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08화
동기 4인방은 내일 출근이 염두에 없는 듯 마구잡이로 맥주를 마셨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회사가 있는 것도 이들의 폭음에 단단히 한몫했다.
넷은 얼굴이 벌게져서 치킨에서 피자로, 피자에서 쥐포로 안주를 바꿔 가며 맥주를 마셨다.
유채경의 얼굴에 붉은빛이 선명해졌다.
서원웅이 유채경에게 물었다.
“채경아, 괜찮아? 이제 그만 마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어으… 딱! 한 잔만 더 마시고 일어날까, 그럼……?”
“지금 일어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주량이 제법 되는 대찬은 멀쩡한 정신으로 허운의 얼굴을 흘끔 봤다.
취기가 다소 오르긴 했지만 몸을 가눌 정도는 돼 보였다.
그걸 확인한 대찬은 대뜸 서원웅의 목에 팔을 걸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아아- 집에서 마셔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취하네……. 서원웅!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다?”
“얘, 얘가 왜 이래!”
대찬은 서원웅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조용히 있어.”
그러고는 벌러덩 누운 몸을 좌우로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나랑 서원웅은 이제 잘 거니까 형이 채경이 집까지 데려다줘…….”
“미쳤냐! 왜 나한테……!”
허운은 덮어 놓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찡긋거리는 대찬의 눈을 봤다.
그는 얼른 태세를 전환했다.
“아… 하하, 그럴까, 그럼? 채경아,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한 잔 더 할 수 있는데에…….”
유채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절제할 정신은 있는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운은 얼른 유채경을 부축했다.
대찬은 빨리 나가라는 듯 허운에게 손짓을 했다.
허운이 나가고, 대찬은 서원웅을 옭아맨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멀쩡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너도 집에 가.”
“뭐? 방금은 자고 가라며!”
“집에 가, 얼른. 전보하고 첫 출근부터 집 비우면 회장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매일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 오신다며. 정말 그분이 가사만 도우실까?”
그 말에 서원웅은 입이 삐죽 튀어나와서 집으로 돌아갔다.
대찬은 집 안 가득 널브러진 맥주병과 남은 안주들을 보고 푹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 인간들 또 들이면 사람이 아니다.”
* * *
유채경은 허운의 팔에 의지한 채로 비틀비틀 걸었다.
허운은 행여 추행으로 오인 받을까 촉각을 곤두세운 채로 유채경을 부축했다.
얼마간 걷던 유채경이 허운을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허운의 얼굴에 취기와는 다른 홍조가 떴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오빠는 내가 왜 좋아?”
“뭐, 뭐라고?”
유채경은 피식 웃었다.
“왜 좋냐구, 내가.”
“내, 내가 왜 너를…….”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을걸? 나 안 좋아한다고 하면 진짜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자 허운은 입을 합, 다물었다.
유채경은 살짝 풀린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거봐. 맞네, 나 좋아하는 거.”
“그, 그래! 좋아한다. 어쩔래!”
“히히.”
“히히는 무슨……. 근데 어떻게 알았냐?”
“모르기가 더 어렵겠다. 오빠는 말은 무슨 선수인 것처럼 하더니 표정도 못 숨겨, 목소리도 못 숨겨, 아주 그냥 광고를 하고 다녀라.”
“…좋은 걸 어떡하냐.”
“그래? 그럼 사귀자.”
그 말에 허운은 아득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뭐?”
“사귀자고. 왜, 그 정도로 좋은 건 아니야?”
“아, 아니, 그건 아닌데…….”
“에이 씨, 뭔 남자가 이렇게 맹탕이야.”
유채경은 짜증난 얼굴로 허운을 쏘아보더니 까치발을 들어 허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약한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허운의 뺨에 머무르다가 사라졌다.
허운은 그 자리에 뻣뻣하게 얼어붙은 채로 눈만 커졌다.
유채경은 그런 허운을 귀엽게 보다가 휙 뒤돌아 걸어갔다.
그는 손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나 들어간다! 오빠도 조심히 잘 들어가.”
허운은 유채경이 가로등 밝은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선 채로 휴대폰을 꺼내 짧은 문자 메시지를 입력했다.
