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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11화 (110/556)

난 할 수 있어 111화

대찬은 당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홍은주를 보고 말했다.

“은주 씨, 점심 같이 먹어요.”

“아, 저는…….”

“우리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주변에 어디가 맛있는지 몰라요. 은주 씨가 좀 도와줘요.”

대찬의 말에 홍은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따랐다.

그렇게 송희근 과장을 필두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중간에 누군가가 송희근 과장을 불렀다.

“송 과장님!”

“어, 장 대리.”

장 대리는 필래홈쇼핑에서 전보된 직원으로, 송희근 과장과 안면이 있었다.

그는 송 과장에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지금 서명운동 하고 있어요.”

“뭐? 서명운동?”

장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부사장님을 뵙고 왔거든요.”

“부사장님을?”

대찬은 만몽에게 들어 김태준 사장에 대한 정보는 어렴풋이 알았지만, 부사장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다만, 알고 있는 건 그가 필래유통에서 상무를 지냈고, 김태준 사장의 취임과 동시에 부사장에 취임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예. 지금 일에 대해 사장님께 건의 좀 드리라고 말씀을 올렸습니다. 그래도 우리 필래 출신 중에서는 사장님을 빼고 가장 발언권이 강한 분이시니까요.”

“응, 그런데?”

“저희더러 서명을 받아 오랍니다.”

그 말에 일동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부사장이 사장한테 건의하는데 서명씩이나 필요합니까?”

장 대리가 한태윤 과장의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그거 말하는 게 뭐 어렵다고 서명을 받아 오라고 하시는지!”

대찬은 김태준 사장의 취임사를 떠올렸다.

‘상명하복, 현명한 보스를 전제했을 때 가장 훌륭한 시스템입니다. 저는 스스로 현명한 보스라고 자부합니다.’

‘말은 물입니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 말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여러분의 말이 역류하는 걸 나는 싫어합니다.’

이런 김태준 사장의 성질을 잘 아는 부사장이 그런 제언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 역할도 못하면 책상 위에 부사장 명패는 뭐 하러 올려놨어?’

대찬은 가슴 위에 돌덩이를 올려놓은 듯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장 대리는 여전히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부사장님께 드리려고 지금 서명 받는 중입니다. 기획실 분들도 동참해 주실 거죠?”

장 대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를 건넸다.

김영우 차장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만으로 송희근 과장이 서명에 동참할 이유는 충분했다.

그는 갈기듯 사인을 하고, 한태윤 과장에게 서류를 넘겼다.

차분한 성품의 그 역시 불만이 많은지 군말 없이 서명에 응했다.

이제 다음은 대찬의 차례였다.

대찬 역시 서명을 하려다 멈칫했다.

‘서명이 잘하는 일일까.’

대찬 자신은 차치하더라도 서원웅이 서명에 동참하는 게 잘하는 일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머뭇거리는 대찬을 보고 장 대리가 눈총을 쐈다.

“조 대리님?”

“아, 네, 서명하겠습니다. 제 것도 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한 서명도 제가 받겠습니다.”

뜬금없는 배려에 장 대리의 눈이 커졌다.

“네?”

“장 대리님 그동안 수고하셨잖아요. 혼자서 고군분투하시는데 어떻게 안 도와 드려요, 같은 필래 출신끼리. 그렇죠?”

“아, 하하, 서명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렇게 제 걱정까지 해 주시다니.”

“제가 서명 받아서 송 과장님과 함께 부사장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중간 관리자 직급에서는 송 과장님이 최고참이시니까, 송 과장님이 배석하시는 게 더 효과적일 거예요.”

뜬금없이 엮인 송희근 과장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내, 내가?”

“네. 과장님이 또 할 땐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송희근 과장은 장 대리의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하… 하하, 그렇지?”

장 대리는 웃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합니다, 송 과장님! 조 대리님,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지금까지 수고 많으셨어요, 장 대리님.”

장 대리는 가뿐한 얼굴로 떠났다.

송희근 과장은 미간을 좁히면서 대찬을 바라봤다.

“굳이 이 귀찮은 걸 뭐 하러 떠맡아?”

