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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6화 (105/556)

난 할 수 있어 106화

대찬은 긴장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회장님과 생각이 같으시다니 다행이네요. 회장님께서는 조대찬 사원을 필래월드몰로 전보시킬 생각이신데,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합니다.”

대찬은 냉큼 서청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겸손하게 사양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따로 있었다.

이건 후자였다.

여기서 겸손하게 사양하는 건 도리어 시건방진 일이었다.

대찬의 빠른 대답에 비서실 직원은 웃음을 머금었다.

“좋습니다. 회장님께도 그렇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려던 비서실 직원은 무언가 생각난 듯 대찬에게 말했다.

“한 가지를 깜빡하고 전해 드리지 못할 뻔했군요.”

“네?”

“회장님께선 월드몰 인수 과정에서 보인 조대찬 사원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셔서, 전보와 동시에 대리로 진급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 대리요?”

“네. 미리 축하드립니다, 조 대리님.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뚝.

전화가 끊겼다.

대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순간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조대찬 대리.

아직 입사한 지 만 1년도 되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청수 회장의 보답은 파격적이었다.

필래유통에서 조기 탈출 시켜주는 것은 물론, 신입사원 명함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두 단계나 껑충 뛰어 진급을 시켜 주었다.

대찬은 방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가족들이 깜짝 놀랐다.

조수진이 대찬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씨, 깜짝이야!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난리야!”

“미안, 미안. 어쩔 수가 없었어.”

“뭔데! 뭐 복권이라도 당첨됐냐?”

“나 대리 됐어!”

그 말에 가족들의 얼굴에 잠깐의 당혹이 번지더니 이내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지, 진짜야?”

“아들! 정말이야? 벌써 대리로 승진시켜 준대?”

대찬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방금 그룹 비서실에서 전화 받았어요.”

“아이고, 장하다, 우리 아들!”

“야! 승진 기념으로 한턱 안 쏘냐?”

“쏴야지! 거하게 쏠게! 다들 다음 주말은 비워 놓으세요. 근사한 데서 제가 한턱낼게요.”

“우리 아들 최고다!”

어머니는 대찬의 품에 와락 안겨 방방 뛰었다.

대찬도 박자 맞춰 함께 방방 뛰었고, 조수진도 손을 번쩍 들며 방방 뛰었다.

아버지 역시 덩달아 일어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을 흔들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인터폰이 울렸다.

어머니가 인터폰을 받았다.

“대찬 엄마! 나 302혼데, 애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쿵쿵 울려 대요!”

“미안해요! 우리 애가 승진해서!”

“어머, 대찬이?”

“네! 우리 대찬이 승진했어! 이제 조대찬 대리야!”

“어머, 어머! 어떡해! 축하해요!”

“고마워요! 조용히 할게!”

“10분 동안은 봐줄게요.”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조수진이 그걸 보고 물었다.

“아빠, 갑자기 어디다 전화해요?”

“안산 큰고모.”

신호음이 울리고 안산 큰고모, 그러니까 아버지에게는 큰누나 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사람을 위압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니? 갑자기?”

“어어, 누님, 잘 지냅니까?”

“잘 지낸다마는 이 시간에 웬 전화니?”

“아니, 그저 안부나 물을까 하고 했죠. 우리 사이에 뭔 일이 있어야 전활 합니까.”

“별일이구나, 얘. 나한테 잔소리 듣기 싫다고 일절 안 하던 애가.”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허허허.”

대찬의 가족들은 방긋 웃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통화를 지켜봤다.

“잘 지내는 거 알았으니 이만 끊어도 되니?”

“아, 예. 그러세요, 누님. 참, 이번에 대찬이가 승진을 했답디다.”

“뭐? 승진? 올해 입사한 애가 무슨 승진이니? 잘못 안 거 아니냐?”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회장 비서실에서 떡하니 전화가 왔다지 뭡니까.”

“으음.”

“누님도 뉴스 봐서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 필래가 월드몰 인수하는 데 우리 대찬이가 제대로 한 건 한 모양이에요!”

“…그러냐? 그거 잘됐구나. 축하한다고 전해 주렴. 이만 끊는다.”

전화가 끊기고 아버지는 시원하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가족들도 행여 큰고모 귀에 들릴까 참던 웃음을 한 번에 터트렸다.

주말이 끝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대개의 직장인은 월요병에 시달린다.

대찬도 월요병 환자였지만 이번 월요일만큼은 달랐다.