집 안을 말끔히 치운 대찬은 세수를 하고 이불을 덮었다.
말짱한 정신으로 근무하려면 지금 잠들어야만 했다.
그때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ㄴ.
대찬은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야…….”
-나 유채경이랑 사귄다.
대찬은 허운의 문자 메시지를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픽 웃으며 휴대폰을 도로 옆으로 치웠다.
대찬은 벌러덩 침대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역시 남이 돕네 마네 해 봤자 소용없어. 연애는 결국 당사자끼리 하는 거야.”
그러다 문득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무리 자질구레한 연애 사업에 소홀해지기로 했다지만, 이쯤 되니 외롭긴 외롭네.”
대찬은 쯧,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틀었다.
“허운은 조옿겠다!”
그렇게 허한 마음으로 잠이 들려는 찰나,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대찬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이 인간이 진짜… 일절만 할 것이지……!”
허운에게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어 줄 각오로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던 대찬의 눈에 일순 분노가 풀렸다.
문자 메시지를 보낸 건 허운이 아니었다.
-자냐?
“산하 누나…….”
대찬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었다.
김산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 조대찬이, 여태 안 자고 뭐 했어?”
“누나야말로 미국에서 어떻게 문자를 보냈어?”
“나 한국이야.”
“뭐? 갑자기 말도 없이.”
“갑자기 결정됐으니까. 이번에 우리 회사 한국 지사 생겼거든. 아마 회사 때려치울 때까지 여기 있지 싶다.”
“정말? 잘됐다!”
“뭐야? 조대찬답지 않게 격하게 환영해 주네.”
대찬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들떠 있었다.
대찬은 민망한 마음에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그래서 지금 비행기 내린 거야?”
“어. 이코노미에 11시간 동안 갇혀 있었더니 죽을 맛이야.”
“그래, 피곤할 만도 하지.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
“야이, 매몰차게 그러기야?”
대찬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피곤하니까 집에 가서 쉬라는 게 어떻게 매몰차게 들려?”
“피로는 잠보다는 술로 씻는 게 짜세야.”
“짜세는 무슨. 초딩이야? 누나 그러다 서른도 안 돼서 골로 가요.”
“골로 가더라도 소주 한잔은 해야지. 너 지금도 살던 집에 사니?”
“아니. 이번에 일산으로 이사했어.”
“일산? 혼자 살아?”
그렇게 묻는 김산하의 목소리가 어딘가 끈적했다.
“응, 혼자.”
“그래애?”
“뭐야, 그 말투는?”
“야야, 우리 집 쩌기 하남으로 이사했거든.”
“근데?”
“히잉, 인천에서 하남까지 어느 세월에 가!”
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새벽에 갑자기 비음을 섞고 난리야! 어차피 운전은 기사님이 하실 텐데 무슨 상관이야.”
“몰라! 일산 가서 잘래. 재워 줘.”
“미국 가서 배짱부리는 법만 배워 왔어?”
“기사님, 일산 가 주세요. 자세한 주소는 근처 가서 다시 알려 줄게요. 들었지? 나 택시 탔다!”
뚝.
전화가 끊겼다.
대찬은 어이없는 얼굴로 꺼진 액정을 바라봤다.
“참 나.”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김산하는 한달음에 일산에 도착했다.
새벽 2시 45분.
대찬은 이 새벽에 무슨 푸닥거리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집 앞에서 김산하를 기다렸다.
택시가 그 앞에 멈추고, 김산하는 트렁크에서 거대한 캐리어를 꺼내 대찬의 앞에 섰다.
그녀가 대찬을 보고 싱긋 웃었다.
“어떻게 너는 하나도 안 늙었냐.”
“조명이 어두워서 그래. 나도 일에 치여서 요즘 삭신 쑤셔.”
대찬은 김산하에게서 캐리어를 빼앗아 손에 쥐고 앞장섰다.
“들어와. 안 그래도 오늘 동기들끼리 술판 벌여서 술 냄새 좀 날 거야.”
김산하는 대찬의 집을 죽 둘러보고 웃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인데 뭐가 이렇게 깔끔해?”
