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9화
이내 남매가 탄 택시가 저만치 멀어졌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별일 다 있네.”
황 대리가 자신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았다.
하지만 굳이 따로 자리까지 만들어 가면서 견제하려 든다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대찬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애초부터 황 대리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구태여 반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먼저 이렇게 싸움을 걸어온다면 굳이 피할 생각도 없었다.
김산하의 귀국은 옛 에피니키온 사람들이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다들 저마다 바쁜 삶을 사는 와중이지만, 김산하의 귀국 기념 파티에는 월차를 내 가며 참석했다.
그만큼 김산하가 쌓아 놓은 덕이 있었다.
대찬도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죽마고우인 최재한도 이런 날이나 돼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대찬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최재한부터 찾았다.
“아이고, 최 기자님, 오랜만입니다.”
“조 대리님,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둘은 장난스러운 경어체로 반가움을 표했다.
“눈코 뜰 새도 없다더니, 이제 좀 살 만해졌나 봐? 저번에는 부모님 돌아가시지 않는 이상 시간 못 낸다더니.”
“그땐 수습이라 마와리 돌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수습 딱지 떼고 살 만하지.”
마와리는 수습 기자들이 담당 구역의 관공서를 돌며 기삿거리를 따오는 일을 의미했다.
경찰서의 2진 기자실에서 쪽잠을 자 가며 하던 일을 이제는 머리가 커서 안 하게 됐다.
기자란 언제나 바쁜 직업이지만, 수습 시절처럼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는 세월은 지나간 것이다.
“그럼 지금 출입처는 어디야?”
“보통 사회부로 배치받는데 나는 이번에 산업부 들어갔어. 아마 종종 너한테도 취재 요청 할 거야. 뺀찌 놓지 마라.”
“뺀찌 안 놔. 언론 무서운 줄 알거든.”
“그리고 저번에 유백기 청소부 아주머니 건 터트린 거 보답 못 받은 거 알지?”
“아, 그건 기억하고 있지.”
“불알친구라고 해도 계산은 빠삭하게 할 거야. 뺀찌 놓으면 진짜 죽어.”
대찬은 흐흐 웃으면서 최재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회사 잘 써 준다는 보장이 있으면 뺀찌 놓을 리가.”
“보통 나쁜 일이 뉴스가 되지.”
그러자 대찬은 얼굴을 확 구기며 어깨에 얹은 손을 치웠다.
“그럼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마.”
“어쭈, 그런 식으로 나오면 진짜 확 필래마트 엎어 버린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마. 소름 끼친다.”
대찬은 잠깐 상상하고 진저리를 쳤다.
대찬과 최재한이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 저쪽에서 누군가 손을 흔들었다.
“오, 대찬이 왔어?”
“어, 마강국.”
대찬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 착석했다.
최재한도 나란히 앉았다.
마강국은 대찬의 잔에 맥주를 따르면서 말했다.
“일은 할 만하냐?”
“응, 그냥저냥. 너는 곧 졸업이잖아. 취직할 곳은 알아봤어?”
마강국은 체대생이었다.
그쪽 진로를 잘 알지 못하는 대찬은 딱히 취업 선배로서 조언할 만한 게 없었다.
그러니 백지 상태로 단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마강국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보디가드.”
“보디가드? 경호원?”
마강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먹이라고 다 같은 주먹이 아니야. 노파심에 말하지만, 나쁜 구석은 전혀 없는 회사니까 걱정할 거 없어.”
“걱정 안 해.”
“지도 교수님이랑 절친한 분이 운영하시는 업첸데, 거기서 사무 행정 일을 보도록 추천서를 써 주신다고 했거든.”
“사무가 몸은 더 편하긴 할 텐데.”
“근데 난 좀이 쑤셔서 책상에 오래 못 앉아 있는 스타일이라. 차라리 현장에서 뛰는 편이 낫다니까.”
대찬은 지금까지 봐 온 마강국의 기질, 그리고 근육으로 다져진 거대한 덩치를 보고 그의 말에 마음으로 동의했다.
“잘됐으면 좋겠네.”
대찬은 그렇게 말하며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대학 마치고 사회로 나오니 슬슬 인맥이 위력을 발휘한다.
대찬의 고속 승진은 서청수, 서원웅과의 특별한 관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마강국의 취직도 인맥의 역할이 다분하다.
이런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대찬은 마강국의 말을 통해 다시 느꼈다.
