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5화
“그럼 너는 이번 일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해.”
“일이 잘못되면 크게 다칠 수 있어. 나뿐만 아니라 너까지.”
“원래 큰 고기는 깊은 바다에 사는 거야. 리스크는 감수해야지.”
서원웅은 말없이 대찬을 응시했다.
대찬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처음 만날 때 기억해?”
“일진들이 날 죽일 듯이 몰아세울 때 네가 도와줬지.”
한참 된 얘기지만 서원웅은 당시의 기억이 또렷했다.
둘 사이에 맺어진 인연의 타래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찬은 그때부터 서원웅의 은인이었다.
“내가 특별히 남한테 관심이나 연민이 많아서 도운 게 아니야.”
“알고 있어.”
“단지 그때는 마강국의 성질을 긁고 싶었던 거뿐이었어.”
“응.”
“그러니까… 내가 너더러 월드몰 출신 직원들을 도우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야.”
“그 사람들이 좋아서 돕는 게 아니라 나한테 기회이기 때문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확실히 기회가 될 거야.”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먼저 비상구를 떠났다.
서원웅은 한참 서서 무언가를 고심했다.
퇴근길, 대찬은 지하에 주차된 부사장의 차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퇴근 시간을 조금 넘겨서야 박만섭 부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찬은 그에게 접근했다.
“부사장님.”
“어, 조 대리, 무슨 일이지?”
박만섭 부사장의 얼굴은 며칠 새 많이 야위어 있었다.
낯빛도 좋지 않았다.
“요즘 고심이 많으시죠.”
“당연하지! 젠장할… 회사에 충성했는데 이렇게 버려질 줄이야.”
박만섭이 충성을 해?
대찬은 면전에 대고 폭소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찬은 은밀히 박만섭 부사장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위에 보는 눈이 있어서…….”
“그래? 일단 차에 타게.”
박만섭 부사장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 재기발랄한 대리가 자신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지체 없이 품었다.
대찬은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박만섭 부사장과 대찬은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
부사장의 차는 나선형의 도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 회사에서 제법 멀어지고 나서야 박만섭이 물었다.
“할 말이 뭔가?”
“파괴력 있는 대표자가 없는 게 고민이실 겁니다.”
“…뭐라고?”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오는 대찬의 말에 박만섭은 눈을 껌뻑거렸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 그리고 부사장님과 해외영업본부장님까지. 목소리들은 충분히 모이지 않았습니까?”
“그러긴 했지.”
“그런데 그 목소리를 모아 대표로 말해 줄 스피커, 그게 없지 않습니까?”
그제야 감을 잡은 박만섭 부사장이 무릎을 탁 쳤다.
“맞아. 물론 나랑 이동수 본부장이 임원으로 있긴 하지만 나서기 껄끄럽지.”
“부사장님과 본부장님은 월드몰 직원들의 문제랑 한 세트로 묶이긴 했지만, 성격은 아예 다르니까요.”
박만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한테 그 사람들을 대표할 자격은 없어. 직급은 충분하지만.”
“그래서 한 사람 추천해 드리려고요.”
“추천이라니, 누굴?”
박만섭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서원웅 대리요.”
“서, 서원웅 대리……?”
박만섭 부사장으로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던 이름이었다.
“네. 서원웅 대리가 적격입니다.”
“어째서?”
“일단 회장님 아들이니까 일개 대리보다는 훨씬 파괴력이 있고요.”
“응.”
박만섭은 대찬의 말에 집중했다.
“그런 동시에 실무자급 직원이기 때문에 더 호소력을 갖출 수 있죠.”
“그런데 서 대리는 월드몰 출신이 아니잖나?”
“네. 그렇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죠.”
박만섭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지?”
“제3자가 목소리를 내면 그 사안은 객관성을 얻습니다. 그룹 수뇌부에서도 월드몰 출신들의 단순한 생떼라고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박만섭은 대찬의 주장에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한 가지 개운치 않은 지점이 있었다.
“말이야 다 좋지만, 서 대리가 하려고 할까? 리스크가 분명한데.”
“할 겁니다. 제가 설득했습니다.”
“그, 그래?”
“서 대리도 이쯤에서 한번 존재감을 발휘해 줘야 회장님께서도 다시 보실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지.”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일이니 주저할 게 뭐 있겠습니까? 부사장님이 판만 깔아 주시면 일은 일사천리로 풀릴 겁니다.”
대찬의 명쾌한 말에 박만섭은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찬을 집까지 친히 바래다주었다.
박만섭은 열과 성을 다해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자신의 안위가 걸린 일이었다.
무대는 분기마다 열리는 전체 직원 회의였다.
물론 말이 좋아 전체 직원 회의였다.
사실상 임원들만 발언권을 가졌다. 실무자급 직원들은 학생처럼 강당에 앉아 회의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다.
박만섭은 부사장의 권한으로 그 자리에서 서원웅이 발언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번 회의에서 실무자급 직원들 중 발언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부사장의 말에 좌중이 웅성거렸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배짱이 없었다.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장과 맞먹으려 든다면 어떤 보복이 가해질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어수선하게 웅성거릴 뿐 손을 들지 않는 가운데, 누군가 번쩍 손을 들었다.
서원웅이었다.
박만섭 부사장은 직원들이 깨알처럼 모여 있는 강당에서 서원웅을 명시적으로 지목했다.
“어, 거기.”
