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07화
“송 과장님은 과장으로 연차가 꽉 찼어. 조만간 차장으로 승진하실 거야. 한 과장님은 이제 갓 승진하셨고.”
“그렇지?”
“너는 다른 직원들보다 빨리 승진할 거야. 머지않아 한 과장님하고 동렬에 서겠지. 언젠가는 송 과장님도 따라잡겠지만 그때까지는 적어도 2, 3년은 남았으니까.”
“으음…….”
“회장님이 한 과장님을 눈여겨보시고 네 곁에 두신 거 같아.”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날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셨구나. 감사하게도…….”
“마냥 감사만 할 일은 아니야.”
“응?”
“회장님이 단순히 아들 회사 생활 편하게 해 주자고 이런 일을 벌이시진 않으셨을 거야.”
“그럼…….”
대찬은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을 옆에 붙여 준다는 건 물건이나 돈을 주는 것과는 의미가 달라.”
유채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찬에게 물었다.
“그럼 회장님이 원웅이 오빠를…….”
“크게 쓰시겠다는 거지.”
“크게 쓴다는 게 얼마나 크게 쓴다는 거야?”
대찬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거기까지는 모르지. 다만, 원웅이 너는 회장님의 배려에 안도하기보다는 더 긴장해야 돼.”
“응, 알았어…….”
대찬은 웃으면서 모두에게 말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 배를 탔어. 완전히 서원웅의 사람들이 된 거고, 원웅이 체급이 더 커지면 사람들은 우릴 보고 서원웅 라인이라고 할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어깨가 무거워지네.”
허운은 서원웅의 어깨에 팔을 걸고 웃었다.
“그러니까 잘하라고, 짜식아.”
“오빠는 서 대리님한테 짜식이 뭐야, 짜식이.”
“아이고, 참, 쇤네가 주제 모르고 또 날뛰었습니다요…….”
대찬이 숟가락을 탕,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허운을 노려봤다.
“형, 내가 그 말투 쓰지 말라고 했지.”
“내가 너한테 그랬니? 우리 백두혈통 서 대리님한테 그랬지. 저거, 저거 아주 서 대리님 빽 믿고 호가호위하는 것 좀 보게.”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전보는 바로 이뤄졌다.
동시에 6명이 짐을 싸게 된 대외협력부 사무실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양동식 부장은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송희근 과장에게로 걸어왔다.
“바로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니 작별주도 못 나누고 보내서 아쉽네.”
“아, 그게… 월드몰 본사로 쓰던 일산점을 계속 본사로 쓰기로 해서, 통근이 어려운 직원들 배려해서 내일부터 휴가를 줘 집 구할 말미를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 챙기려면 여유가 없잖아. 일찍 집에 들어가 봐야지?”
“…아, 네.”
“그래. 거기 가서도 잘 지내고.”
“예, 부장님.”
양동식 부장은 성의 없는 말 몇 마디로 송희근 과장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그러고는 서원웅에게는 사뭇 다른 말투로 다가갔다.
“서 대리, 잠깐 나 좀 볼까?”
“예? 아, 예.”
양동식 부장은 서원웅을 비상구로 불러냈다.
“어흠, 정이 들려던 참인데 이렇게 헤어지게 돼서 아쉽네?”
“저도 그렇습니다, 부장님.”
“그래그래. 회장님께는 안부 잘 전해 드려. 내가 비록 필래유통에 몸담고 있지만 마음은 회장님께 가 있다고. 알았지?”
양동식 부장은 일련의 사건들에서 수상한 냄새를 감지했다.
서청규 사장이 서청수 회장에게 번번이 꼬리를 내리는 이유가 수상했다.
혹 이 필래유통이 난파선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청수 회장에게 알량한 약이라도 쳐 보려는 수작이었다.
서원웅은 웃음을 머금었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래. 이건 내 마음이니까 받아 둬.”
양동식 부장은 품에서 봉투를 꺼내 서원웅의 손에 들려 주었다.
서원웅은 슬쩍 몸을 빼며 사양했다.
“아, 이러지 않으셔도…….”
“넣어둬. 더러운 거 아니야. 상품권이니까 겨울 대비해서 목도리라도 하나 장만하라구. 응?”
서원웅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 시각, 대찬은 짐을 싸면서 옆 자리의 유백기를 빤히 바라봤다.
유백기는 대찬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 신경 쓰이는 터,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내리치고는 대찬을 올려다봤다.
“뭐야? 왜 자꾸 봐?”
