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6화
갑자기 소문의 진원지로 지목되었음에도 이동수 본부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순서가 올 줄 알았다는 듯 마이크를 받아 말했다.
“맞습니다. 제가 그 소문을 직원들에게 알렸습니다.”
김태준 사장이 이동수 본부장에게 말했다.
“소문을 함부로 옮기는 건 임원으로서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근거 없는 헛소문이었다면 저도 묵살했겠지요. 그런데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은 소문이라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
김태준의 물음에 이동수의 시선이 자연히 누군가에게로 향했다.
박만섭 부사장이었다.
그는 이동수의 시선, 그리고 그것에 따라오는 김태준 사장과 전 직원의 시선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동수의 입이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박만섭 부사장님께서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그게……!”
박만섭은 기겁했다.
김태준 사장은 다리를 꼬고 박만섭에게 물었다.
“부사장,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저는…….”
“부사장, 똑바로 말하세요.”
“…….”
김태준 사장은 사람을 죽일 듯한 눈빛을 쐈다.
박만섭의 숨이 가빠졌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박만섭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놀란 토끼눈을 뜬 채로 가빠 오는 호흡만 내뱉었다.
김태준 사장은 토끼 따위는 한입에 먹어 치울 듯한 사자의 고함을 내질렀다.
“부사장!”
“사, 사장님이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완전히 코너에 몰린 박만섭 부사장도 이판사판이었다.
그는 꽥 소리를 지르며 소문의 진원지로 김태준 사장을 지목했다.
김태준 사장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뭐요?”
“사장… 사장님이 법무팀장과 그런 얘기를 의논하는 걸 들었습니다!”
박만섭의 말에 김태준 사장은 코웃음을 쳤다.
“장난합니까?”
“제 귀로 똑똑히 들었다니까요!”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닙니다.”
“사, 사장님이야말로 발뺌하지 마세요!”
“목격한 사실을 똑바로 말씀해 보시죠. 언제, 어디서 들었습니까?”
“다, 닷새 전 오전…….”
김태준 사장은 즉시 최 비서에게 방문자 명부를 가져오게 했다.
“닷새 전 오전, 임원 회의가 열리기 전 사장실을 방문한 사람은 내 고향 친구 하나뿐이에요. 법무팀장의 방문 기록은 없습니다.”
그는 즉석에서 CCTV 화면까지 공수해 큰 화면으로 띄웠다.
박만섭이 특정한 시간에 법무팀장의 모습이 포착되지 않았다.
철두철미한 김태준 사장은 법무팀장에게 전화까지 걸었다.
마이크를 장착해 법무팀장의 목소리를 전 사원이 듣도록 했다.
“법무팀장, 나 필래마트 김태준입니다.”
“네,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웬일로 전화를 다…….”
닷새 전에 만났다면 오랜만입니다, 웬일로, 따위의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박만섭 부사장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하시죠.”
“닷새 전 오전, 뭘 하고 있었습니까?”
“예? 하하,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을…….”
“중요한 일이라, 정확한 대답을 부탁해요.”
잠깐 침묵하던 법무팀장이 대답했다.
“지금 업무 일지 확인해 보니 회장님과 인도네시아 식품 기업 인수 건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오후에는 오찬을 겸해서 법원 선배님들하고 회동했고요.”
“아, 그래요? 날 만나진 않았지요?”
법무팀장의 입장에서 김태준 사장의 질문은 엉뚱했다.
그는 싱겁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필요한 질문이라 드린 겁니다. 쉬십시오.”
“네, 들어가십시오. 언제 한번 자리 마련해 주십시오. 오랜만에 소주 한잔하고 싶군요.”
“그럽시다.”
뚝, 전화가 끊겼다.
그 순간 좌중의 시선은 박만섭 부사장에게로 쏠렸다.
박만섭 부사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모든 정황은 그에게 불리했다.
김태준 사장은 노기를 억누르며 말했다.
“부사장,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성 2가지가 뭔 줄 알아요?”
“아으…….”
소설이고 나발이고 박만섭 부사장의 넋은 아예 나가 버린 상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태준 사장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허구성과 개연성이에요. 그런데 당신의 소설은 허구성은 있는데 개연성, 즉 그럴듯함이 결여돼 있네요.”
“…….”
김태준 사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당신보다는 소설 쓰기에 능한 거 같습니다. 내가 소설 한번 써 볼까요?”
