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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9화 (108/556)

난 할 수 있어 109화

전략기획실장은 월드몰 출신의 도진석 상무였다.

그는 김태준 대표가 그랬듯 전략기획실 직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러분과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아는 얼굴도 있고 모르는 얼굴도 있는데, 서두르지 말고 차차 알아갑시다.”

도진석 상무는 팔짱을 끼고 꼿꼿한 자세로 선 채 말했다.

“김태준 대표께서 저한테 전략기획실 조직 구성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전략기획실 산하에 어떤 별도의 팀도 꾸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직원들은 도진석 상무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주어지는 업무에 대해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업무에 임한다면 최악의 결과를 빚겠죠.”

직원들은 간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성의를 표했다.

“모쪼록 최선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네, 실장님.”

“저는 수평적인 업무 분할은 하지 않지만, 수직적인 위계질서나 보고 체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수직적인 질서가 바로 서지 않으면 회사가 동아리처럼 됩니다.”

도진석 상무는 미지근한 물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한테 올라오는 모든 보고는 여기 김영우 차장을 통해야만 합니다.”

도진석 상무의 말에 김영우 차장이 직원들을 향해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영우 차장입니다.”

김영우 차장도 도진석 상무와 마찬가지로 월드몰 출신이었다.

도진석 상무는 말했다.

“마찬가지로 사원은 대리에게, 대리는 과장에게 보고 체계를 준수해 주길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네, 실장님.”

“상명하복의 수직적 구조를 통해 효율적이고 신속한 업무 처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말하는 도진석 상무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그럼 다들 편하게 통성명들 해요.”

도진석 상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송희근 과장이 말이라도 한번 붙여 보려고 도진석 상무에게 말했다.

“실장님은 같이 자리 안 하십니까?”

그 질문에 도진석 상무는 씩 웃기만 하고 자리를 떴다.

너희랑 둘러앉아서 통성명할 위치가 아니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송희근 과장은 어정쩡하게 웃으며 남은 직원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끼리…….”

송희근 과장이 입술을 떼자마자 김영우 차장이 끼어들었다.

“전부 회의실로 이동합시다. 티타임이나 가지면서 서로 말 좀 트죠.”

“네, 차장님.”

김영우 차장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직원들을 인솔하고 회의실을 향해 앞장섰다.

면전에서 뭉개진 송희근 과장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송희근 과장을 챙겨 주는 건 한태윤 과장뿐이었다.

한태윤 과장은 송희근 과장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가시죠, 과장님.”

“아무리 차장이라지만 나보다 나이도 어린 놈이……!”

“참으십시오. 첫날부터 얼굴 붉힐 일 없잖습니까.”

“에휴, 내 팔자야.”

그나마 한태윤 과장이 역성을 들어 준 덕에 송희근 과장의 속이 조금은 풀렸다.

직원들은 회의실에 도착해서도 월드몰은 월드몰끼리, 필래는 필래끼리 앉았다.

김영우 차장이 말했다.

“직급 순서대로 자기소개 하도록 하죠. 저 먼저 하겠습니다. 김영우 차장이고, 마흔둘입니다.”

직원들은 짝짝짝, 형식적인 박수를 쳤다.

“월드몰 입사 후 쭉 재무 분야에서 일하다 재작년부터 기획실에서 일했습니다. 연제대 경영학과 졸업했고,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에서 MBA를 받았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김영우 차장의 소개를 듣고 대찬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무슨 학벌까지 밝히라고 하는 거야.’

김영우 차장이 먼저 그렇게 소개하면서 뒤이은 사람들도 그 형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다 같은 필래월드몰 직원이 된 마당에 출신 학교를 왜 언급하는지 대찬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다음 차례인 송희근 과장이 더 강하게 했다.

송희근 과장은 꽁한 얼굴로 말했다.

“송희근 과장입니다. 필래유통에 입사해서 대관 업무를 맡아 왔습니다. 올해 마흔넷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으려는 송희근 과장을 김영우 차장이 붙잡았다.

“실례지만 학교는?”

‘실례인 줄 알면 물어보질 말라고.’

