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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21화 (120/556)

난 할 수 있어 121화

황경원 대리는 업체 측을 깍듯이 모셨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공사다망하신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대단한 부탁을 하시려고 이런 뻑적지근한 곳을 다 예약하셨습니까?”

“하하, 뭐가 그렇게 급하십니까. 일단 술이나 몇 순배 돌리고 천천히 얘기 나누시죠.”

술이 몇 잔 오고 간 다음, 황경원 대리가 꺼낸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거 조대찬 대리가 굉장히 삐딱하죠? 어딘가 재수 없고, 눈깔은 항시 도끼눈에.”

“세일즈맨 허리는 원래 갈대처럼 팔랑팔랑, 그런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거야 원 대나무처럼 꼿꼿하니 어디 쓰겠습니까?”

“그런 놈이 실속은 없죠. 속 빈 대나무처럼 말입니다?”

“황 대리님은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하시는군요.”

황경원 대리의 맞장구에 업체 측도 웃음을 지었다.

“사실 대나무는 나무도 아닌 걸 아십니까?”

“뭐라고요?”

“기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랍니다. 조대찬이가 세일즈맨인 척을 하는 말라비틀어진 선비인 것처럼요.”

“하하, 거 볼수록 조대찬 이꼴 대나무 공식이 통하는군요.”

황경원 대리는 공손히 술을 따르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그런 조 대리 말고 저랑 같이 일을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황 대리님하고요?”

“예. 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조 대리랑 다릅니다. 사업 파트너를 잘 챙길 줄 안다니까요? 저랑 하시죠, 마다가스카르 고사리.”

“어흠, 그러면 그럴까요?”

황경원 대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좋습니다. 한번 해 봅시다.”

업체 측은 황경원 대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경원 대리는 그 손을 덥석 잡으며 당부를 남겼다.

“조 대리한테는 해 줄 것처럼 하다가, 딱 발표 전날에 안 되겠다고 통보하면 됩니다. 아셨죠?”

황 대리는 제법 얍삽한 꿍꿍이까지 동원했다.

수입 업체 측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다.

발표 전날.

황 대리의 뜻대로 이뤄졌다.

전화를 받은 대찬의 목소리가 대뜸 높아졌다.

“예? 그걸 오늘 알려 주시면 어떡합니까? 당장 내일 발푠데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업체 측은 아랑곳하지 않고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찬은 꺼진 액정을 한참 바라봤다.

넋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황 대리로서는 깨소금 맛이었다.

“산호 씨, 잘했어! 덕분에 황소개구리가 완전히 풀 죽었잖아. 저런 모습 처음 봐. 그렇지?”

“예, 그러게요.”

김산호는 떨떠름하게 동조했다.

기획안 발표까지는 고작 하루였다.

아무리 대찬이 날고 긴다 해도 판을 뒤집을 만한 건수는 올리지 못할 것이다.

황 대리는 그렇게 확신했다.

대찬과 황 대리의 희비가 엇갈린 상태에서 기획안 발표가 다가왔다.

발표를 며칠 앞두고 김영우 차장이 황 대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자신 있지?”

“예! 자신 있습니다.”

모처럼 활기찬 대답에 김영우 차장의 기대도 높아졌다.

그는 황경원 대리의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자네 편 안 들어 줘도 괜찮겠어?”

“예. 누가 봐도 제가 조 대리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요.”

“좋아! 잘해 보라고.”

김영우 차장이 황경원 대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발표 당일.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아침 일찍 회의실에 모였다.

당사자인 대찬과 황경원 대리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앞에 모으고 서 있었다.

도진석 상무가 가장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누가 먼저 할래요?”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황경원 대리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도진석 상무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조 대리, 이의 없죠? 황 대리, PT 시작해요.”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황경원 대리가 막 발표를 시작하려는 찰나, 누군가 회의실 바깥에서 안쪽을 기웃거렸다.

그림자를 드리우는 인기척에 도진석 상무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봤다.

직원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다.

도진석 상무는 정체를 확인하고 급히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얼른 기립하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부사장님!”