“…….”
“당신은 야심가입니다. 부사장 자리에 만족하지 않죠. 하지만 이대로 쭉 가면 부사장에서 커리어가 쫑 날 거 같습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거든.”
김태준 사장은 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계획을 짭니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을 등에 업고 바람을 일으켜 보겠다고. 그래서 이런 헛소문을 퍼트려 나를 코너로 몰아넣는 겁니다.”
“저, 절대 그럴 리가!”
“하마터면 당신한테 당해 버릴 뻔했어요. 만약 내가 불명예스럽게 퇴진하면 당신은 적어도 사장 대행이라도 했겠죠.”
“사실이 아닙니다!”
“네네, 사실이 아닙니다. 말했잖아요, 소설이라니까. 그래도 내 작품이 당신 졸작보다는 낫지 않아요? 그럴듯하잖아.”
박만섭 부사장은 천 길 낭떠러지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의 주장에는 어떤 설득력도 없었다.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 해도 편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밀어붙여 볼 텐데, 그의 편에 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김태준 사장은 몸을 일으키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회의를 더 진행할 의미가 없겠군요. 이만 파하죠.”
그의 말에 직원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태준 사장은 다시 한 번 서원웅을 치켜세우는 걸 잊지 않았다.
“끝이 개운하진 않지만 여러분은 스스로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팍팍한 요즘 볼 수 없는 동료애와 용기를 확인했으니까요.”
그걸로 회의는 끝났다.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사무실로 복귀하는 직원들은 충격의 연속에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다.
대찬은 서원웅의 어깨를 주무르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잘했어.”
“다리 후들거려서 죽는 줄 알았어.”
서원웅의 이마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런 거치고는 당당하던걸.”
서원웅은 멋쩍은 웃음을 대찬에게 보일 뿐,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강당에서 우르르 빠져나가는 인파 속에서 허운과 유채경이 다가왔다.
허운이 킬킬거리며 서원웅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와, 서원웅 대리님, 완전 무슨 만화 주인공인 줄 알았어요.”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진짜!”
유채경도 웃으면서 거들었다.
“다시 봤어요, 서 대리님.”
“사실 찌질하게 보일까 봐 어제 밤잠 설쳐 가면서 거울 앞에서 연습했어요…….”
“크! 역시 연습은 배신하지 않는다니까.”
허운은 치켜세운 엄지를 서원웅의 눈 가까이에 들이댔다.
서원웅은 허운의 성가신 엄지를 손등으로 툭 쳐 냈다.
이렇듯 직원들 사이에서 서원웅의 행동이 회자되었지만, 그것보다도 박만섭 부사장의 이름이 더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그야말로 충격이라는 반응이었다.
직원들은 박만섭 부사장의 주장에 거짓의 낙인을 찍었다.
김태준 사장의 소설을 신뢰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소설이 더 개연성 있었다.
대찬은 강당을 빠져나오면서 아무도 못 보는 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방지고 과감하고 파격적이라고 평가받았던 그의 진언이 무사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사장실로 돌아온 김태준 사장은 서청수 회장과 통화했다.
김태준 사장은 오랜 세월 충성을 다해 온 심복이었다. 그래서 사적인 친분도 매우 두터웠다.
“회장님, 전체 직원 회의 끝났습니다.”
“어떻게 됐나?”
서청수의 목소리는 다소 흥분되어 있었다.
“말씀드린 대로 됐습니다.”
“재밌군.”
“박만섭이 조금 더 압박해서 사표 받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뭘 그러나. 자네는 너무 잔인해서 탈이야. 알아서 사표 낼 테니 기다려 보게.”
서청수의 만류에 김태준은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아무튼 조대찬 그 친구, 재밌지?”
“예. 뭐, 젊은 치기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회장님 안목은 역시 탁월하십니다.”
“거봐, 쓸 만하다고 했잖아. 앞으로 잘 써먹으라고.”
“알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서청수 회장과 통화를 마치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지금까지의 상황은 모두 대찬의 계획이었다.
전보된 직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박만섭 부사장을 제물로 삼자고 제안했다.
그가 필연적으로 거짓 정보를 엿듣고, 필연적으로 소문을 퍼트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박만섭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게 만들어 월드몰 출신들을 동요하게 한다.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월드몰 출신도 아닌 서원웅이 용기 있게 나서게 한다.