“모이자마자 취직 얘기야, 술맛 떨어지게.”
자리의 주인공인 김산하는 오자마자 대찬을 타박했다.
그러고는 마강국에게 손짓해서 대찬의 옆자리를 비우도록 강요했다.
덩치 큰 마강국도 김산하에게는 반항하지 못했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거대한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대찬의 옆자리를 꿰찬 김산하는 그제야 맘 놓고 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자리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많았다.
대찬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술 한 잔에 안부 한 마디씩 오갔다.
대찬은 민승기에게 소주를 따르며 물었다.
“승기 형, 요즘 일할 만하세요?”
“그냥저냥. 너는 어때?”
“저도 뭐 그냥 그렇죠.”
대찬의 대답에 민승기는 픽 웃으며 퉁을 놨다.
“그냥 그런 놈이 사원증에 잉크도 안 말랐는데 대리를 다냐?”
“그거야 운이 너무 좋았고요. 더 굽히고 살아야죠.”
민승기는 에피니키온 선배가 설립한 새로운 커피 전문점 체인에 입사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내실이 있는 회사였다.
후배는 선배를 충정으로 따르고, 선배는 후배를 충정으로 아끼는 에피니키온의 풍토가 있기에 민승기 역시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한창 팽창하는 커피 전문점 시장에서 민승기가 몸담은 회사도 급격히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을수록 사람들의 혀는 꼬이고 목소리는 커졌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 상담이나 교수의 뒷담화, 자취방에서 나온 바퀴벌레 따위의 얘기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대리가, 과장이 어쩌고저쩌고.
결혼이 어쩌고저쩌고.
조금 이재에 밝은 편들은 삼라전자 주식이, 판교 땅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다.
몸이 축난다며 일찌감치 홍삼이며 로얄젤리며 챙겨 먹는 이들도 점점 생겨났다.
대찬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적잖이 취한 몸이 자연스레 벽을 찾았다.
대찬은 비스듬히 벽에 기댄 채로 불을 붙였다.
“대화들이 팍팍해졌구만. 낭만 없게.”
그는 훅 담배 연기를 뿜었다.
술기운에 담배까지 피우니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러는 너도 팍팍하게 말하잖아. 꼭 자기는 예외인 것처럼 말하니.”
“누나.”
김산하가 흡연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김산하는 팔짱을 낀 채로 대찬과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댔다.
대찬이 담배를 내밀었지만 김산하는 고개를 저었다.
“끊었어.”
“왜?”
대찬은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여자가 담배 피우면 고까워하는 상사들이 많으니까.”
“그거야 그 사람들이 잘못된 거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즐길 걸 못 즐기는 건 너무 화나는데.”
대찬의 말에 김산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20대를 폄훼하지 마. 팍팍해졌다느니, 낭만이 없다느니.”
“아.”
“우리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김산하는 그렇게 말하고 대찬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 까치발을 들고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대찬이 살짝 당황해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이미 등이 벽에 닿아 있었다.
“누, 누나, 여기는…….”
“아, 안 할래. 너 담배 냄새 난다.”
“그래.”
대찬은 안도 반, 아쉬움 반의 웃음을 지었다.
김산하는 웃으면서 대찬의 입에서 담배를 뺏었다. 반쯤 탄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연기를 내뿜고, 다시 대찬에게 다가가 키스했다.
묘한 느낌이 입술을 스쳐 지나갔다.
“마저 피우고 들어와.”
김산하는 웃으면서 대찬의 어깨를 한번 짚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김산하가 돌려준 담배는 필터에 립스틱의 연한 붉은색이 묻어 있었다.
대찬은 머뭇거리다가 그 담배를 도로 물었다.
립스틱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그 웃는 박자에 맞춰 담배 연기가 스타카토로 내뿜어졌다.
자리는 자정 전에 끝났다.
대학 때 같았으면 동틀 녘까지 버텼겠지만, 출근을 앞둔 그들은 부랴부랴 흩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대찬의 지갑은 넙죽넙죽 받은 명함들로 두꺼워져 있었다.
그 명함의 숫자만큼 대찬의 명함도 뿌려졌다.
필래마트는 월드몰로부터 인수한 16개 점포, 그리고 기존에 운영하던 흥읍점을 합해 17개 점포에 대한 전면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전국에 분포한 필래마트 점포들이 분주히 페인트를 바르고, 진열대를 새로 설치하고 조명을 바꿨다.