이동수 부사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은체를 하고는 웃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기획실 재밌는 거 하네?”

“아, 하하… 부사장님이 여긴 무슨 일로…….”

“뒷방 늙은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거지. 도 상무, 괜찮으면 나도 껴 주겠나? 조용히 구경만 하다 가지.”

“물론이죠. 여기 앉으시죠.”

도진석 상무는 이동수 부사장에게 얼른 상석을 내주었다.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이동수 부사장의 등장에 당혹한 표정이었다.

다만, 대찬은 이동수 부사장과 시선을 교환하며 웃었다.

공정한 심판이 되어 달라는 대찬의 청탁에 이동수 부사장이 선선히 응낙하면서 마련된 자리였다.

이동수 부사장의 등장에 당혹한 황경원 대리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대찬은 침몰이 예정된 난파선이었다.

‘부사장이 낀다고 해서 결과는 안 달라져.’

그는 단단히 각오하며 먼저 프레젠테이션에 나섰다.

착실히 준비했고, 대찬보다 나으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그의 발표는 확신에 차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는 소비자의 인식, 가격, 품질을 고려했을 때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황 대리는 박수를 기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는 대찬의 아이디어였다.

지금까지 승승장구해 온 대찬이 마련한 기획이라면 당연히 반응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동수 부사장의 표정이 묘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진석 상무와 김영우 차장의 표정도 개운치 않았다.

이동수 부사장은 아래턱을 쭉 내민 채 심각한 표정이었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일단은 오케이. 다음 조 대리 발표 진행하지.”

부사장의 ‘일단’이라는 말이 황 대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대찬은 덤덤히 발표를 준비했다.

오다혜와 홍은주 역시 사전 리허설대로 착착 움직였다.

홍은주의 면밀한 자료와 오다혜의 튀는 센스로 만들어진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었다.

대찬은 능숙한 자세로 발표에 임했다.

“저희가 준비한 아이템은 할머니 산나물입니다.”

“할머니 산나물……?”

발표의 초입부터 이동수 부사장은 관심을 가졌다.

황 대리의 발표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네. 전국 각지의 할머님들이 채취하는 산나물을 제품화하는 겁니다. 그리고 제품명은 할머님들의 성함을 따와서 짓는 겁니다.”

“이를 테면?”

이동수 부사장은 흥미가 동한 눈빛을 보냈다.

“가령 성함이 박옥화라면 박옥화 할머니 취나물, 성함이 김순례라면 김순례 할머니 고사리 같은 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신선 식품은 제품을 차별화하기 매우 힘든 분야입니다. 가격과 품질이 대체로 균일합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렇다면 결국은 소비자에게 좋은 이미지, 품질에 대한 신뢰 등에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할머니가 가지는 시골의 정겨운 이미지를 도모하고, 제품명에 본명을 기재함으로써 품질에 대한 충분한 신뢰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팔짱을 끼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석 상무는 불안한 눈빛으로 이동수 부사장을 흘끔흘끔 훔쳐봤다.

“계속해 보게.”

“더불어 할머님들의 노동력에 대한 충분한 금전적 가치를 우리 회사가 제공함으로써 상생하는 대기업의 모범적인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의견이야.”

“특히 경쟁 업체인 위마트가 최근 납품 업체에 대한 단가 후려치기로 이미지가 손상되었고, 샬롯마그넷 역시 수입한 꽃게에 납이 검출되면서 소비자의 신뢰를 상당 부분 잃었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눈을 빛냈다.

“우리가 윤리적인 경영, 품질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해 줌으로써 경쟁 업체의 허점을 파고들 수 있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노인 한 사람이 채취할 수 있는 양은 매우 한정적이네. 전국 점포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하기 어려울 텐데.”

이동수 부사장의 지적은 적절했다.

대찬은 그에게 공정한 심판이 돼 달라고 부탁했지, 편파 판정을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대찬의 부탁을 정확히 준수했다.

대찬은 그 지적을 부드럽게 받아쳤다.

