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20화
“새해에 내놓을 만한 획기적인 아이템을 하나씩 마련하도록 하세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서둘러서.”
그 말에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실장님, 하지만 그 부분은 상품기획부의 업무 영역 아닙니까?”
“뭐 거기서도 용은 쓰겠지만, 상품기획부에서 한다고 우리가 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그래도 엄연히 업무의 경계가 있지 않습니까.”
한태윤 과장은 자기 일이 아님에도 망설임 없이 도진석 상무의 계획에 어깃장을 놨다.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성격이 과장이 되고도 여전했다.
‘역시 한 과장님.’
대찬을 비롯한 주니어들은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했다.
하지만 도진석 상무는 한태윤 과장의 딴죽에 넘어가 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표정이 독사처럼 굳었다.
그는 한태윤 과장을 무시하고 황경원 대리에게 말했다.
“황 대리, 못하겠어?”
“아, 아닙니다, 실장님. 하겠습니다.”
그다음은 대찬이었다.
“조 대리는.”
“짧은 소견으로는 한 과장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사설이 길어! 할 거야, 말 거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하겠습니다.”
도진석 상무의 관자놀이가 꿈틀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꼭 그렇게 사족을 붙여야 하나?”
“하겠습니다.”
대답이 짧을수록 신상에 이롭다는 걸 대찬도 알았다.
하지만 굳이 길게 대답하는 까닭은, 자신들을 위해 도진석 상무의 눈 밖에 난 한태윤 과장을 위한 알량한 의리의 일환이었다.
도진석 상무는 쯧, 혀를 한 번 차고 다른 이들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는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로 말했다.
“정초 오픈에 맞춰서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인사고과에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도진석 상무가 자리를 뜨려는데, 황경원 대리가 그를 붙들었다.
“실장님!”
“뭡니까, 황 대리.”
“그래도 시니어들 보필할 최소 인력은 남겨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대찬이라든지 허운, 유채경 따위가 이런 말을 했다면 도진석 상무는 항명이라며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품 안의 황경원 대리가 말하니 그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편이 좋긴 하겠군.”
“서 대리랑 허운, 유채경 사원은 시니어들 보좌하고, 저와 조 대리, 김산호, 오다혜 사원이 실장님의 지시를 따르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
도진석 상무가 쾌히 응낙하자 자신감을 얻은 황경원 대리는 한 발짝 더 나갔다.
“김산호 씨나 오다혜 씨는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단독으로 기획안 준비하기엔 무리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요?”
“저랑 조 대리한테 한 명씩 붙여 주세요. 그 편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황경원 대리가 그렇게 말하고 찰나의 순간, 그와 도진석 상무는 눈빛을 교환했다.
도진석 상무의 입꼬리가 살짝 벌어졌다.
“좋아. 그렇게 하지.”
대찬은 도진석 상무의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황경원 대리는 본인과 대찬을 대척점에 세웠다.
그렇게 링 위에 자신과 대찬을 세워 놓고 스파링을 해서, 심판인 도진석 상무와 김영우 차장의 편파 판정으로 TKO승을 거두고 대찬을 망신 주겠다는 의도였다.
그 뻔한 의도가 대찬에게도 훤히 보였다.
그는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대찬은 덤덤하게 도진석 상무에게 물었다.
“홍은주 씨는 어떻게 하죠?”
도진석 상무가 턱짓으로 홍은주를 불렀다.
“홍은주 씨, 황 대리나 조 대리 중에 골라 봐.”
홍은주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저는 조 대리님 밑에서 할게요.”
황 대리는 주저 없이 대찬을 고르는 홍은주가 불쾌했다.
그는 홍은주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며 말했다.
“제가 김산호 씨 데리고 하겠습니다, 실장님.”
“어, 그래. 오다혜 씨는 조 대리랑 같이 준비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팀이 짜였다.
황경원 대리와 김산호 사원.
조대찬 대리와 오다혜 사원, 그리고 홍은주.
“산호 씨, 따라와.”
황경원 대리는 김산호를 밖으로 불러냈다.