송희근 과장에게 특별한 애정이 없는 대찬도 속으로 송희근 과장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받은 송희근 과장은 쭈뼛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림대 사학과 나왔습니다.”

“중림대? 그게 어디 있는 학교였죠? 강원도였나?”

송희근 과장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경기도 안산에 있습니다. 모르는 분은 잘 모르죠.”

“아, 그렇습니까? MBA는 따로 안 따셨고요?”

“…네.”

“이야, 필래가 이제 보니 열린 회사였네요. 학벌 안 보고 사람 뽑는구나.”

그 말에 한태윤 과장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졸업한 지 20년 돼 가는 대학 갖고 너무 오래 말씀하시네요.”

김영우 차장은 그런 한태윤 과장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한태윤 과장이죠? 입 연 김에 일어나서 소개하시죠.”

한태윤 과장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 한태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에이, 너무 신비주의 아니에요? 더 소개해 봐요.”

김영우 차장의 채근에 한태윤 과장은 얕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내년이면 서른다섯 됩니다. 송 과장님과 마찬가지로 쭉 대관 업무를 봤고요.”

“학교는?”

“그걸 꼭 말씀드려야 합니까?”

“아니 뭐, 딱히 학교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면 말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강국대 나왔습니다.”

“역시 열린 회사야. 좋은 회사야.”

김영우 차장은 치열을 드러내며 씩 웃었다.

한태윤 과장은 그의 장단에 대꾸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김영우 차장은 신경 쓰이게 볼펜을 딸깍거리면서 말했다.

“다음은 우리 황 대린가?”

“네, 차장님.”

황 대리로 불린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황경원 대리입니다. 월드몰 마케팅과 해외영업 분야에서 일했고, 나이는 서른둘입니다. 존경하는 김영우 차장님과 마찬가지로 연제대 경영학과 졸업하고 미시간주립대 MBA 나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김영우 차장이 덧붙였다.

“우리 황경원 대리는 젊지만 식견도 뛰어나고 추진력도 있고, 여러모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니까, 저기 조 대리라고 했나?”

김영우 차장의 지목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대찬 대리입니다.”

“형님처럼 모시면서 잘 배워 봐요.”

“네, 그러겠습니다.”

김영우 차장은 서원웅을 빼놓고 대찬에게만 그렇게 말했다.

도련님은 아무래도 쉽게 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에 송희근 과장이 독기를 품고 쏘아붙였다.

“조 대리도 황 대리와 직급이 같은데 뭘 배웁니까? 우리 조 대리도 식견, 추진력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직급이 같지만 조 대리 입사한 지 1년도 안 됐다면서요? 꼭 직급이 달라야만 배우나요. 그렇게 치면 송 과장님은 저한테 좀 배우셔야겠네요?”

“그 말이 아니라……!”

“이거야 원, 벌써부터 필래 성골이라고 감싸고도시면 곤란합니다. 오늘 대표님께서 하신 한 지붕 한 가족으로 가자는 말씀, 벌써 잊으셨어요?”

송희근 과장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감히 맞받아치지 못하고 책상 아래 숨긴 주먹만 꽉 쥐었다.

대찬은 곁눈질로 송희근 과장을 안쓰럽게 봤다.

소심한 그의 성정에 이만하면 최선을 다한 거다.

김영우 차장은 계속 볼펜을 딸깍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다음은 서원웅 대리?”

“네, 서원웅 대리입니다. 올해 필래유통 대외협력부에 입사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으니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래요. 다음은 조 대리?”

김영우 차장은 서원웅에게는 학교를 물어보는 둥 시비를 걸지 않고 바로 대찬으로 넘어갔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대찬 대리입니다. 서 대리와 마찬가지로 올해 필래유통 대외협력부에 입사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앉으려는 대찬을 김영우 차장이 도로 세웠다.

“조 대리는 어떻게 1년도 안 돼서 대리를 달았어?”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 떨 거 없어. 친구 잘 만난 것도 능력이지. 오히려 일 잘하는 것보다 본능적으로 튼튼한 동아줄 선택하는 직감, 그게 더 대단한 능력이야.”

“예.”

대찬은 김영우 차장과 입씨름할 위치도, 의지도 없어 짧게 긍정했다.

