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10화
서청수 회장은 이와 동시에 필래마트를 별개의 독립 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전무 직급이었던 김태준 대표도 사장으로 승진했다.
구 월드몰의 16개 점포 역시 이에 맞춰 전면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그렇게 필래마트는 월드몰의 옛 모습을 씻고 모든 것을 혁신하고자 했다.
그런데 겉은 쉽게 바뀌지만 속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전략기획실은 서청수 회장의 파격적인 조치로 직원의 비율이 1 대 1이었지만, 전략기획실을 벗어나면 상황은 퍽 달랐다.
구 월드몰의 직원이 100퍼센트 고용 승계가 된 상황이었다.
그에 반해 필래그룹 출신은 흥읍점에 근무하던 일부 인원과 이곳저곳의 계열사에서 전보된 인원이 전부였다.
그러니 겉은 필래마튼데 돌아가는 사정이나 시스템은 월드몰의 기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구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월드몰에서의 룰과 용어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굳이 악의가 없어도 워낙 익숙하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김산호 씨, 월넷에 공지 글 올렸어?”
“네, 올렸습니다.”
황 대리와 김산호는 그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대찬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김산호에게 조용히 물었다.
“김산호 씨, 월넷이 뭐예요?”
“아, 저희 사내 인트라넷 있잖아요.”
“인트라넷을 월넷이라고도 해요?”
대찬의 물음에 김산호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건 아니고… 저희 월드몰에 있을 때 인트라넷 이름이 월넷이었거든요.”
“…아.”
“쓰지 말아야 하는데 이게 참, 입에 붙어서…….”
“알았어요.”
대찬은 그렇게만 이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식의 경우가 하루에도 십 수 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필래 출신 직원들은 모두 이런 애로사항을 호소했다.
사소하게 참고 넘어갈 만하면 또 비슷한 상황이 닥치니 사소해도 사소하지 않았다.
“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여기가 월드몰이야? 그렇게 월드몰이 좋으면 월드몰 도망갈 때 짐 싸서 미국으로 따라가지 그랬냐고.”
“살판났지, 살판났어. 다 죽어 가는 놈들 건져 줬더니 안방 차지하고. 시팔.”
필래 출신 직원들이 모였다 하면 이런 식의 불평불만이 쏟아졌다.
대찬과 흡연실에서 마주친 한 과장도 난처한 표정으로 대찬에게 말했다.
“요즘 우리 옛 동지들이 잔뜩 화가 난 거 같더군요.”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예요.”
“이래서 PMI가 중요한 겁니다.”
“PMI요?”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과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Post-merger integration. 합병 후 통합이요. 물리적으로는 합쳐졌지만 화학적인 통합이 부족하잖습니까, 지금.”
“아, 그렇죠…….”
“조 대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주 근거 없는 분노는 아니지만… 바람직하지는 않죠, 아무래도.”
“저도 동감입니다. 난감하네요.”
그들이라고 이 난국을 타개할 뾰족한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 쓴웃음만 지으며 사무실로 복귀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걸어가는 둘을 송희근 과장의 목소리가 붙들었다.
“한 과장, 조 대리! 일 났어, 일!”
“무슨 일이십니까?”
송희근 과장의 소심한 성격에 작은 일도 큰일로 부풀리기 일쑤였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 정말 문자 그대로 일이 났다는 뜻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한태윤 과장과 대찬을 급히 빈 회의실로 끌고 들어갔다.
그는 숨을 한번 돌리고 말했다.
“요즘 분위기 살벌한 거 알지.”
“분위기 말입니까?”
“그래. 인수한 건 우리인데 돌아가는 방식이 옛날 월드몰 방식이니까.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전보 온 직원들이 잔뜩 뿔났잖아.”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죠. 저도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아요.”
“근데 그게 지금 한 달째야.”
“경영지원부에서 업무 매뉴얼 통일해서 내려보낸다고 했던 걸로 아는데요.”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근데 그 업무 매뉴얼 작성 담당자들이 죄다 월드몰 출신이라는 거야. 필래 출신은 다 사원, 대리급이라 발언권이 없고.”
“에이, 그래도 그거만으로 속단하기에는 좀…….”
“지금 직원들 사이에서 유출본이 돌고 있어. 개판이래, 개판! 예전 월드몰 매뉴얼하고 다른 건 글씨체뿐이라잖아.”
한태윤 과장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직원들 불만이 점점 커질 텐데…….”