김산호는 쫄래쫄래 황 대리를 따라 나갔다.
황 대리는 콧잔등을 씰룩거리며 불쾌감을 표했다.
김산호를 흡연실로 불러낸 황경원 대리는 담뱃불을 붙이면서 코웃음을 쳤다.
“고졸 계약직 주제에 콧대만 처 높아 가지고.”
“예?”
“홍은주 말이야. 오만하기 짝이 없어.”
“아, 그런가요…….”
김산호는 황 대리의 억지에 맞장구 쳐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놓고 거스를 수도 없어서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러고도 황 대리는 한참 홍은주를 욕하더니 김산호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그만두었다.
황 대리가 김산호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김산호 씨.”
“네.”
“임무가 있어.”
“말씀만 하십쇼.”
김산호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물론 속으로는 아니꼽게 여겼다.
“조 대리가 무슨 아이템 잡아오는지 좀 캐 봐.”
“예? 제가 어떻게…….”
“김산호 씨 오다혜 씨랑 그렇고 그런 사이잖아. 그런 것도 못 물어보나?”
따갑게 쏘는 말에 김산호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잔말 말고 내 말대로 해. 알았어?”
“…알겠습니다.”
김산호는 속으로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모두 황 대리에게 퍼부었다.
반면에 대찬이 이끄는 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커피 한 잔씩 할래요?”
대찬은 오다혜와 홍은주를 사옥 1층의 카페로 이끌었다.
딱딱한 사무실보다는 왁자지껄한 카페가 분위기도 더 편했다.
대찬은 사비로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고맙습니다, 대리님!”
“뭘요.”
대찬은 웃으면서 자세를 편하게 했다.
사무실은 공기부터 갑갑하다.
그런 분위기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나올 리 만무했다.
대찬은 목에 건 사원증도 주머니에 넣었다.
회의도 바로 시작하지 않았다.
시시껄렁한 신변잡기로 허송세월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주무르는 데 효과가 있었다.
한창 가벼운 얘기가 오고 가는 와중에 오다혜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 산호 씨다.”
홍은주가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오다혜는 김산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찬은 커피 잔을 입에 갖다 대며 오다혜에게 물었다.
“뭐래요?”
“황 대리님 욕으로 도배가 돼 있는데요?”
그러자 대찬도 관심을 보였다.
“갑자기 왜?”
“벌써부터 성질 심하게 부린대요. 받아 주기 힘들다 그러네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 대리님은 그 성질머리 좀 어떻게 하셔야 될 텐데.”
“제 말이요!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조 대리님 반만 닮았으면 저희도 불만 없을 거예요.”
대찬은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오다혜 씨, 방금 아부 되게 자연스러웠어요.”
“아부 아니에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네요.”
“진심이에요! 조 대리님은 신뢰가 부족한 게 탈이에요.”
“알았어요, 알았어.”
오다혜는 김산호의 문자 메시지를 다시 찬찬히 살피다 말했다.
“황 대리님이 산호 씨한테 첩자 노릇을 하라고 했다는데요?”
“응? 첩자 노릇이라니?”
“저희 아이템 선정하는 걸 저를 통해서 알아내려고 하시나 봐요, 황 대리님이.”
그러자 홍은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진짜 일 한번 더럽게 하시네.”
“그러게 말입니다.”
대찬도 홍은주의 말에 동감했다.
황 대리의 전력을 생각하면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그는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대찬을 이기고 싶을 것이다.
심판이 자신에게 우호적이긴 하지만, 아이템을 도둑맞은 대찬의 표정을 구경하고 싶은 치사한 마음에서 나온 전술일 것이다.
‘못났다, 못났어.’
대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단 황경원 대리가 간과한 게 있다면 김산호는 그가 아니라 대찬의 편이었다.
그 전에 오다혜의 편이었고.
홍은주는 황 대리의 비겁한 면모에 학을 뗐다.
흡사 벌레 보듯 했다.
“조 대리님, 어떻게 하실 거예요?”
“못된 사람 혼내 줘야죠.”
