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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5화 (104/556)

난 할 수 있어 105화

서원웅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련히들 잘 하시겠어.”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기도뿐이야.”

이제부터는 대찬도 확신이 없었다.

대찬의 첫 번째 삶에서는 위마트의 새천년그룹이 월드몰을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필래가 월드몰을 먹으려고 한다.

만일 필래가 새천년보다 협상에 뛰어나지 않다면, 애써 만들어 놓은 기회가 물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끼어드는 건 만용이지.”

인수 협상은 무수히 많은 전문가들이 투입되는 사업이다.

대찬은 미래를 엿본 사람의 자격으로 몇 가지 힌트를 던져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런 체계적이고 거대한 규모의 사업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능력은 없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전문가의 영역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수에 관한 모든 분야의 회사 내 브레인들을 전원 인수 협상 TF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그 잘나신 두뇌들을 통솔할 사령탑을 선택했다.

“김 전무, 자네가 TF팀 지휘해.”

“알겠습니다. 반드시 만족할 만한 금액에 월드몰을 인수해 내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의 선택은 김태준 전무였다.

TF의 수장으로 그가 적격이라는 게 서청수 회장의 판단이었다.

김태준 전무는 서청수 회장의 복심으로서 그의 완전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

또한 20년 넘게 그를 보좌하면서 능력과 카리스마,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검증된 인물이었다.

“자네가 월드몰 인수만 잘 해낸다면 필래마트 대표이사 자리에 앉힐 거야.”

“알겠습니다.”

“대표이사에 앉히겠다는데 왜 이렇게 덤덤해?”

“대표이사지만 직급은 그대로 전무로 가는 거 아닙니까. 자회사니까요. 본사에서 자회사로 떨어졌으니 실질적으로는 좌천이죠.”

그 말에 서청수 회장이 싱겁게 웃었다.

“아무렴 내가 자네를 푸대접하려고. 필래마트는 자리만 잡으면 바로 별도 법인으로 독립시킬 거야.”

“그렇습니까? 그럼 승진이 맞군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이런 솔직한 사람 같으니.”

“근데 저를 굳이 필래마트 사장으로 보내시는 의도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전무보다 사장이 높은 건 맞지만 김태준 전무는 불안했다.

모름지기 신분의 높고 낮음보다 권력에서 얼마나 가까운가가 출세의 척도가 되었다.

그건 변방의 고관보다 임금의 수발이나 드는 환관이 득세하던 시절부터 통용되던 이치였다.

속내를 감추지 않는 김태준 전무의 말에 서청수 회장은 더욱 신뢰가 갔다.

“아, 섭섭하게 생각하진 말게. 중요한 자리니까.”

“물론 중요한 자리긴 합니다만…….”

서청수 회장은 눈을 빛냈다.

“원웅이를 그쪽으로 보낼 거야.”

“…예?”

“더 말하지 않겠네.”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전무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자리를 떴다.

김태준 전무는 한동안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서원웅을 후계 구도에 올려놓을 생각이신가. 나더러는 후견인 노릇을 하라고.’

김태준 전무는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필래그룹은 월드몰과 가장 먼저 인수 협상을 시작했다.

위마트 측은 자금이 준비될 때까지 협상을 유예해 달라는 의견을 월드몰에 전달했다.

하지만 월드몰은 묵살했다.

월드몰은 필래그룹 측에 자신들의 조건을 제시했다.

단순한 액수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가 제시할 조건은 3가지입니다.”

“말씀하시죠.”

“첫째, 한국 정부에서 이 인수합병을 불법으로 규정할 시, 필래 측에서 모든 법적 책임을 지는 동시에 법정 공방에 소모되는 인적, 물적 자원을 부담하십시오.”

“좋습니다.”

“둘째, 현재 한국 월드몰에서 근무하는 전 직원에 대한 고용 승계를 약속해 주십시오.”

“좋습니다.”

“셋째, 한국 시장에서의 철수 과정에서 발생할 세금을 필래 측에서 납부해 주십시오.”

“그건 어렵습니다. 철수 과정에서 발생할 세금이라지만, 결국 월드몰의 경영 과정에서 발생한 세금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대납할 책임이 전혀 없습니다.”

필래와 월드몰은 장기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합의를 봤다.

김태준 전무는 웃으면서 월드몰 측 협상 대표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 시간 수고하셨습니다.”

