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8화
대찬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알았어. 시간 비워 놓을게.”
“그래. 끊는다.”
그렇게 김산하는 전화를 뚝 끊었다.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꺼진 액정을 보다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일에 열중했다.
황소곱창에는 황 대리 혼자 있었다.
김산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물었다.
“차장님하고 홍은주 씨는 안 오나요?”
“차장님은 너희 오기 전에 카드 주고 가셨고, 홍은주 씨는 여기 낄 주제가 아니지.”
“그런가요…….”
뭐 얼마나 대단한 자리라고.
김산호는 속으로 툴툴거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어 시간차를 두고 오다혜도 착석했다.
황 대리가 주도해 술로 입을 적셨다.
이어서 황 대리가 말했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 뭉쳐야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야.”
“우리의 미래요……?”
쓸데없이 거창한 담론에 김산호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 우리의 미래.”
“우리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 말하는 건가요? 홍은주 씨는…….”
“홍은주 씨는 고졸 계약직이야.”
“그런데요?”
김산호의 거듭된 질문에 황 대리는 성질이 뻗쳤다.
들고 있던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놨다.
탕, 하는 소리에 김산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몰라서 물어? 출신 성분이 다르다고, 출신 성분이. 홍은주랑 우리가 어떻게 똑같은 우리야? 엉?”
“…죄송합니다. 그럼 조대찬 대리님은…….”
“지금 조대찬 때문에 우리가 모인 거 아니야, 이 새끼얏!”
일순 이성을 놓은 황 대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주위의 손님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황 대리는 푹 한숨을 쉬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다시금 조대찬 황소개구리설을 설파했다.
김산호는 어딘가 괴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찬과 김산호는 겨우 1살 차이였다. 그런데 벌써 대찬은 대리를 달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견제하지 않으면 영영 그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 같은 말단이야 하란 대로 하는 게 속 편하다.
김산호는 황 대리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고분고분하게 끄덕였다.
오다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소주잔을 여러 번 나누고 자리를 파했다.
“오늘 한 말 절대 잊지 마. 생존을 위한 절박한 심정으로 뭉치는 거다. 알았지?”
황 대리는 비장하게 폼을 잡으며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김산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루 일진이 사나웠던 김산호는 같이 자고 출근하자는 오다혜를 다독여 돌려보내고 자신도 집으로 향했다.
그때 김산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야, 꼬맹이, 잘 지내냐?”
“어, 누나.”
전화를 건 건 그의 친누나였다.
김산호의 친누나 김산하.
“나 아주 한국 들어왔다. 내일 시간 되냐?”
“내일? 되는데, 왜? 가족이랑 외식하려고?”
“아니, 그건 주말에 거하게 하기로 했고… 월드몰 이번에 필래마트랑 합쳤다면서? 인연이 묘하게 돼서.”
“묘하다니.”
“내일 보면 알아. 끊는다.”
김산호는 끊긴 전화를 보고 싱겁게 웃었다.
“이 여자 성질머리는 미국 물 먹어도 안 바뀌네.”
누나가 말한 묘하게 된 인연을 김산호는 다음 날 저녁 알게 되었다.
대찬과 김산호는 같은 시각, 같은 식당에서 마주쳤다.
전날 황 대리의 말도 있고 해서 김산호는 어딘가 찝찝한 마음을 안고 대찬에게 꾸벅 인사했다.
“어, 조 대리님,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오, 김산호 씨.”
대찬도 의외의 만남에 살짝 입을 벌렸다.
“약속 있으세요?”
“응, 김산호 씨도? 여긴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라 오다혜 씨 만나는 건 아닐 테고.”
“제, 제가 다혜랑 사귀는 걸 대리님도 아세요?”
“아, 그냥 그런 거 같아서 찔러 봤는데 맞나 보네.”
김산호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암튼 재수 밥 말아 먹은 인간이야!
김산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돼지 부속을 파는 가게였다.
메뉴에는 돼지신, 그러니까 돼지의 생식기를 이용한 전골도 올라와 있었다.
대중적인 음식은 아니었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터, 이걸 즐기는 사람들은 별종 취급을 받기 마련이었다.
벽에는 90년대의 신문지가 벽지를 대신해 발려 있었다.
대찬의 말대로 애인과 오기엔 쉽지 않은 가게였다.
김산호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돼지신 전골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신기하네요. 저도 그런데.”
