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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22화 (121/556)

난 할 수 있어 122화

대찬이 추진한 할머니 산나물은 좋은 반응을 얻어 냈다.

이동수 부사장이 판을 키운 덕분에 할머니 산나물은 새롭게 탄생한 필래마트의 주력 상품 목록에 포함되었다.

할머니 산나물은 대량으로 재배되지 않는 품종들을 선택했다.

곰취, 곤드레, 곤달비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에 지배되지 않을 수 있었다.

굽은 허리로 채취하고 주름진 손으로 골라내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동수 부사장의 제안대로 텔레비전 CF로 제작되었다.

CF는 삭막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격당한 할머니들의 노동력을 정당하게 보상하고, 할머니들의 이름을 내걸어 믿을 수 있는 품질이라는 걸 강조했다.

손가락질 받기 바쁜 대형 마트들 사이에서 필래마트는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위마트, 샬롯마그넷의 양강 구도 사이를 파고들었다.

대찬을 비롯한 오다혜, 홍은주가 이달의 사원으로 선정되었다.

오다혜는 당연히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점잖은 성격의 홍은주가 오다혜보다 더 기뻐했다.

“조 대리님, 정말 감사합니다!”

“돌부처 같은 홍은주 씨가 웬일이야? 이렇게 감정적인 건 처음 보네.”

“저 계약직이잖아요. 이런 확실한 경력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아…….”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찬이 본 홍은주는 김산호, 오다혜 같은 대졸 공채 직원들보다 열정적이고 프로다웠다.

물론 사회가 무작정 온정적으로 돌아갈 수도, 돌아가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홍은주가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돈벌이를 하고 있을 때, 김산호와 오다혜는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며 학구열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리고 홍은주가 습득하지 못한 지식과 경험을 그들은 습득했을 터.

그럼에도 씁쓸한 건 씁쓸한 것이었다.

인생을 열심히 개척해 나가는 홍은주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로 대찬은 위안을 삼았다.

김산호는 명목상 황 대리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이달의 직원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애인이 수상하는 것으로 대리 만족 해야만 했다.

그런 김산호에게 황 대리가 위로를 건넸다.

“산호 씨, 부러워할 거 없어.”

“…네?”

“우리한테는 마다가스카르 고사리가 있잖아.”

황 대리는 어떻게든 마다가스카르 고사리 건을 살려 보려고 애썼다.

대찬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다가스카르 고사리 수입 업체에 들인 공이 아까웠다.

“꼭 좀, 꼭 좀 좋은 가격에 성사시켜 주십시오. 필래마트처럼 큰 체인에 납품하는 게 귀사에도 매우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아, 예, 그렇긴 하죠.”

그런데 수입 업체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황 대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달려들어야 옳았다. 작은 업체였고, 그의 말마따나 필래마트에 납품하는 건 그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가 속사정을 알게 된 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였다.

왜 수입 업체가 저렇듯 미온적인지, 또 대찬이 구태여 왜 자신의 기획을 도왔는지.

* * *

대보름 시즌이 다가오던 때였다.

그런데 업체 측에서 상상 밖의 통보를 해 왔다.

-본 업체는 귀사에 ‘마다가스카르 고사리’를 납품할 의사가 없음.

갑자기 떨어진 날벼락에 황경원 대리는 넋이 나갔다.

그는 바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왜 그럽니까,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예?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요!”

구실이 어이가 없었다.

“황 대리님이 저희 대하는 게 무례해서요. 아무리 갑을 관계라지만, 이렇게 자존심 상해 가면서까지 일 못합니다.”

황 대리가 무례한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정도가 지나치지도 않았다.

아무리 무례함을 타고난 황 대리라지만 중요한 비즈니스 자리에서 지나치게 무례할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구실이었다.

황 대리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졌지만 무소용이었다.

체결된 계약도 없었다.

다만, 술자리에서 운운하던 공허한 말뿐이었다.

그건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보고를 들은 김영우 차장은 눈이 뒤집혔다.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황 대리, 지금 장난해? 실장님이 대보름 시즌에 맞춰서 준비하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 그땐 알았다고 해 놓고, 지금은 뭐? 업체가 납품을 안 해?”