“규모의 경제라는 측면에서 이 제품은 수입 제품이나 농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제품에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섣부르게 고급화 전략을 채택했다가는 도리어 역효과가 날 것입니다.”

“그렇네. 그것도 문제지.”

“그렇기에 제품 자체의 판매를 통한 수익은 한정적입니다. 하지만 윤리 경영, 소비자 신뢰, 이미지 제고 등의 효과는 단순히 이 제품에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매장의 다른 상품들에게까지 긍정적인 효과가 미칠 것이란 얘긴가?”

“그렇습니다. 조금 노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할머니 산나물은 미끼 상품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품 자체만으로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물론이지. 기왕이면 다홍치마니까.”

“리모델링 후 전면적인 그랜드 오픈이 실시될 때, 어떤 상품을 내놓느냐에 따라 우리 마트의 이미지가 결정될 것입니다. 첫인상은 오래가는 법이니 말입니다.”

“할머니 산나물이 우리 필래마트의 첫인상을 결정할 수도 있다?”

대찬은 당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만약 싸구려 수입산 나물을 중점적으로 진열하면, 결국 이류의 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대찬은 황 대리의 기획,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황 대리에게 던진 미끼 기획을 공개적으로 힐난했다.

저 멀리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건너온 고사리가 초라해졌다.

황 대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동수 부사장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리의 말이 옳아. 우리가 처음으로 내놓는 제품이야. 우리만의 확실한 정체성을 세우는 게 맞지.”

이쯤 되니 황 대리의 역성을 들어야 옳을 도진석 상무도 슬그머니 부화뇌동했다.

“역시 부사장님의 안목이 탁월하십니다. 저도 조 대리의 기획이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황 대리는 원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도진석 상무는 가볍게 외면했다.

“좋아. 조 대리의 기획을 중점적으로 추진해 보도록 해.”

“과찬이십니다.”

“텔레비전 CF로 제작해도 괜찮을 것 같군. 마케팅 본부에 언질을 해 봐야겠어.”

이동수 부사장은 거듭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도진석 상무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 내가 월권을 행사했나? 어쨌거나 전략기획실 헤드는 도 상무인데.”

“아, 아닙니다. 당연히 부사장님 의견에 적극 따라야지요.”

이동수 부사장은 월권에 대한 책임을 가벼운 미소와 말 한마디로 퉁쳤다.

이동수 부사장은 뒷짐을 진 채로 회의실을 떠났다.

마치 사자 떼를 실컷 짓밟아 놓고 유유히 떠나는 코끼리의 모습 같았다.

황경원 대리의 완패였다.

회의실의 분위기가 스산해졌다.

그때 대찬이 도진석 상무에게 말했다.

“실장님, 마다가스카르 고사리 건 말입니다.”

“그건 왜?”

이미 관 뚜껑에 못까지 박은 고사리를 대찬이 언급하자 황 대리는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겼으면 됐지, 부관참시까지 하려 드는 것이냐 생각했다.

하지만 대찬의 말은 그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물론 오픈 때 내놓기에는 다소 우려되는 부분이 있지만, 경쟁력은 분명합니다. 계속 추진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런칭하는 게 어떨까요?”

“음, 그런가? 뭐, 가격 면에서 메리트가 있기는 해.”

그러자 황 대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도 자신의 기획이 아예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건 모면하게 됐다.

대찬은 살려 놓은 마다가스카르 고사리를 다시 황경원 대리에게 넘겼다.

“황 대리가 계속 추진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보름 시즌에 맞춰서 출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 같군.”

황경원 대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도진석 상무에게 물었다.

“그, 그럼 추진해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자네가 책임지고 한번 잘해 봐.”

“감사합니다, 실장님!”

황 대리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도진석 상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아무리 팔은 안으로 굽는다지만, 마다가스카르 고사리는 생각할수록 졸작이었다.

회의실을 떠나는 도진석 상무의 고개가 거푸 가로저어졌다.

황 대리는 허리를 펴면서 대찬을 흘끔 바라봤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도 않을뿐더러 이건 본래 대찬의 기획이었다.

그는 대찬이 자신을 돕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대찬도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만 보이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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