이로써 필래 출신과 월드몰 출신 사이 감정의 골을 메운다.
두 집단의 반목을 잠재우는 게 1차적인 목적이었다.
하지만 대찬의 제안은 본래 목적보다도 큰 부산물을 김태준 사장에게 안겨 주었다.
서원웅이 그룹 내에서 존재감을 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김태준 사장과 대찬이 동시에 바라는 일이었다.
김태준 사장은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과 앙숙이고, 서청수 회장의 충직한 심복이었다.
당연히 서원웅에게 호의적이었다.
서청수의 뜻이 이뤄지는 걸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그런 만큼 서원웅의 뚜렷한 성장은 김태준 사장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자리는 서원웅이 날개를 펴기에 더없이 좋았다.
이미 대찬과 김태준 사장이 짜 놓은 판이라 안전이 보장되어 있고, 새로 필래그룹의 일원이 된 월드몰 출신 직원들의 지지를 얻는 길이었다.
또 이 일이 그룹 안팎으로 퍼져 나가면 서원웅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리며 그의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서원웅이 쓸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고, 조대찬도 쓸 만하다는 걸 알았다.”
김태준 사장은 씩 웃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김태준 사장과 대찬은 촘촘한 그물을 쳤다.
법무팀장이 아니라 법무팀장으로 오해하도록 목소리가 비슷한 고향 친구를 굳이 상경시켰다.
또 이동수 해외영업본부장을 포섭했다.
물론 그에게는 옛 동료를 배신하는 대가로 부사장 자리를 약속했다.
김태준 사장은 정리 대상을 운운할 때 자연스럽게 이동수 본부장의 이름을 끼워 넣었고, 이 방법이 주효하게 먹혔다.
이동수 본부장 역시 능숙하게 박만섭을 함정으로 밀어 넣었다.
“20대 대가리가 아니야. 이렇게 능숙하고 야비할 수가 없어, 20대 대가리가…….”
꽤 괜찮은 소설가라고 자부하던 김태준 사장이지만, 대찬이 주민등록상으로는 20대지만 실상은 50줄에 가까워지는 정신연령의 소유자라는 소설만큼은 쓰지 못했다.
박만섭 부사장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사표는 즉각 수리되었다.
부사장 자리를 한시도 공석으로 둘 수 없다며, 김태준 사장은 이동수 본부장을 즉각 부사장으로 영전시키고 상생경영본부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박만섭은 불명예 퇴장했다.
퇴임식처럼 거창한 행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대찬은 멀찍이 그의 마지막 퇴근을 보면서 생각했다.
‘너무 섭섭해할 거 없어요. 다 그런 거지.’
박만섭이 김태준 사장에게 건의서를 전달하는 일을 대찬에게 떠넘기지 않았으면 그는 계속 부사장 자리를 보존했으리라.
때로는 비겁의 대가가 용기의 대가보다 비싼 법이었다.
전보된 직원들과 월드몰 출신 직원들 사이의 악감정이 말끔히 치유되진 않았다.
하지만 서원웅의 일갈 이후로 정도가 훨씬 덜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근 며칠간 대찬에게 서원웅의 얘기를 했다.
“야, 그야말로 젊은이의 패기 그 자체였다니까. 대단했어.”
“그렇죠? 저도 의외였어요. 평소에 비실비실하던 친구가.”
대찬은 모르는 척 잡아떼며 서원웅을 칭찬하는 송 과장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왕년의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았다니까. 아, 나도 한때는 저런 패기가 있었는데.”
“아, 그래요……?”
그럴 리가.
대찬은 물론 그 말을 듣는 전략기획실 직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말을 아꼈다.
김태준 사장은 며칠 후 지시사항을 전 부서에 하달했다.
업무 처리 매뉴얼을 다시 수정하라는 게 첫 번째였다.
그리고 전보된 직원들과 월드몰 출신 직원들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될 수 있는 행동은 적극적으로 자제하라는 것이 두 번째였다.
평소 같았으면 직원들은 콧방귀를 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원웅의 일이 있고 난 뒤라 직원들은 성의껏 사장의 지시를 준수했다.
그 전에 대찬이 담배를 물고 옥상에 올라갈 때면, 허운이 항상 우거지상을 하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그런 허운도 이제는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밝아진 표정이 대찬의 마음에도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