만원 지하철이 스위트룸 침대처럼 아늑했고, 외투를 여며야 하는 초겨울 날씨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십니까!”

대찬은 힘찬 목소리로 시원하게 아침 인사를 했다.

유백기는 꽁한 얼굴로 흘끗 대찬을 봤다.

‘뭐야, 저 새끼 왜 이렇게 들떴어?’

유백기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눈빛을 대찬에게 쏘던 송희근 과장의 전화가 울렸다.

송희근 과장은 한 번 더 대찬을 바라보곤 전화를 받았다.

“대외협력 3팀 송희근 과장입니다.”

“아, 송 과장님, 인사팀 서 과장입니다.”

“어, 서 과장, 아침부터 왜?”

“갑자기 오늘 그룹본사에서 인사발령이 나서요. 대외협력부 쪽에서 인원변동이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 부서? 갑자기?”

“네. 곧 인사 발령 통보서 전달될 겁니다. 확인하세요. 송 과장님도 포함돼서요.”

“뭐, 뭐? 나, 나까지? 어디로! 직급은!”

서 과장은 일방적으로 뚝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볼 일 없는 동료에 대한 예우는 그 정도 귀띔으로 다 했다고 생각했다.

송 과장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자 천원석 대리가 그에게 물었다.

“송 과장님, 무슨 일인데요?”

“우리 부서에서 인원 변동 있을 거래. 그룹 본사에서 내려온 거라 계열사 전보 조치 있을 거 같은데…….”

“예에?”

“곧 전달된댔으니 기다려 보자고.”

송희근 과장은 대범한 척 말했지만 그의 다리가 자꾸 떨렸다.

하달된 문서를 보던 한태윤 대리가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과장님, 인사 발령 통보서 내려왔습니다.”

“뭐! 내려왔어?”

송희근 과장은 우당탕 넘어지듯 한태윤 대리에게로 갔다.

다른 직원들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래와 같이 인사발령이 결정되었음을 공고합니다.

-아래-

대외협력 3팀 과장 송희근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과장(전보)

대외협력 3팀 대리 한태윤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과장(승진, 전보)

대외협력 3팀 사원 서원웅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대리(승진, 전보)

대외협력 3팀 사원 조대찬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대리(승진, 전보)

대외협력 1팀 사원 유채경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사원(전보)

대외협력 2팀 사원 허운 : 필래월드몰 전략기획실 사원(전보)

이상 끝.

송희근 과장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잠자리눈 같은 안경 렌즈에 모니터상의 활자들이 비쳤다.

“워, 월드몰!”

뜬금없는 통보였다.

필래유통에 입사한 지 15년.

남에게 밉보이지도 잘 보이지도 않은 15년 세월이었다.

무난한 회사 생활이었다고 자평하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월드몰이라니!

한태윤 대리 역시 뜻밖의 전보에 눈이 커졌다.

대찬 역시 송희근 과장과 한태윤 대리, 아니 이제 과장의 전보는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채경, 허운까지 통으로 넘어가다니.

자신의 인사를 미리 귀띔 받았던 대찬이 이 정도니 다른 이들의 충격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대외협력부는 인사 발령 얘기로 시끄러웠다.

송희근 과장이 한태윤 과장에게 물었다.

“한 대리! 아, 아니지. 한 과장, 자네 뭐 들은 거 있었어?”

“아뇨. 저도 지금 얼떨떨합니다.”

“말은 얼떨떨하다면서 얼굴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 동요가 없어? 미리 뭐 들은 거 아니야?”

“제 얼굴 원래 이럽니다.”

“하, 미치겠네!”

송희근 과장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필래유통은 서청규 사장님 손아귀에 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주총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우리 사장님, 서청수 회장한테 호구 잡힌 거 아니…….”

송희근 과장은 제멋대로 떠들어 대다가 뒤늦게 서원웅의 존재를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월드몰은 완벽히 서청수 회장의 손아귀에 있는 회사였다.

그 말인즉슨, 천덕꾸러기였던 서원웅도 거기서는 어화둥둥 도련님으로 떠받들어진다는 소리였다.

송희근 과장은 서원웅 쪽으로 곁눈질을 하며 삐질, 땀을 흘렸다.

천원석 대리는 꽁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잔류한 건 다행이다 싶지만, 동기인 한태윤 과장의 승진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건 유백기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철천지원수인 대찬을 아래에 두고 실컷 부려 먹으려고 했더니 수모는 수모대로 당하고, 이제는 직급마저 역전되었다.