“죄, 죄송합니다. 당연히 될 줄 알고…….”

“당연히 되게 만들었어야지, 될 줄 알고는 뭐야! 이런 한심한 인간을 봤나!”

“…죄송합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농장주가 당신이랑 같은 MBA 출신이라며? 온라인으로 화상 통화도 했다며! 완벽하다며!”

김영우 차장의 목소리가 황 대리의 폐부를 처참하게 찔렀다.

유구무언.

황 대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대찬이 나섰다.

“제가 한번 업체 측하고 얘기를 나눠 볼까요?”

“뭐? 그게 되겠어?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납품을 안 한다잖아.”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대찬의 얼굴에 어쩐지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김영우 차장은 평소 대찬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도진석 상무의 허락을 받은 사업이 갑자기 엎어진다면, 그 화가 자신에게까지 미칠 게 걱정됐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으면 잡아야 했다.

“그래? 그럼 조 대리가 이따 업체 사람들 만나 봐.”

황 대리로서는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네. 일단 미팅 잡고 최대한 빨리 만나 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한 빨리.”

황 대리가 오래 준비한 일이었다. 그러던 게 막판에 이르러 그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1시간 뒤의 일이었다.

대찬은 동네 슈퍼에 담배 사러 나가듯이 휙 나갔다가 휙 들어왔다. 그러고는 김영우 차장에게 보고했다.

“차장님, 잘 해결됐습니다.”

“응? 뭐가, 마다가스카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정 비워 놓을 테니 언제든 조속한 시일 내에 계약하자고 하시던데요.”

“뭐야, 도대체?”

“예?”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그쪽이 바로 돌변하느냔 말이야.”

“무슨 수를 쓴 건 아니고요. 그냥 순리대로 얘기했습니다.”

“허… 용케 잘 해냈군그래.”

“아닙니다. 황 대리가 잘 진행해 오던 건이어서 잘된 거죠.”

기실 이건 황 대리의 면전에 침을 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 대리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꼬이던 일이 풀린 건 대찬이 마법을 부린 까닭이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를 수입하는 업체는 대찬의 인맥 반경 안에 있었다.

수입 업체의 사장은 대찬이 대학 시절 인연을 맺었던 수영실업 오광훈 사장의 고교 동창이었다.

대찬은 처음부터 이를 염두에 두고 황 대리에게 미끼를 던졌고, 황 대리는 보란 듯이 미끼를 물었다.

대찬은 사전에 수입 업체의 사장과 충분히 교감했다.

“사장님, 저희 측에 납품하는 건 사장님께도 좋은 기회겠지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필래마트는 대기업인데요. 수영실업 오 사장하고 대리님이 다리를 잘 놔줘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장님이 취급하는 물건 품질이 좋아서 저희도 기쁩니다. 다만, 정식으로 납품 절차를 밟기에 앞서서 부탁을 좀 드리려고 하는데요.”

“부탁이라뇨?”

그 부탁이란 황 대리를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업체 사장으로서는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대찬이 아니면 납품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결국 대찬이 기회를 제공했으니 그의 의중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장은 대찬의 뜻대로 움직였다.

이로써 황 대리는 프레젠테이션에서 한 번 대차게 얻어맞고 다시 확인 사살을 당했다.

이렇게 되니 김영우 차장마저 한동안 황 대리를 백안시했다.

황 대리의 완패였다.

퇴근하는 대찬의 걸음은 가뿐했다.

유백기 이후 황경원 대리만큼 대찬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황경원 대리에게 단단히 쓴맛을 보여 주었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 속이 시원했다.

그건 황 대리에게 싫은 소리를 들었던 사무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허운이 퇴근하는 대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늘 이대로 집에 갈 거야?”

“왜, 한잔하자고?”

“당연하지. 딱 한 잔만 하고 가자, 딱 한 잔.”

대찬은 픽 웃었다.

“딱 한 잔 운운하는 사람치고 딱 한 잔만 하는 사람 못 봤다.”

“딱 한 잔만 하면 너도 섭섭해할 거잖아?”