“모쪼록 필래의 가족이 된 우리 가족들을 잘 부탁합니다.”

“오늘의 성과를 계기로 우리 회사가 한국 대형할인점 시장의 당당한 한 축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너무 잘되진 마십시오. 배 아픕니다.”

협상은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최종 인수 금액 1조 3250억 원.

그리고 필래는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문제와, 한국 월드몰 전 직원에 대한 고용 승계를 약속했다.

인수 협상이 완료되자마자 서청수 회장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인수된 월드몰은 임시적으로 필래월드몰이라는 사명으로 서청수 회장의 수중에 떨어졌다.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전무를 필래월드몰의 대표이사로 보냈다.

“한가로운 자리 아니야. 바로 바빠질 거야. 정신 무장 단단히 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독립 법인으로 출범시킬 준비도 바쁘고, 법정 공방이 이어질 소지도 크니까요.”

“그래. 어련히 잘할 텐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군.”

“그것보다도 서원웅 군을 어느 부서에 배치시키시겠습니까?”

김태준 전무의 질문에 서청수 회장의 눈동자가 살짝 굴렀다.

“나를 떠보는군?”

“떠보다뇨, 오해십니다.”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가 묻겠네. 전략기획실과 영업부, 자네라면 둘 중 어디로 보내겠어?”

“…짓궂으십니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럼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고 보나?”

“그래도 서원웅 군을 어떻게 쓸 것인지, 회장님 의중을 여쭤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김태준 전무의 질문은 서원웅을 어디까지 키워 줄 셈이냐는 취지였다.

회사의 핵심부서인 기획실에 배치한다면, 관점에 따라서는 서원웅을 후계 구도에 넣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이 경우 김태준 전무의 역할은 단순한 후견인이 아니라 킹 메이커가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권력보다는 실무에 치중한 부서에 보낸다면 서원웅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적어지고, 김태준 전무의 역할 역시 후견인 내지는 보모 정도에 그친다.

김태준 전무로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잠깐 그의 불안감을 즐기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전략기획실로 보내.”

김태준 전무는 전율을 느꼈다.

대찬은 주말을 맞아 모처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잦은 야근과 회식 덕분에 자극적인 식당 음식에 혓바닥이 지쳐 있었다.

그러니 주말만큼은 어머니의 슴슴한 반찬으로 지친 혓바닥을 달래 줘야 했다.

네 가족은 단란하게 밥상에 둘러앉아 된장국과 조기구이, 나물 몇 가지를 반찬으로 삼아 저녁 식사를 했다.

이 자리가 기꺼운 건 대찬뿐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장성해서 제 밥벌이를 하는 대찬과 조수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머니는 아들, 딸의 국그릇에 된장국을 넉넉히 퍼 담으며 말했다.

“수진아, 이번 달 핸드폰비 많이 나왔더라. 어디에 그렇게 돈을 쓰니?”

“겨우 4만 원이야, 엄마. 그게 뭐 많다고.”

“땅 파면 4만 원 나오니? 전화랑 문자만 하는데 뭐가 그렇게 많이 나오냐구.”

조수진은 침묵이 잔소리를 벗어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인 걸 알았다.

조수진이 침묵하자 타깃이 대찬으로 바뀌었다.

“너는 양말 좀 뒤집어 놓지 마라. 양말 도로 뒤집어 놓느라 하루가 다 가. 삶의 질이 떨어진다구.”

“네네, 알았어요.”

조수진의 전술이 침묵이라면 대찬의 전술은 빠른 인정이었다.

“밤에 라면 끓여 먹고 그릇 좀 싱크대에 국물 따라 놓고 내놔라. 어려운 거 아니잖니.”

“옙, 알겠습니다.”

“그저 대답은.”

이런 일상적인 잔소리가 아버지에게는 부럽게 느껴졌다.

아버지 역시 자신의 자랑스럽고 의젓한 피조물에게 일상적인 잔소리를 건네거나 함께 어울려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조수진의 이번 달 휴대폰 요금을 몰랐다.

대찬이 양말을 뒤집어서 빨래 바구니에 내놓는 것도, 라면 국물이 흥건한 채로 싱크대에 내놓는 것도 몰랐다.

그러니 쩝, 아쉬운 입맛만 다셨다.