“장 대리가 그래도 고생했잖아요. 나중에 부사장님께만 동행해 주세요. 나머지 서명은 제가 받을게요.”

“에휴, 암튼 일 벌이는 건 조 대리가 일등이다, 일등.”

“뭐든 일등 하면 좋죠.”

대찬은 넉살 좋게 웃고는 얼른 점심 식사를 하러 가자며 송희근 과장의 등을 떠밀었다.

대찬은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다른 이들의 서명을 받지 않았다.

본인의 서명도 하지 않은 참이었다.

서원웅은 미완성의 서명부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왜 서명 안 받아?”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여기에 서명하는 건 나중에 독이 될 거 같아서.”

“왜?”

“네가 임원까지 올라가는 건 금방이야. 그럼 구 월드몰 출신들까지 다 아울러야 하잖아. 이 사소한 서명에 발목 잡힐 수도 있어.”

“근데 장 대리님한테 하겠다고 해 놓고 안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

“그래서 지금 엉거주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이야.”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끙끙 앓느니 까짓것 서명해 버리자.”

“좋아. 나는 할게. 일단 너는 하지 말고 놔둬.”

다음 날, 대찬은 서원웅을 제외한 모든 필래 출신 직원들에게서 전부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송희근 과장에게 귀띔했다.

“부사장님하고 일정 좀 잡아 주세요, 과장님.”

“아유, 무서워라.”

“그냥 자리만 지켜 주세요.”

송희근 과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조 대리만 믿는다?”

“옙, 과장님.”

점심시간 이후 한산한 오후에 부사장실로 오라는 연락이 떨어졌다.

대찬은 송희근 과장과 함께 부사장실에 들어갔다.

둘은 부사장을 보자마자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어… 앉아요.”

부사장은 송희근 과장보다도 유약한 인상이었다.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좀 큰 모기가 주위에 날아다니면 뭐라 말하는지 제대로 분간을 못할 것만 같았다.

부사장은 송희근 과장과 대찬의 방문이 썩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장 대리에게 서명을 받아 오라고 하면서도 내심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느냐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웬걸, 서명까지 떡하니 받아 왔다.

더군다나 대리가 아니라 고참 과장이 와서 이러고 앉아 있다.

그러니 부사장으로서는 내키지 않았다.

송희근 과장은 약속한 대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찬이 그를 대변했다.

“부사장님, 직원들 불만이 많습니다.”

“그거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이렇게 서명까지 할 정도로 전보된 직원들이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사장님이 나서서 사장님께 고언을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야 얼마든지 그러고 싶지.”

‘그럼 그렇게 좀 하라고.’

대찬의 속에서 불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부사장은 한숨을 쉬며 푸념조로 말했다.

“그런데 난 사장님을 잘 알아. 이런 식으로 항의하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

“그래도 이대로 직원들의 의견을 묵살해서도 안 됩니다.”

“아, 그거야 그런데, 거참…….”

“물론 부사장님께도 부담이 될 만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부사장님 아니고서는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부사장은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책상에 올려진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였다.

“이거, 장 대리가 나를 찾아와서 사장님께 전해 달라던 건의서네.”

“건의서요?”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읽어 봐.”

송희근 과장과 대찬은 부사장에게서 건의서를 넘겨받아 읽었다.

건의서를 읽어 내려갈수록 송희근 과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만큼 건의서는 거친 문체로 돼 있었다.

문체만으로 작성자를 상상해 본다면, 백발을 풀어헤치고 눈이 반쯤은 회까닥 돌아간 노인이 썼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필래 출신 직원들의 불만이 심하다는 방증이었다.

얌전한 부분은 ‘존경하는 사장님’으로 시작하는 서두뿐이었다.

그다음으로는 감정 분출의 연속이었다.

-월드몰과의 물리적 결합은 이뤘지만 화학적 통합은 이루지 못했다.

-누가 터줏대감인지 알 수가 없다.

-월드몰이 필래마트를 인수했다는 게 차라리 맞겠다.

-전보된 직원들은 극한의 외로움과 투쟁하고 있다.