그가 서원웅을 지목하자 좌중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서원웅의 옆에 앉은 대찬은 그의 손을 한번 꾹 잡았다가 놓았다.
그에게 마이크가 전달되었다.
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서원웅은 결연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김태준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삐딱하게 앉아 씩 웃었다.
그 웃음에 서원웅의 허리가 꼿꼿이 섰다.
“전략기획실 서원웅 대리입니다. 사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자 김태준 사장에게도 마이크가 전달되었다.
“말씀하세요.”
박만섭 부사장은 흘끔흘끔 곁눈질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김태준 사장은 별로 당황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횡행하는 소문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소문이라니?”
“월드몰 출신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한다는 소문입니다.”
“으응?”
김태준 사장은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서원웅의 발언이 당황스러웠다.
이해 당사자도 아닌 그가 이 문제를 앞장서 말할 줄은 몰랐다.
서원웅은 부사장의 민원도 언급했다.
“아울러 이 기회에 박만섭 부사장님과 이동수 본부장님을 회사에서 내치려고 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옳지, 잘한다!’
박만섭 부사장은 속으로 싱글벙글이었다.
서원웅의 목에 힘이 더 들어갔다.
“만약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저는 회사를 더 못 다닐 거 같습니다.”
그 말에 월드몰 출신 직원들의 가슴이 뜨끔했다.
자신들은 회사를 더 못 다니게 될까 봐 나서서 발언하지 못했다.
그런데 서원웅은 남의 일에 굳이 나서서 회사를 못 다니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다.
서원웅은 거침없이 발언을 이어 갔다.
“사측은 월드몰을 인수하면서 완전한 고용 승계를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건 필래마트 구성원 전부를 욕보이는 겁니다.”
“허허…….”
김태준 사장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 주십시오. 월드몰 직원들에 대한 임금 삭감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회사 관두겠습니다.”
“서 대리…….”
“그리고 회사의 이런 추태를 알리고, 고치기 위해 미력하나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 겁니다!”
“잠깐, 내 말 좀…….”
서원웅의 목소리는 선천적으로 유약했다.
그러나 결기와 의지만큼은 뚜렷했다.
“만약 아니라면 아니라고 해 주십시오. 우리 동료들은 밥벌이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기백 있네.’
대찬은 서원웅의 다부진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으로 김태준 사장에게 요구했다.
당당한 풍모였다.
대찬은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공을 넘겨받은 김태준 사장은 웃음만 머금을 뿐, 한동안 침묵했다.
직원들은 서원웅의 뜻밖의 면모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면서도 찡한 마음이었다.
그간 전보된 직원들과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을 쌓아 두고 반목했다.
다수파인 월드몰 출신들은 은근히 그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피해자라면 피해자일 수 있는 서원웅은 도리어 명운까지 걸고 자신들을 두호하고 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들의 마음에 번졌다.
그러고는 긴장 속에서 사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김태준 사장은 잠깐 마이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서원웅을 응시했다.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온 직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서 대리가 용기 있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김태준 사장이 잠깐 말을 쉬는 사이에 꼴깍, 꼴깍 직원들의 침 삼키는 소리가 공백을 메웠다.
“답변을 드리죠. 저도 직원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떠도는 것은 보고받았습니다만, 이렇게 사태가 심각한 줄은 몰랐습니다. 미안합니다.”
김태준 사장은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처럼 직원들은 느껴졌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거두절미하고 사실만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현재 월드몰 출신 직원들에 대한 임금 조정 논의는 이뤄지고 있지 않으며, 완전한 고용 승계는 약속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 말에 직원들이 앉은 쪽에서 잠깐의 소란이 일었다.
사장이 공식적으로 임금 삭감에 대한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것이 급조된 대답이든, 아니면 그의 말대로 애초부터 논의되지 않았든 임금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뱉은 말을 번복했다가는 전방위적인 비난에 휩싸일 것이다.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열광하고 싶은 욕구를 꾹 억눌렀다.
단지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발로 흥겨운 스텝을 밟는 정도로 기쁨을 표했다.
김태준 사장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서원웅 대리.”
“네, 사장님.”
“잘했습니다.”
“…….”
김태준 사장은 직원들을 죽 둘러보며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우리 필래마트 직원들이 정말 똘똘 뭉쳐 있구나, 단순한 직장 동료가 아니라 서로를 사우로 여기고 있구나, 그걸 확인하고 감동했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계속 일장연설을 이어 갔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런 화합과 결속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못 해내겠습니까? 서원웅 대리, 고맙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는 일부러 꽤 많은 품을 들여 서원웅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쪼였다.
사장이 그를 띄워 주자 직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이건 자신들의 밥그릇이 안전하다는 걸, 제 밥그릇을 걸고 확인시켜 준 동료에 대한 진심 어린 박수였다.
대찬도 힘차게 손뼉을 쳤다.
그 순간 대찬과 김태준 사장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둘 다 웃는 낯이었다.
서원웅을 충분히 띄운 김태준 사장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서원웅 대리, 그런데 그 소문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게, 사내에 파다하게…….”
“소문의 진원지가 있을 거 아닙니까.”
김태준 사장의 질문에 대찬이 나섰다.
대찬이 서원웅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전략기획실 조대찬 대리입니다. 제가 대신 답변해도 되겠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죠.”
“이동수 해외영업본부장께서 이런 내용을 월드몰 출신 사우들께 전달한 걸로 들었습니다.”
이제 시선은 이동수 본부장에게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