김영우 차장은 입가를 벌리며 말했다.

“그래, 학교는?”

“고원대 경영학과 나왔습니다.”

“오, 그나마 봐줄 만한 학교 나왔네.”

“예.”

‘그나마’라는 말이 대찬의 심기에 무척 거슬렸다.

“학벌 안 보는 필래에서 조 대리는 오버스펙인 셈이로군.”

대찬은 고분고분 넘어가려고 했지만, 김영우 차장은 자꾸 대찬을 포함한 필래 출신 직원들의 속을 긁었다.

대찬이 툭 던지듯 대꾸했다.

“학벌 안 보는 문화가 어지간히 부러우신 모양입니다.”

대찬의 말에 김영우 차장은 안경을 슬쩍 올리며 웃었다.

이놈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배운 놈 티를 내고 싶은지 일차원적인 도발에 훅 넘어오진 않았다.

“그렇지 않나. 우리 회사는 학벌 안 좋은 사람을 뽑질 않아서.”

“그러게 말입니다. 그게 월드몰의 결정적인 패착이 된 것 같습니다.”

“…뭐야?”

시종 웃음기를 머금던 김영우 차장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저희 회사처럼 학벌이 아니라 능력 보고 직원을 채용했으면 필래에 인수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야, 조 대리.”

“그래도 이제는 차장님도 필래 가족이 되셨으니 그런 불합리한 기업 문화에서 탈출하게 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김영우 차장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순간 고함을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여기선 화내는 놈이 지는 거다.

김영우 차장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찬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다음은 허운 사원.”

“예? 아, 예.”

일순 살벌해진 분위기에 허운은 침을 꼴깍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운과 유채경의 소개가 끝나고, 나머지 월드몰 출신 직원들이 자기를 소개했다.

남은 사람은 셋이었다.

남자 하나, 여자 둘.

김영우 차장이 말했다.

“다음, 김산호 사원.”

자리에서 일어난 김산호 사원은 앳된 얼굴이었다.

직장인보다는 대학생에 가까운 외모였다.

대찬은 그를 물끄러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안녕하십니까! 김산호 사원입니다! 광화대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법무팀에서 일하다 이번에 전략기획실에 오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오다혜 사원.”

“오다혜 사원입니다. 한영대 경제학과를 나왔습니다. 작년부터 계속 기획실에서 근무해 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은 홍은주 씨. 아, 참고로 홍은주 씨는 계약직이에요.”

김영우 차장이 쓸데없는 사족을 달자 다른 직원들은 언뜻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홍은주는 익숙한 듯 덤덤하게 말했다.

“홍은주입니다. 고졸이고요. 열심히 업무 지원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홍은주를 마지막으로 모든 자기소개가 끝났다.

김영우 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일합시다. 도 실장님 봐서 아시겠지만 튀는 사람들은 용서 안 하시는 스타일입니다. 각자 자기 주제와 위치를 알고 업무에 임해주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김영우 차장의 눈빛이 가장 오래 머무른 사람은 대찬이었다.

대찬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봤다.

김영우 차장은 벌써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먼저 자리를 떴다.

송희근 과장이 대찬의 어깨를 잡으며 속닥거렸다.

“조 대리, 잘했어!”

“아닙니다. 뭘요.”

한태윤 과장이 대찬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조 대리, 잠깐 봅시다.”

“네, 과장님.”

대찬은 한태윤 과장을 따라나섰다.

단둘이 있는 곳에서 한태윤 과장이 대찬을 보고 말했다.

“당장 속이야 시원하지만 적절한 언사는 아니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김 차장 같은 스타일이 자기는 쉽게 말하면서 남의 말은 뒤끝 있게 담아 둡니다. 조 대리가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

“네. 제가 실수했습니다. 유의하겠습니다.”

한태윤 과장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조 대리 같은 캐릭터가 있어야 그 인간이 망나니 칼춤을 함부로 못 추긴 하겠네요. 그렇죠?”

“하하…….”

대찬은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필래유통은 정해진 수순대로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필래마트 흥읍점을 필래월드몰에 매각했다.

이에 필래월드몰은 공식적으로 필래마트로 사명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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