그 둘은 입술이 댓발 나온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채경과 허운은 그런 유백기의 얼굴을 보고 더욱 호들갑을 떨며 대찬의 승진을 축하했다.

“대리 축하해요! 난 진짜 조 대리님이 우리 동기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

“조대찬, 인마! 아, 아니지. 조 대리 나으리, 승진 축하드립니다! 부디 절 잊지 마십시오!”

격정적인 축하에 대찬은 손사래를 쳤다.

“우리 서원웅 대리님 학연, 지연으로 그런 건데, 뭐.”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조 대리 나으리. 쇤네들도 듣는 귀가 있어서 다 압니다요. 월드몰 인수에 큰 공을 세웠다구요.”

“형, 한 번만 더 그 빌어먹을 말투로 말하면 진짜 부하 직원처럼 대한다.”

“응, 알았어. 안 할게.”

서원웅 역시 대찬에게 축하를 건넸다.

“조 대리, 진급 축하해.”

“서 대리도 축하해. 서 대리는 이제야 빛을 좀 보겠네.”

“나야 한 것도 없이 회장님 덕 본 거라 부끄럽기만 한데. 너는 진짜 떳떳하게 해낸 거잖아.”

“겸손 떨기도 지치니까 그런 종류의 입씨름은 여기까지만 하자.”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윤 과장도 대찬에게 축하를 건넸다.

“조 대리, 축하합니다. 입지전적인 진급 속도군요. 승진이야 좋은 거지만, 그만큼 책임도 무거워졌다는 걸 항상 명심하셔야 합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과장님도 진급 축하드립니다.”

한태윤 과장의 말에 대찬은 공손히 답했다.

한태윤 과장의 조언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대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쾌속 승진 열차를 탔다고 마냥 들떠 있을 순 없다.

헤벌쭉한 상태로만 있으면 빠른 승진은 도리어 독이 될 것이다.

나무가 높게 자라면 그만큼 넓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마련이다.

대찬의 빠른 승진을 몇몇 주변 사람들은 돌연변이로 치부할 것이다.

어디서나 돌연변이는 환대받지 못하는 법이었다.

이럴수록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야만 했다.

당장 축하를 건네는 유채경, 허운 역시 마음 한편으로는 부러운 마음이 싹틀 것이다.

부러움이 질투로 변하는 건, 그리고 그 질투가 혐오로 변하는 건 옷 갈아입기보다 쉽다.

대찬은 몸가짐, 마음가짐을 항상 신중히 하고 세 치 혀를 잘못 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자신에게 신신당부했다.

* * *

“있잖아,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송 과장하고 한 과장은 왜 같이 전보시킨 걸까?”

점심을 먹던 중에 허운이 툭 던지듯 말했다.

서원웅도 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대찬을 바라봤다.

“나도 그게 의아했어. 운이 형하고 채경이는 어쩌면 전보가 당연하지. 신입연수 때 나랑 얽히는 바람에 필래유통에서 당한 게 많았으니까.”

“응.”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송 과장님하고 한 과장님은 아니잖아. 왜 굳이 그분들까지 월드몰로 전보시키신 거지, 회장님이?”

“회장님 속내를 짐작하긴 어렵지만, 그냥 내 생각만 얘기해 보자면.”

대찬이 운을 떼자 서원웅과 허운, 유채경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

“원웅이 너를 배려하시려는 거 같아.”

“나를?”

서원웅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누굴 평가할 입장이 아닌 건 알지만, 송 과장님 능력이나 카리스마가 남들보다 뛰어나진 않지.”

대찬의 말에 허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은 잘 모르겠지만 카리스마는 10점 만점에 1점이지. 남들 눈치만 보는 게 나한테 보일 정도니까.”

“응. 그런 송 과장님을 핵심 부서인 전략기획실에 두는 건 원웅이 너한테 힘을 실어 주시려는 거지. 유약한 상사를 둬서 네 의견이 묵살되는 걸 막고 네 입지가 넓어지도록.”

“그럼 한 과장님은?”

“한 과장님은 보기 드문 FM이야. 융통성 없고 감정 표현이 박하지만, 그만큼 정직하고 똑 부러지는 사람이지.”

“한 과장님도 결국 내 상사인데, 그렇게 치면 송 과장님을 전보시키는 의미랑 상충되지 않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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