아버지는 아들과 딸의 얼굴을 흘끔흘끔 훔쳐봤다.

어떻게든 친근하게 말을 걸고 싶었다.

그런데 워낙에 뻣뻣한 아버지의 성질머리였다.

그 덕분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고 괜히 시비 거는 식으로 나갔다.

아버지는 조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도 애인 없냐?”

“아빠, 밥 먹다 체하겠어. 왜 갑자기 애인 타령이에요.”

“아, 아니… 무, 물어보지도 못하냐?”

“아, 진짜! 없어요! 됐어요?”

“너, 너……! 없으면 없는 거지, 소리는 왜 지르고 그래!”

“아빠가 아픈 데 건드리니까 그러지!”

“허, 허 참!”

단란하던 분위기가 급랭되었다.

대찬은 아버지의 속내를 잘 알았다.

단지 딸한테 말이나 한번 걸어 보려고 했던 건데.

‘핸드폰 요금으로 긁는 거랑 애인으로 긁는 거랑 천지 차이예요, 아버지.’

오랜 잔소리로 프로급인 어머니와 잔소리에는 영 젬병인 아버지의 차이가 명확히 느껴졌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아버지의 밥그릇 위에 조기 살을 발라 올렸다.

“아빠, 애인이야 누나가 어련히 잘 만들려고요. 누나 저래 봬도 몰래몰래 남자 잘 후리고 다닌다니까?”

“야! 내가 후리긴 언제 후렸다고 그래!”

대찬은 조수진에게 눈을 흘겼다.

“누나도 그래. 아빠가 말이나 한번 붙여 보려고 하신 말씀에 뭘 그렇게 죽자고 달려드냐?”

“내가 또 언제 죽자고 달려들어…….”

대찬은 다시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다음부턴 그냥 사근사근하게 칭찬이나 한마디 해 줘요. 저 누나 단순해서 사탕발림에 홀랑 넘어간다니까.”

“어, 어흠…….”

분위기가 다시 물렁물렁해졌다.

아버지는 할 말이 없어 입맛만 쩝, 다시다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허,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맨날 국회에서 쌈박질들은…….”

대찬은 애써 텔레비전에만 시선을 두는 아버지를 보고 피식 웃고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그러다 이어지는 보도에 눈이 커졌다.

-필래그룹이 월드몰 16개 점포를 1조 3250억 원에 인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대형 할인점 시장에서의 입지를 넓히려던 위마트와 샬롯마그넷의 시선이 크라즈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앵커의 또박또박한 발음에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대찬의 엉덩이가 반사적으로 들썩거렸다.

그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됐다!”

아버지가 대찬을 보고 말했다.

“저거 너희 회사 얘기 아니냐?”

“네, 맞아요!”

차분하던 아들의 얼굴에 짙은 홍조가 뜨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좋은 일이니?”

“좋은 일이고말고요!”

“잘됐구나.”

대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때 대찬의 전화가 울렸다.

서청수 회장의 비서실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대찬은 전광석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조대찬입니다.”

“비서실입니다. 전화 괜찮으신지…….”

대찬은 종종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가며 대꾸했다.

“예예,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가족들은 그런 대찬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렇게 좋은 일인가? 밥 먹다 말고…….”

대찬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비서실 직원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말했다.

“뉴스 보셨나요? 우리 회사가 월드몰 인수했다는.”

“예. 그렇잖아도 방금 보고 기뻐하던 참입니다.”

“회장님께서 조대찬 사원이 큰 도움을 줬다고 대신 감사 인사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급할 때는 직접 전화하더니…….’

대찬은 그렇게 속으로 궁싯거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내가 회장님 상대로 무슨 건방을 떨고 있는 거야, 지금.’

대찬은 겸손한 투로 대꾸했다.

“하하, 회장님께서 말단 사원 의견도 잘 경청해 주신 덕분에 제 짧은 소견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습니다. 다행입니다.”

“너무 겸손하신데요.”

“겸손 아닙니다.”

“회장님께서는 조대찬 사원이 월드몰 인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십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 회장님께서는 조대찬 사원이 필래유통보다는 현재는 임시로 필래월드몰로 명명된 필래마트에서 근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고 계십니다.”

비서실 직원의 말을 들은 대찬의 눈이 커졌다.

필래유통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건 대찬에게 급선무였다.

서청수 회장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부탁하기도 전에 먼저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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