“윗선에서는 그냥 소수인 필래 출신 직원들이 이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으음, 그건 너무 주먹구구식인데요. 이런 식이면 사장님이 말씀하시던 한 지붕 한 가족, 융화, 이런 건 초장부터 무너질 텐데.”
송희근 과장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말했다.
“지금 익명 게시판에 집단행동까지 불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어. 초장에 찍소리 못하고 당하면 앞으로 회사 생활 고달파질 거라고 하면서.”
대찬은 이마를 짚었다.
“사장님 그 괄괄한 성미에 우리 손을 들어 주실 일도 없을 텐데…….”
셋은 일동 앓는 소리만 낼 뿐, 뭐라 말하지 못했다.
뾰족한 방안도 없거니와, 방안이 있어도 과장 둘과 대리 하나가 해낼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일에 있어 대찬도 당사자였다.
업무 매뉴얼의 건은 작다면 작은 일이지만, 이게 신호탄이 될 소지가 컸다.
구 월드몰 출신과 필래 출신 사이에 벌어질 갈등의 신호탄.
필래유통은 서청수 회장의 시험장이었다.
적진에서 살아남으라는, 생존의 시험장이었다.
필래유통이 그랬다면 필래마트는 능력 검증의 시험장이었다.
대찬, 그 위의 서원웅이 얼마나 빼어난 능력으로 필래마트를 키워 낼 것인가.
지금은 서원웅이 일개 대리의 신분이지만, 오너 일가의 승진은 비 온 뒤 대나무의 성장 속도처럼 빠른 법이었다.
만일 서원웅이 무언가를 결행하고 책임지는 자리에 올랐을 때, 필래마트 내부가 자중지란에 빠진다면 결코 좋은 결과를 빚을 수가 없었다.
“그런 미래의 일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이건 좀 아니란 말이지.”
* * *
대찬은 퇴근 후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서울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만몽철학원이었다.
만몽거사는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산으로 간다는 놈이 이 밤중에 웬일이야?”
“좀 편한 시간에 찾아뵈려고 했는데요, 일산에 있어서 퇴근하고 바로 와도 시간이 이러네요.”
만몽거사는 주섬주섬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난 지금이 편한 시간이지. 소주 한잔하기에 딱 좋잖아.”
만몽거사는 대찬을 포장마차로 이끌었다.
뜨끈한 우동 국물로 헛헛한 속을 데우고 어묵 하나를 한입 가득 우물거리고 나서야 만몽거사가 물었다.
“그래, 용건이 뭐야? 주말도 아니고 평일에 부랴부랴 온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아쉬운 소릴 하려고 왔구먼.”
“역시 거사님은 신통력이 있으셔. 일단 한 잔 받으세요.”
만몽거사는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면서도 주는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그래. 이제 말해 봐, 용건.”
“저… 저희 사장님 있잖습니까, 김태준 사장님.”
“김태준 전무?”
“네. 혹시 정보 갖고 계신 게 있으신가 해서요.”
“그 양반이 직접 온 건 두어 번 되지.”
두어 번이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정보가 그리 많지는 않겠네요.”
“그렇게 단정해 버리면 섭섭하지.”
“네?”
“지금이 신석기도 아니고 직접 대면 안 하면 정보가 없을 거라고 단정하면 안 되는 거야. 90프로의 정보는 간접적으로 들어오는 법이지.”
“간접적으로요?”
“건너, 건너. 그 회사 1인자부터가 내 단골인걸.”
서청수 회장을 두고 한 말이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도 그렇네요.”
“김태준 그 양반, 회장 직속 라인이야. 그러니 서청수 회장은 좋은 소리, 고운 소리만 하지.”
“그러면 재미없겠네요.”
좋은 소식은 뉴스가 안 된다.
나쁜 것,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운 것, 그것이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
대찬의 말에 만몽거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자꾸 섭섭하게 굴 거야? 왼손에는 서청수, 오른손에는 서청규가 들려 있어. 흑백을 다 알고 있지.”
“그럼 기왕이면 블랙으로다가 부탁드려도 될까요?”
만몽거사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장 약점부터 잡을 생각을 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어떤 분인지 알아야 잘 섬길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네 녀석한텐 좋으면서도 나쁠 거다.”
“그런 선문답 같은 말씀이나 듣자고 온 게 아니에요. 쉽게 좀 말씀해 주세요, 쉽게.”