-옆자리 직원 사이에 놓인 파티션이 통곡의 벽처럼 느껴진다.

구구절절한 분노와 읍소가 이어졌다.

김태준 사장이 이걸 본다면 문자 그대로 뚜껑이 열릴 것이다.

부사장은 그걸 상상했는지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이걸 어떻게 사장님께 보여 드리나? 에그, 생각만 해도 오줌이 찔끔 나온다니까.”

“하지만 부사장님…….”

부사장은 잠깐 무언가를 고심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렇게 하면 되겠군?”

“예?”

“내가 사장님과의 자리를 마련해 보지.”

송희근 과장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그래서요?”

“그 자리에서 자네가 사장님께 직접 이 건의서랑 서명부를 전달하는 게 어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송희근 과장과 대찬은 부사장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 얼어붙었다.

김태준 사장 앞에서는 부사장도 벌벌 떤다.

그런데 하룻강아지에 불과한 과장과 대리일 뿐이다.

무슨 수로 그 앞에 저 자극적인 필치의 건의서를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게다가 늙은 생쥐가 제 안위를 두려워해 갓 난 생쥐에게 떠넘긴다.

송희근 과장과 대찬은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부사장은 그걸 자신의 허를 찌르는 일침 때문이라고 여겼는지 실실 웃었다.

“그래. 원래 이런 건 실무자급에서 나와야 오히려 약발이 있다니까? 응? 그런 거 있잖아. 아래로부터의 혁명, 바텀 업!”

“부사장님 말씀도 일리는 있지만…….”

“어허,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될 걸 왜 말이 길어지나?”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던 대찬의 목소리가 튀었다.

“부사장님도 그렇게 껄끄러워하시는 사장님을 저희가 단독으로 어떻게 설득하겠습니까?”

“뭐야? 역지사지해 봐. 남의 등 떠밀 때는 당당하더니 자네들한테 시키니까 꺼리는군.”

“제가 부사장님만큼의 발언권이 있으면 제 발로 나섰을 겁니다. 부사장님만큼 월급을 받으면 그만큼의 책임감을 가졌을 겁니다.”

그 말에 부사장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말은, 내가 무책임한 사람이란 뜻인가?”

“직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잘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책임을 일개 과장, 대리한테 떠넘기려고 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새파랗게 어린 놈이 못하는 말이 없어!”

부사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씩씩거렸다.

씩씩거리는 소리도 기백이 느껴지기보다는 병자의 호흡처럼 유약했다.

송희근 과장은 아찔해진 표정으로 대찬의 어깨를 잡았다.

“조 대리, 왜 이래! 부사장님께 이게 무슨 무례야!”

송희근 과장의 만류에 대찬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고는 부사장을 향해 허리를 꺾었다.

“죄송합니다, 부사장님. 무례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 얼굴에 똥물 끼얹어놓고 죄송하다면 다인가?”

부사장은 유약한 사람이었다.

유약한 사람도 종류가 있다.

진짜로 유약한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유약한 사람.

어쩔 수 없이 유약한 사람은 천성이 유약하지 않다.

대부분의 상대보다 기세가 약해서 미리 고개를 숙이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드문 확률로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 유약하지 않다.

사납고 흉악하다.

드물게 만나는 사나워질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목덜미를 물고 상대가 완전히 녹다운 될 때까지 사나워짐을 즐긴다.

지금 부사장이 그랬다.

“죄송합니다.”

“듣기 싫어. 죄송한 줄 알면 내 뜻에 따라. 사장님과 일정 잡을 테니 자네가 직접, 직원들의 뜻을 전하도록 해.”

대찬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송희근 과장이 슬쩍 대찬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네가 졌다는 뜻이었다.

대찬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사장과 대리의 거리는 잠깐의 기백이나 쇼맨십으로 메울 만큼 가깝지 않았다.

대찬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겠습니다.”

“진즉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나. 이게 뭐야, 괜히 분위기만 삭막해지고.”

부사장은 고개를 떨어뜨린 대찬의 뒤통수를 한참 관람했다.

그는 진정으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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