“그렇지. 간 챙기자.”

“그렇게 치면 안 챙길 부위가 어디 있어? 담배 피우니 폐 챙겨야지, 커피 입에 달고 사니 위 챙겨야지, 웬 종일 모니터 보고 있으니 눈 챙겨야지…….”

대찬과 허운은 시시껄렁한 말을 주고받으며 단골 술집으로 향했다.

길을 걷던 허운은 은연중에 주위를 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 황 대리 아니야?”

“황 대리?”

허운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껍데기집 봐.”

허운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과연 황경원 대리가 있었다.

혼자 앉아 돼지 껍데기를 구우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처량한 꼬락서니를 보니 약간의 동정심마저 움텄다.

그렇다고 저기에 끼어들어 대작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황경원 대리 역시 대찬의 합석을 바랄 리 만무했다.

서로 내키지 않는 상황이니 대찬은 소 닭 보듯 그를 지나쳤다.

허운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거나하게 술을 걸치고 대찬과 허운은 자리를 파했다.

허운은 항상 대찬보다 먼저 취했다.

기분이 좋으니 술이 많이 들어갔고, 만취하니 사지가 제멋대로 놀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허운의 자취방이 있었지만 택시를 태워 보냈다.

다 큰 남자 챙겨 줄 만큼 대찬의 상태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취기에 몸이 노곤해졌다.

대찬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아,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얼른 들어가! 계산은 좀 하고!”

한쪽의 소란이 대찬의 걸음을 붙들었다.

대찬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경원 대리가 혼자 소주를 푸던 껍데기집이었다.

늙수그레한 껍데기집 여주인이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외침이 향하는 대상은 완전히 고주망태가 되어 뻗어 버린 황경원 대리였다.

“하.”

대찬은 그걸 보고 자리에 우뚝 섰다.

황경원 대리는 일어나려다가 거푸 엉덩방아를 찧었다.

눈은 완전히 풀려 거의 감겼다.

꼬락서니가 처량한 걸 넘어서 추했다.

늙은 여주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진절머리를 냈다.

대찬은 갈 길을 재촉하려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그쪽으로 갔다.

그가 주인에게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사장님,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총각, 이 사람 알아?”

“네, 같은 사무실 사람입니다.”

회사 동료라는 말 대신 같은 사무실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대찬과 황경원 대리는 견원지간이었다.

주인이야 그런 속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귀찮은 손님을 처리할 구세주를 반갑게 맞았다.

“잘됐네! 얼른 데려가!”

“알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폐가 많았습니다.”

“총각한테 떠넘겨서 미안하게 됐어.”

주인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황 대리를 해치우곤 콧노래를 부르며 셔터를 내렸다.

대찬은 황 대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 대리님, 정신 좀 차려 보시죠.”

“어… 넌 뭐야!”

황경원 대리의 혓바닥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뭐긴 뭡니까, 조대찬이지. 정신 좀 차려요. 입 돌아가요.”

“야이 씨… 재수 없는 새끼! 네가 여기 왜 있어!”

인사불성이 된 황경원 대리의 입은 거칠었다.

대찬은 순간 욱해서 그를 내다버리려다가 최후의 인류애를 발휘했다.

허리를 굽혀 그를 일으켰다.

가까이 다가가니 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이미 취한 대찬에게 술 냄새가 독하게 끼칠 정도이니, 이 민폐쟁이는 숫제 술을 들이부었단 뜻이었다.

“얻다 손을 대, 이 개새끼야!”

황경원 대리는 말만큼 거칠게 대찬의 손길을 뿌리쳤다.

황 대리는 자기가 뿌리쳐 놓고 자기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는 대찬을 찌릿 노려보며 제멋대로 주워섬겼다.

“건들지 마! 재수 없는 새끼… 개새끼…….”

“재수 없는 새끼, 개새끼는 이미 써먹었는데요. 식상하게, 다른 욕 없어요?”

“엿같은!”

황경원 대리는 빽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곡예를 하는 듯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그래, 잘 걸으면 됐다.’

대찬은 황 대리를 버려두고 귀가하려 했다.

그런데 노파심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다가 취기가 싹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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