오다혜는 눈을 반짝 빛냈다.
“어떻게 혼내실 건데요?”
“글쎄, 오다혜 씨라면 어떻게 할래요?”
대찬은 씩 웃었다.
대찬은 그 자리에서 어떤 아이템을 선정할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황 대리가 더럽게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더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김산호를 역으로 이용했다.
이중 스파이로 삼았다.
“황 대리가 준비하는 아이템 알려 줘.”
“눈에는 눈, 이에는 인가요?”
김산호의 물음에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 양반.”
“아마 당해도 정신 못 차릴 거예요.”
김산호는 씩씩거리며 황 대리를 욕했다.
그 짧은 시간 팀을 꾸려 일하면서 쌓인 감정이 적잖은 듯했다.
“산호 씨도 황 대리 팀이긴 하지만 산호 씨한테는 피해 없도록 할게.”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제가 왜 황 대리 팀이에요? 저는 무조건 형님 팀이라니까요.”
김산호의 너스레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암튼 능청은.”
“그런데 황 대리 아이템을 알아내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대로 카피?”
“황 대리는 어떻게 할 작정이었대?”
김산호는 황 대리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조 대리 아이템을 훔쳐 오면, 거기에 플러스알파 하는 거야!’라고 말했죠, 황 대리가.”
“분명히 어렸을 때 씽크빅 안 다녔을 거야. 창의력이 없어.”
“형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황 대리 정반대의 컨셉으로 가져갈 거야. 그대로 카피하는 건 돋보이지 않아. 그 전에 자존심이 상하고.”
김산호는 넉살 좋게 공치사를 했다.
“역시 형님은 황 대리랑은 다르네요.”
“당연하지.”
“그럼 황 대리가 아이템 잡을 때까지 기다리실 거예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지. 황 대리가 내 아이템을 그대로 카피하겠다고 했다면, 결국 황 대리 아이템도 내가 잡아 주는 거니까.”
“아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대찬은 김산호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김산호는 대찬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쪼르르 달려가 황 대리에게 그대로 고해 바쳤다.
“대리님, 조 대리님 쪽 아이템 결정된 거 같습니다.”
“어, 말해 봐.”
말투는 쌀쌀맞았지만 관심이 동하는 눈치였다.
“농산물 쪽 아이템인데요, 수입 농산물 쪽으로 타겟팅 하시더라고요.”
“수입……?”
황 대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요.”
“…마다가스카르?”
전혀 생각지 못한 선택이었다.
팀의 사활이 걸린 아이템을 제안하는 자리다.
수입 농산물을 꺼내 드는 것도 그렇고, 그 와중에 듣도 보도 못한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라니.
멍한 표정의 황 대리에게 김산호는 준비된 말을 읊었다.
대찬이 써 준 대본 그대로였다.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가 품질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하더라고요. 중국산에 비해 생소하다 보니 소비자들의 부정적인 시각도 거의 없을 테고요.”
“가격도 싸겠지.”
김산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어쨌든 싼 가격에 제품을 공급하는 게 마트의 가장 중요한 미덕이니까요.”
“하지만 수입 루트를 뚫는 게 만만치는 않을 텐데.”
“국내 업체 한 군데만 마다가스카르산 고사리를 취급하는데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에요.”
황 대리의 눈이 빛났다.
“뭐? 잘 안 풀려?”
“네. 그쪽 사장이랑 말싸움이 좀 있었거든요. 상당히 애먹고 계시답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김산호 씨, 그쪽 회사 번호 좀 알아내 봐.”
“예? 번호는 왜…….”
“뭘 물어! 조 대리랑 말이 잘 안 된다며? 아마 나랑은 잘 될 거다. 술 좀 먹이고 알랑방귀 좀 뀌어주면 그만이야, 까짓것.”
“그렇군요…….”
남이 애써 뚫어 놓은 루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채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김산호는 더더욱 황 대리와 함께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황 대리는 기어코 김산호에게서 연락처를 받아 내 업체에 연락했다.
제법 거한 일식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