둘이 마주 보고 겸연쩍게 웃는데, 누군가 등장해 동시에 대찬과 김산호의 등짝을 쳤다.
“당연하지. 똑같은 사람이니까.”
대찬과 김산호가 뒤를 돌아보니 김산하가 히죽 웃고 있었다.
둘은 동시에 말했다.
“누나.”
“잘 있었나, 아우님들. 앉아, 앉아.”
대찬과 김산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산하와 서로를 번갈아봤다.
대찬이 자리에 앉으면서 김산하에게 물었다.
“뭐야, 김산호 씨하고 아는 사이야?”
“응, 좀 잘 아는 사이지.”
김산호는 대찬을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말했다.
“제 친누나예요.”
“에?”
별 특이한 인연도 다 있다 싶었다.
“그러는 조 대리님은 저희 누나랑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아, 저는 대학 때 같이 알고 지내던…….”
그러자 김산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그렇게 말하면 그냥 그런 사이 같잖아.”
“그럼 뭐라고 해?”
김산하는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찐한 사이지. LA에서 만났을 땐… 으읍!”
대찬은 급히 김산하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그쳤다.
“이 양반이 할 말, 못할 말 가리질 못해!”
“찐한 사이…….”
김산호는 누나의 말을 곱씹었다.
대찬에 의해 가로막힌 뒷말을 제멋대로 상상했다.
그 제멋대로의 상상이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대찬은 얼굴이 빨개졌다.
저절로 단정한 자세가 취해졌다.
김산하가 큭큭 웃고는 말했다.
“들어 보니까 둘이 같은 회사더라구? 회사가 같아도 서로 모를 수 있는데 마침 또 둘이 친한가 봐.”
“일단은 같은 팀이니까.”
대찬의 말에 김산하는 놀랐다.
“같은 팀이야? 이런 우연이 있나.”
“누나 말대로 묘한 인연이긴 하네.”
“자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밥들 먹으면서 얘기하자. 사장님! 여기 전골 대 자랑 이슬 1병 주세요.”
셋은 좁은 테이블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대찬과 김산하, 김산하와 김산호, 대찬과 김산호.
서로 긴밀한 관계인지라 내외할 것도 없고 공통분모도 많았다.
김산하의 워낙에 털털한 성격 덕분에 분위기도 시종 편했다.
“내가 진짜 이거 먹고 싶어서 미국에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김산하는 입에 돼지신을 잔뜩 욱여넣으며 말했다.
“그래. 누나 많이 먹어라.”
대찬은 김산하의 앞 접시에 한가득 전골을 떠 주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김산호에게도 음식을 떠 주었다.
김산호는 보답하듯 대찬의 빈 잔을 채웠다.
술이 좀 들어가니 과감한 얘기들이 오갔다.
주당 유전자를 누나가 다 가져가서 술이 약하다는 김산호는 소주 1병을 채 비우기도 전에 두 뺨이 붉어졌다.
혀도 약간 뻣뻣해졌다.
그는 다소 풀린 눈으로 대찬에게 물었다.
“우리 누나랑 사귀셨어요?”
“네? 사귀진 않았죠.”
“사귀진 않았다니. 그럼 간판만 안 걸었지, 할 건 다 하셨다는 말씀인가요?”
폐부를 훅 찌르는 말에 대찬은 난처하게 웃으며 김산하를 봤다.
“김산호 씨 많이 취했네.”
김산하는 짓궂게 웃었다.
“못할 질문은 아니지, 뭐. 솔직히 맞는 말이잖아?”
“아니, 이 남매들이 진짜…….”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산호는 실없이 웃었다.
김산하는 동생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암튼 조대찬은 나한테 각별하니까 회사에서 잘 모셔라. 알았지?”
“응, 그럴게…….”
김산호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전날 단단히 당부하던 황경원 대리가 눈에 밟혔다.
그 앞에서는 황소개구리를 박멸하겠다 해 놓고, 여기서는 잘 모시겠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떳떳하지 못했다.
20년 넘게 한 지붕 아래서 살았던 김산하는 동생의 그런 감정을 대번에 눈치챘다.
“뭐야, 너 뭐 켕기는 구석 있지?”
“그, 그런 거 없어.”
“말 더듬으면서 그런 거 없다고 하면 잘도 믿겠다. 뭐야, 빨리 말해.”
