알아서 굴러갈 줄만 알았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했던 거야.’
불과 얼마 전의 멋모르던 자신을 떠올릴 때마다 대찬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전략기획실은 피라미드를 짓는 이집트 노예의 등에 채찍을 갈기는 속 편한 부서가 아니었다.
각 부서 현업 직원들과 무수히 소통하고, 부디 목표를 달성해 주시라 읍소하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는 부서였다.
그리고 끊임없이 목표를 수정하고 전략을 다듬으며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는 부서였다.
어떻게든 작업에서 열외하려는 노련한 병장을 어떻게든 부려 먹어야만 하던 초임 소대장.
대찬은 그 불쌍한, 속칭 쏘가리의 심정을 뒤늦게 이해했다.
‘그땐 죄송했어요, 소대장님.’
그는 눈물을 머금으며 속죄했다.
그런데 전략기획실 안에도 그런 노련한 병장들이 있었다.
사랑을 싹 틔우는 데 성공한 허운은 유채경을 볼 때마다 눈에서 아카시아 꿀이 뚝뚝 떨어졌다.
움트는 사랑을 참지 못하겠는지 허운은 종종 밀폐된 탕비실로 유채경을 불렀다.
어떤 사랑의 밀어를 속닥거리는지 대찬은 알지도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참 나, 남자가 저 모양이면 여자라도 제정신이어야지.’
그런 허운의 유혹에 유채경은 번번이 아주 쉽게 넘어갔다.
괜히 헛기침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탕비실로 향하는 유채경을 보고 대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전략기획실에서 허운과 유채경은 별종이었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은 벅찬 과업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찬에게만 벅찬 일이 아니었다.
나름 이 분야에서 구를 만큼 구른 김영우 차장도 애를 먹기가 일쑤였다.
지금 김영우 차장은 전화기를 붙들고 전략기획실의 애로사항을 온몸으로 아우성치고 있었다.
“최 부장님, 신선 식품 쪽 매출이 목표한 바를 크게 밑돌고 있습니다.”
“예? 아니, 태클 거는 게 아니고요. 말씀 좀 들어 보세요.”
“부장님, 자꾸 상품기획부가 경쟁 업체에서 취급하지 않는 특용작물 쪽 판로를 넓히고 있는데, 저희 쪽과 수없이 미팅한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분명 기본에 충실하자고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마다가스카르 고사리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상품기획부 매출 머리끄댕이를 잡고 끌어내리겠습니까. 억집니다, 부장님.”
“제가 부장님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아서 뭐합니까? 부장님하고 파워 게임 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저.”
“하, 부장님, 목소리 좀 낮추시고요…….”
김영우 차장은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탕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