“선배, 잠깐 저랑 얘기 좀 할까요?”
유백기는 휙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너랑은 할 얘기 없어.”
“전 있어요. 잠깐이면 됩니다. 담배나 한 대 태우시죠.”
말을 던져 놓고 먼저 걸음을 떼자, 유백기는 대찬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찬이 두 모금째를 빨아들일 때, 유백기가 적개심 가득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웬만하면 마주칠 일도 없는데, 인상 좀 펴요.”
“살가운 척하지 마. 역겨우니까.”
“역겹기는 나보다 더 역겨울까.”
“이 새끼가…….”
대찬은 유백기의 정면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뉴스에서 때려 대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나 했지.”
“…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런 구린 수작으로 부활했는지 누가 알았겠어.”
“멋대로 엿같은 소리 지껄여. 난 들어 줄 생각 없으니까.”
유백기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대찬을 등졌다.
그렇게 도로 돌아가려는 유백기의 뒷모습에 대고 대찬이 말을 이었다.
“유춘기 차관, 네 아버지.”
“……!”
유백기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멈춘 유백기의 뒤통수에 대고 대찬은 계속 말했다.
“나랏돈 끌어다 서청규 사장 뒷구멍에 쑤셔 줬지. 직원들 명의까지 도용해 가면서.”
유백기의 창백한 낯빛이 대찬을 돌아봤다.
“너……!”
“그렇게 해서 네가 구원받았고?”
“그 입……!”
“동원한 직원이 한둘이 아니더만. 안 들킬 줄 알았어?”
유백기가 다시 대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대찬의 멱살을 콱 틀어쥐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떡하니 자기 책상에 메모 흘려 놓고는 어떻게 아냐니. 애비나 자식이나 덤 앤 더머 유전자를 타고났나?”
“야, 뚫린 입이라고……!”
“메모를 잘 숨기든가. 아님 나한테 야근을 시키지 말았어야지. 나쁜 머리에 천성까지 나쁘니까 이 사달이 나잖아.”
“너 이 새끼……!”
대찬은 멱살을 쥔 유백기의 손을 떨쳐 냈다.
“얻다 대고 손을 뻗쳐? 천지 분간이 안 돼?”
“…너 말고 누가 또 알아?”
“안 알려 주고 싶은데.”
유백기의 동공이 떨렸다.
“너 그거 말하지 마.”
“그렇게 부탁하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 많지 않아? 염치 좀 있자.”
“…제발.”
“사표 내.”
“뭐라고?”
“그럼 다물어 줄 테니까. 아니면 나도 내 성질에 이길지 질지 장담 못해.”
대찬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유백기를 스쳐 지나갔다.
유백기는 대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담뱃불을 붙였다.
유백기도 언젠가는 이미 서씨 형제 사이에서 그 건이 협상 카드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알게 될 터.
그때까지 불안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을 알게 되면 불안은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성질 더러운 서청규 사장이 자신의 발목을 잡은 유백기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서청규 사장과 유백기 부자의 더러운 거래를 낱낱이 까발리고 싶은 욕구를 대찬은 간신히 억눌렀다.
그렇게 되면 대찬이나 유백기가 동반 자살, 무협에서 말하는 동귀어진이 될 터였다.
아무리 유백기를 향한 증오심이 깊다지만 스스로 신세를 망칠 정도는 아니었다.
대찬은 마음에서 유백기를 지웠다.
‘안녕, 유백기. 영원히 보지 말자.’
* * *
대찬은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그걸 본 어머니가 대찬에게 물었다.
“가출하려고 그러니? 갑자기 짐을 싸고 그래?”
“저, 자취해야 돼요.”
“뭐? 자취?”
대찬은 옷가지를 상자에 욱여넣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네. 이번에 인수한 월드몰 매장 중에서 일산점에 본사가 있었거든요. 거기를 계속 본사로 활용할 방침인가 봐요.”
“너무 갑작스럽다, 얘.”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회사에서도 모레부터는 휴가 쓰고 주말까지 해서 집 구할 말미를 줬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게 뚝딱 구해진다니.”
“기숙사도 있어서 상황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은 거기서 지내라고 하던데, 고용 승계 다 된 마당에 추가로 우리까지 가면 얼마나 북적거리겠어요.”
“그렇겠지.”
“저축해 둔 돈도 있고 하니 저는 따로 살려고요. 주말에는 집도 둘러보고 드라이브도 할 겸 다 같이 일산 가 봐요.”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만 덜렁 보내 놓으면 거지같은 곳으로 잡을 거 같구나.”