“선문답 같은 말씀으로 시작해야 점쟁이의 신비성이 확 산단 말이지.”
만몽도 대찬의 잔을 채웠다.
만몽은 꿀꺽, 잔을 넘겼다.
잔은 대번에 넘겼는데 말은 시원하게 바로 하지 않았다.
마음 급한 대찬이 만몽을 재촉했다.
“좋으면서도 나쁠 거라는 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급하기는.”
“급하죠, 당연히.”
만몽은 흘흘 웃으면서 두 번째 잔을 넘겼다.
“그 양반, 서청수 회장 라인 중에서도 충성파야. 서청규 사장을 극도로 혐오해.”
“그건 좋군요. 최소한 회장님이 절 믿으시는 이상 해코지하진 않으실 테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 양반이 아주 극성맞은 충성파란 말이야.”
“극성맞은 충성파라뇨……?”
대찬은 조금 불안해졌다.
“필래그룹 경영 철학에 알맞은 사람이야. 필래그룹은 지금까지 서씨 핏줄을 타고난 사람이 경영을 주도하고, 그 외에는 죽 가신이란 말이야.”
“그렇죠.”
“김태준 전무, 그 양반은 가신의 덩치가 커져서 그 그늘이 주군을 가리는 걸 두고 보지 못해.”
그 말이 대찬의 폐부에 꽂혔다.
“그 뜻은…….”
“주군은 서원웅, 가신은 자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 자네의 빛이 너무 성해서 서원웅의 입지를 도리어 좁게 만드는 이 상황은…….”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겠군요.”
만몽은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 그래서 좋으면서 나쁘다고 한 거야.”
“…네.”
대찬은 조용히 잔을 넘겼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대찬은 월드몰 인수 과정에서 확실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만몽의 말을 들으니 그게 마냥 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김태준 전무는 이제 대찬을 주시할 것이다.
충견은 목줄에 매여 있어야 충견이다.
사나운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은 목줄에 매인 충견의 미덕이다.
하지만 충견이 목줄을 끊는 순간 들개가 돼 버리며, 사나운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은 주인에게 위협이 된다.
김태준 전무는 인수 과정에서 대찬의 이빨과 발톱을 확인했다.
이제 과연 목줄에 순순히 매여 있을 것인가, 그 기질을 따질 것이다.
대찬은 만몽의 말을 두 번, 세 번 곱씹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 새로운 업무 매뉴얼이 회사 인트라넷을 통해 배포되었다.
불행하게도, 송희근 과장이 귀띔해 준 대로 구 월드몰의 업무 매뉴얼과 다른 것이라고는 글씨체뿐이었다.
필래마트 직원들의 익명 게시판은 당장 반란이라도 일으킬 듯 들끓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겁니까?
-일할 맛 안 나네요, 진짜.
-필래가 필래를 차별하네요. 이래놓고 한 지붕 한 가족이라니.
-월드몰 애들은 양심이 있나?
거기에 구 월드몰 직원들 중 일부가 익명성에 기대 반격에 나섰다.
-원래 세상은 쪽수 싸움인 거예요. 몰랐나?
-전보 온 직원들은 다수결의 원칙도 모르나요? 중학교 사회부터 다시 배우셔야 할 듯.
-애사심도 없는 것들이 같잖은 주인 행세 하는 게 꼴사납네요.
-그만큼 월드몰 매뉴얼이 합리적이라는 건데, 인정 좀 하세요.
여기에 자극 받은 필래 출신 직원들이 다시 저들을 들이받은 것은 자명한 수순이었다.
이러니 건전한 토론의 광장은 지저분한 인신공격과 비난의 싸움터로 바뀌었다.
경영진에서는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았다.
온라인의 불평불만은 흐르고 넘칠 지경이 돼서, 오프라인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필래에서 전보 온 직원들은 은근히 구 월드몰 출신에게 따가운 눈총을 쐈다.
구 월드몰 출신 직원들 역시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황 대리, 김산호, 오다혜 씨, 점심 먹으러 가자.”
김영우 차장은 점심시간이 되자 월드몰 출신 직원들만을 데리고 나갔다.
그 와중에 고졸 계약직인 홍은주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아우, 재수 없는 새끼.”
송희근 과장은 툴툴거리며 김영우 차장이 지나간 자리를 괜히 한번 쏘아봤다.
“우리도 밥 먹으러 가지.”
송희근 과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직원들이 그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