“입주 첫날부터 난장판이면 그건 좀 문제 있는 거지.”
“그래? 내가 날을 잘 골라서 들어왔네.”
“내 입장에서는 잘못 골라도 아주 단단히 잘못 고른 거지.”
그러자 김산하는 대찬의 팔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도회적인 냄새가 슬쩍 끼쳤다.
LA로부터 날아온 냄새인지.
“너도 좋으면서 괜히 튕기지 마.”
“생사람 잡지 마. 출근까지 5시간밖에 안 남았어.”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하긴 여기서 술 먹자고 하면 완전 민폐네.”
“알긴 아는구나.”
김산하는 그제야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 겸연쩍게 웃었다.
“그래. 그럼 잠만 자야겠다. 나 샤워해도 되지?”
“어. 수건 새로 걸어 놨어.”
“역시 센스 있다니까.”
대찬은 김산하가 씻는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몸이 노곤했지만 욕실 안에서 들리는 샤워기 소리가 자꾸 대찬의 정신을 각성시켰다.
대찬이 깜빡 잠에 빠졌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
미지근한 수증기와 함께 은은한 샴푸 냄새가 났다.
김산하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만지며 나왔다.
그는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나 어디서 자?”
방은 2개였다.
대찬은 김산하를 가만히 보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가 자고 싶은 곳에서.”
대찬이 일어났을 때, 김산하는 이미 집을 떠난 뒤였다.
부엌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냄비를 보니 북어를 넣은 콩나물국에서 김이 올랐다.
식탁 위에는 계란말이며 부추무침 같은 간단한 반찬이 야무진 솜씨로 만들어져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쪽지 한 장이 있었다.
대찬의 눈에 익숙한 김산하의 필체였다.
-먼저 간다. 새벽에 괴롭혀서 미안.
그걸 본 대찬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대찬은 국이며 반찬이며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우고 출근했다.
필래월드몰의 전 직원은 출근하자마자 대강당으로 소집되었다.
그곳에서 대표이사로 취임한 김태준 전무의 취임 일성이 있었다.
대찬은 그의 말을 온전히 집중해서 듣지는 않았지만, 기억해 둘 만한 부분은 속으로 곱씹었다.
“상명하복, 현명한 보스를 전제했을 때 가장 훌륭한 시스템입니다. 저는 스스로 현명한 보스라고 자부합니다.”
“말은 물입니다.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 말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여러분의 말이 역류하는 걸 나는 싫어합니다.”
이걸 전제했을 때, 김태준 대표는 그야말로 군인형 경영자였다.
플라톤이 현명한 사람에 의한 전제정치를 최고의 정치 형태로 꼽았다.
그처럼 김태준 사장의 말마따나 현명한 보스에 의한 상명하복 시스템은 합리성만 따졌을 때 장점이 많았다.
게다가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자부하다니.
휘하의 반론을 대놓고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는 필래월드몰의 이름 아래 새로운 가족이 되었습니다. 한 지붕 두 가족이 아닙니다. 한 지붕 한 가족입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누구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뤄 냅시다.”
김태준 대표의 말에 전 직원은 박수를 쳤다.
하지만 박수를 치는 와중에도 저마다 생각이 다 달랐다.
어떻게 한 가족이냐, 점령당한 패배자들하고 우리가.
필래 출신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 한 가족이냐, 망해 가던 점포 하나 있던 놈들하고 점포 16개 있던 우리가.
구 월드몰 출신 직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김태준 대표의 취임사가 도깨비방망이는 아니었다.
두 집단이 융화까지 가는 길은 요원했다.
필래월드몰 사무실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했다.
꼭 고등학교 1학년 애들의 새 학기 교실 분위기였다.
아는 얼굴들과 모르는 얼굴들이 섞여 묘하고 어색한 느낌이 감돌았다.
대찬이 속한 전략기획실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전략기획실장의 인원 구성은 구 월드몰 출신과 필래 출신이 정확히 반반을 이루었다.
차라리 한쪽으로 확 쏠리면 모를까.
반반의 인원 구성이 어색한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