“엄만 아직도 아들이 그렇게 못 미더워요?”
“결혼하고 자식 낳아 봐라. 자식 나이 먹었다고 덜컥 믿어지나.”
“그래요. 나도 나보다는 엄마 안목이 더 믿음직해요.”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아직 여유 좀 있는데 벌써 짐부터 싸니?”
“하루에 하나씩 싸 둬야지, 몰아서 하면 골병들어요.”
“알았으니 밥부터 먹고 해라.”
“네-”
대찬은 어머니 앞에서 덤덤한 체했지만, 내심 독립에 대한 기대감으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급하지도 않은 짐을 허겁지겁 싼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는 새롭게 자기 삶을 꾸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대찬은 회사 근처의 방 2개짜리 다세대주택에 입주했다.
보증금과 월세도 합리적이고, 신축인 데다 주변이 다 주택가라 밤에도 조용하니 좋다며 어머니도 합격 도장을 찍어 주었다.
대찬은 필래월드몰 일산점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문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야, 마운틴뷰, 오션뷰에도 뒤지지 않는 회사뷰! 좋다.”
“회사랑 가깝다고 직장 동료들 자주 들이지 마라. 집 상한다.”
“직장 동료들도 다 집 있어요.”
“너도 대학 때 자취하는 친구 집에서 몇 날 며칠 붙어 있었잖니? 너는 뭐, 집 없어서 그랬니?”
“알았어요, 알았어요.”
“배달 음식 너무 자주 시켜 먹지 말고 웬만하면 집 밥 먹어라. 자주 반찬 갖다줄 테니까.”
“저도 간단한 건 할 줄 알아요. 저 때문에 너무 자주 오실 필욘 없어요.”
대찬의 말에 어머니는 눈을 찡긋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자 들여야 돼서 엄마가 불쑥불쑥 오면 싫니?”
“아이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대찬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의 동료들도 저마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에 거처를 정했다.
서원웅은 서청수 회장이 근방에서 좋은 오피스텔을 덜컥 사 주었다.
살림살이 팍팍한 허운은 주택가 깊숙한 곳의 손때 좀 탄 원룸에 입주했다.
유채경은 방범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새벽에도 인적이 끊이지 않고 가로등이 밝은 번화가를 선택했다.
처자식이 있는 송 과장과 한 과장은 서울에서 일산으로의 통근을 택했다.
거리는 제법 되지만, 일산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 반대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 다행이었다.
필래월드몰로의 첫 출근을 앞둔 일요일, 동기 4인방이 모였다.
역시나 허운이 먼저 나팔을 불었다.
그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기념비적인 날을 그냥 보낼 생각은 아니지? 다 같이 맥주나 한잔하자.”
“그래. 회사 앞 맥줏집 괜찮더라. 거기서 모이자.”
대찬의 말에 허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뭐가 아니야?”
“편하게 집에서 마시자.”
“누구 집?”
“누구 집이긴, 당연히 네 집이지.”
대찬은 펄쩍 뛰었다.
“싫어! 왜 하필 우리 집인데?”
“봐라. 서원웅 집에서 마시면 회장님 감시가 서슬 퍼럴 텐데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시겠냐?”
“그건 그래. 그럼 형네 집에서 마시면 되잖아.”
“에헤이, 그 좁아터진 골방에서 어떻게 4명이 모여. 바퀴벌레 나오는데, 거기서 먹고 싶어?”
대찬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유채경.”
“여인네 집에 남정네 셋이 쳐들어간다고? 안 돼. 유채경이 좋다고 해도 내가 허락 못해.”
“형이 무슨 자격으로!”
“유채경 예비 남친 자격으로다, 왜!”
“헹, 행여나.”
“네가 그렇게 비웃으면 어떡하냐? 도와주기로 했잖아! 잘되게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아유, 시끄러워.”
대찬은 귀를 틀어막았다.
“당장 유채경이랑 사귀게 해 줄 거 아니면 순순히 집이라도 개방해. 그럼 오늘은 무사히 넘어가 줄 테니까.”
“알았어, 알았어. 형이 원웅이랑 채경이한테 연락 돌려. 맥주는 내가 사 놓을 테니까.”
“좋았어.”
결국 대찬은 입주 첫날에 동기들에게 집을 개방했다.
직장 동료들 자주 들이지 말라던 어머니의 말씀에 퉁을 놨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