대찬 역시 석연찮음을 감지하고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김산호의 눈을 바라봤다.
대찬과 김산하의 눈빛에 김산호는 주눅 들었다.
김산하의 남동생으로 스물 몇 해를 살았다. 누나의 의심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걸 알았다.
결국 김산호는 조대찬 황소개구리설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를 실토했다.
그 말을 듣고 대찬은 피식, 마른 웃음을 지었다.
같은 팀원들이 그런 작당 모의를 하고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출신도 다르고, 대찬이 튀는 편이었다.
그러니 다소간의 악감정이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데 모여 자신의 뒷공론을 하고, 자신을 고꾸라뜨릴 심계를 품고 있을 줄이야.
대찬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내가 잘못한 건가?’
그는 잠깐 반성을 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잘못한 게 있어야 반성을 하지.’
대찬은 가만히 김산호를 응시했다.
눈으로 보이는 건 김산호였지만 마음으로는 황경원 대리가 보였다.
‘못난 놈.’
대찬은 그가 밉기보다도 안쓰러웠다.
김산호는 대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죄송해요…….”
대찬은 가만히 있는데 김산하가 열을 냈다.
“이 철딱서니 없는 놈아, 누구한테 붙어야 되는지 천지 분간을 못하네.”
“…응?”
김산호는 어리둥절했다.
김산하가 그에게 확실히 상황을 인지시켜 주었다.
“네가 내 동생인 걸 천만다행인 줄 알아. 당연히 그런 나부랭이들하고 조대찬이 있으면 조대찬한테 붙어야지.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네.”
“어째서……?”
“조대찬 저게 얼마나 요물인 줄 알아? 눈 깜짝할 사이에 코는 물론이고 모가지까지 따 가는 놈이야, 저거.”
대찬이 급히 김산하의 말을 부정했다.
“김산호 씨, 거짓말입니다.”
“흥, 거짓말이기는! 대학 시절에 저 손에 갈려 나간 선배만 몇인 줄 알아? 유백기, 탁형원, 백지훈…….”
“그건 그 사람들이 잘못한 거고.”
“암요, 어련하실까. 잘잘못을 떠나서 네 손으로 그 사람들 쫓아낸 건 맞잖아?”
“그래. 엄밀히 틀린 말은 아니지.”
대찬은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
김산호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회사에 들어와서도 상사 몇 사람을 갈아 마셨다고 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이 허언이 아니었음이 김산하의 입을 통해 증명되었다.
김산호는 침을 꼴깍 삼켰다.
술기운이 대번에 날아갔다.
김산하는 잔에 꼴꼴 소주를 따르며 웃었다.
“황 대린가 뭔가 하는 놈도 웃기다. 승진하고 싶으면 조대찬 꽁무니를 물어야지, 반대로 견제를 하려고 드네. 이래서 사람이 주제를 알아야 해요.”
“그 양반 지금까지 나한테 대하는 본새로 봐서는 그러고도 남겠다 싶기는 하지만.”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김산호가 대찬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누나의 친구면 형님이 아닐까요.”
김산호의 얼굴은 비장했다.
김산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동생이야. 눈치 하나는 빨라.”
김산호는 대찬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황 대리 말하는 게 사짜 같긴 했어요. 저도 겉으로만 동조했지, 속으로는 쌍욕을 했답니다. 형님이 나중에 황 대리 뺨이라도 때리라면 때릴게요.”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무슨 오야붕이에요?”
“제 충성심이 이 정도라는 걸 강조한 겁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시죠.”
옆에서 보던 김산하는 큭큭 웃으며 보조를 맞췄다.
“그래. 사석에서는 내 동생이잖아.”
대찬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그럴까.”
“예. 말씀 낮추세요, 형님.”
자리는 그렇게 의기투합하는 것으로 끝났다.
대찬은 남매를 택시에 태웠다.
그 전에 김산호의 어깨를 잡고 당부했다.
“회사에서는 절대 티 내지 마. 그냥 계속 황 대리랑 지내던 것처럼 지내. 알았지?”
“알겠습니다, 형님. 일종의 스파이 역할을 하는 건가요, 제가?”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나랑 가까운 거 티내봤자 황 대리 욕받이밖에 더 되겠어? 겸사겸사 황 대리 꿍꿍이도 들을 겸.”
“네! 걱정 붙들어 매십쇼.”
대찬은 김산호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