월드몰의 간판이 철거되고, 필래그룹의 광고·홍보 계열사인 필래기획 소속의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필래마트의 로고와 간판이 전시되었다.
이에 담당 부서들은 저마다의 일을 찾아 분주히 쏘다녔다.
대찬의 전략기획실도 그들의 업무로 진땀을 흘렸다.
2009년은 필래마트의 실질적인 원년이 될 것이다.
한국의 대형 할인점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월드몰과 함께 매물로 나왔던 크라즈망은 위마트와 샬롯마그넷이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신흥 기업 집단인 씨랜드의 품에 안겨, 업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범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대형 할인점 시장은 전통의 강자인 새천년그룹의 위마트, 샬롯그룹의 샬롯마그넷과 후발주자인 필래그룹의 필래마트, 씨랜드의 업하우스로 재편되었다.
필래마트는 이 경쟁 구도에서 가장 적은 점포를 점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신인 월드몰이 국제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장에서 도망치듯 탈출했고, 필래마트는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러니 다른 경쟁자들보다도 더 많은 피와 땀을 요구받았다.
전략기획실장인 도진석 상무는 부서 회의에서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각 부서별로 주어진 것 이상을 해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영업부 구 대리는 판로 좀 뚫겠다고 연일 술 마시다가 간염에 걸렸답디다.”
“…….”
“수원점 점장은 아침부터 밤까지 리모델링 현장에 나갔다가 페인트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아서 코피를 주르륵 흘렸답디다.”
“…….”
“모두가 회사를 위한 열정을 불태우는 이때, 우리가 미적지근하게 우리 할 일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그 말에 도진석 상무의 충복인 김영우 차장이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 대리, 수원점 점장에 뒤지지 않는 열정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김 차장 정도 됐으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나?”
김영우 차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비위를 맞췄다.
“저희는 아직 실장님의 지도 편달이 필요합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뭐, 전략기획이라는 게 정해진 업무만으로 벅찬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니어급들은 상대적으로 널널하거든요? 아는 게 없으니까 카피나 하고 커피나 타고 그러거든.”
카피, 커피 타령은 유머였다.
다른 이들은 유머인 줄도 모르고 지나쳤다.
도진석 상무의 수발을 오래 들어 온 김영우 차장만이 알아차렸다.
“역시 실장님 유머는 한시의 운율 같은 고아한 맛이 있습니다.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요.”
“허허, 김 차장이 뭘 좀 아네요.”
김영우 차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널널한 주니어들이 수고를 좀 더 해 줘야 한다는 뜻이시죠?”
“네. 요즘 주니어들은 업무 보조 정도만 하는데도 죽상을 하고 못 살겠다 아우성을 친단 말입니다.”
도진석 상무는 그렇게 말하면서 피부가 탱탱한 대리, 사원급들의 군상을 흘끔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우리 때에 비하면 힘든 것도 없는 게 사실이거든요? 우리가 뭐 쪼인트 까기를 해, 뭘 해요?”
“그렇죠! 저희 때에 비하면야 요즘 애들 일하는 건 껌이죠, 껌.”
대찬은 그들의 만담에 가까운 대화를 심드렁하게 들었다.
비단 대찬뿐만 아니라 주니어로 통칭되는 이들의 표정이 공히 그랬다.
도진석 상무와 김영우 차장과 한 패로 엮이는 황경원 대리의 표정도 편치만은 않았다.
도진석 상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주니어들이 수고 좀 합시다, 응? 회사의 위대한 첫 걸음을 위해서.”
“암요. 회사가 잘돼야 우리도 잘되는 거니까.”
김영우 차장까지 장단을 맞추니 누가 거스를쏘냐.
그대로 결정되었다.
도진석 상무가 말했다.
“우리 주니어들한테 숙제를 하나 내줄게요.”
“말씀하십시오, 실장님.”
김영우 차장은 자기가 주니어도 아닌데 대신 대답했다.
“주니어들이 업무도 미숙하고 실수도 많지만, 한 가지 우리보다 나은 건 그래도 뇌가 싱싱하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젊으니까.”
“그 싱싱한 뇌를 단순 반복 업무에만 투입하는 건 아깝잖아요? 그래서 숙제를 내주겠다는 겁니다.”
“무슨 숙젭니까?”
“우리 필래마트는 모든 리모델링을 마치고 2009년 새해, 1월 1일에 전면 오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대찬을 비롯한 주니어들은 도진석 상무의 입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