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04화
얼마 지나지 않아 필래유통은 필래마트의 운영을 맡던 대형 유통 체인 사업부를 폐지했다.
아직 필래그룹이 월드몰 인수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까닭으로, 필래마트를 매각하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대형 유통 체인 사업부의 폐지는 실질적인 서청규 사장의 항복 선언이었다.
또한 이로써 필래그룹이 월드몰 인수에 전격적으로 뛰어든다는 사실을 위마트, 샬롯마그넷 등 경쟁사를 포함한 모두가 알게 되었다.
이런 서청수 회장의 행보에 우려를 표하는 측근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회장 최측근 3인방의 일원인 김태준 전무였다.
김태준 전무는 서청수 회장과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말했다.
“회장님, 이게 좋은 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음?”
“예상을 벗어난 꼼수가 처음에는 통하지만, 꼼수 일변도로 가다가는 필패입니다. 회장님께서 월드몰 인수를 너무 변칙적으로만 끌고 가는 건 아니신지…….”
“자네는 역시 정석적인 물밑 협상이 옳다고 보나?”
김태준 전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월드몰에 대한 회장님의 행보가 제가 알던 회장님이 아닌 것 같아 의아하면서도 두렵습니다.”
“아, 그렇다면 제대로 봤네. 실은 이게 내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이거든. 지금 이 서청수가 완전히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이야.”
김태준 전무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천하의 서청수가 자신이 꼭두각시임을 자인하다니.
그게 놀랍기도 하고, 김태준 전무가 아는 3인방 말고도 그를 움직이는 측근이 있다는 말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예?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누굽니까?”
“있어, 작두 타는 친구.”
“설마 만몽철학원의 그 늙은이 말입니까? 점쟁이 말을 신뢰하고 지금 이렇게 가고 계신 겁니까?”
서청수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게는 맞췄는데 그 노인네는 아니야. 그 노인네 밑에서 잠깐 배운 녀석인데…….”
평소 과묵한 성정의 김태준 전무도 그 말에 펄쩍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 점쟁이도 아니고 점쟁이 지망생 말을 듣고 조 단위가 왔다 갔다 하는 사업을 벌이신단 말입니까! 도대체 어째서……!”
“자네, 언제부터 회장 말을 그렇게 뚝뚝 끊어 먹게 됐지?”
서청수 회장이 싸늘하게 묻자 김태준 전무는 합,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그 녀석, 지식도 경험도 투철하지 못한데 지금까지 용케 잘 맞춰 왔단 말이야. 크라즈망의 눈속임도 그 녀석이 간파해 버렸다고.”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그러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어. 게다가 청규 아가리를 다물게 만든 것도 그 녀석 덕분이란 말이야. 그 코흘리개 손바닥이 조물거리면서 월드몰 인수를 실현시키고 있다고.”
“그렇다니 할 말이 없군요. 부끄럽습니다.”
“당연하지. 그 녀석 연봉이 얼마더라? 아마 자네 반의반도 안 될걸……?”
서청수 회장은 살짝 붉어진 김태준 전무의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서청수 회장은 차에서 내려 김태준 전무와 떨어져 홀로 걸어갔다.
그러면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선으로 걸려 온 전화에 대찬은 평소처럼 응대했다.
“대외협력부 조대찬 사원입니다.”
“어어, 조 사장님입니까? 꼭두각시 대령했습니다.”
“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대찬의 허리가 꼿꼿이 섰다.
“덕분에 안녕하지. 지금 사장단 회의 들어가는 길인데, 조 사장한테 결재 하나 받으려고.”
대찬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쩔쩔맸다.
“회, 회장님,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질식할 거 같습니다.”
“엄살은. 사장단회의에서 회사의 자금력을 다시 한 번 강조할 예정이야. 당연히 언론에도 소스 흘릴 거고. 어때, 괜찮은 판단인가?”
“제 짧은 소견으로는 좋은 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고맙네.”
서청수 회장은 전화를 끊고 사장단 회의에 참석했다.
계열사의 모든 사장을 거느린 자리에서 서청수 회장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이번 필래 컬쳐인더스트리의 코스피 상장으로 상당한 자금을 확보했습니다. 이로써 경쟁사를 압도하는 자금력으로 반드시 월드몰 인수를 성사시킬 겁니다.”
필래그룹은 위마트의 모기업인 새천년그룹, 샬롯마그넷의 모기업인 샬롯그룹보다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자금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물론 그룹의 덩치로 보자면 새천년그룹이나 샬롯그룹 역시 한 덩치 했다.
하지만 즉각 투입할 수 있는 여유 자금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필래그룹은 서청수 회장의 선언처럼 필래 인더스트리를 상장하면서 2조에 달하는 자금을 수중에 넣었다.
이 자금은 필래의 결정적인 무기였다.
내부에서 쥐어짜든 외부의 투자자와 손을 잡든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을 생략할 수 있으니, 전격적이고 신속한 의사 결정과 협상이 가능했다.
경제 신문들은 서청수 회장의 선언을 대서특필했다.
-필래 徐 “2兆 거금으로 월드몰 인수할 것” 엄포
-필래그룹, 물밑 협상 NO! 월드몰 인수 선언
-‘보안은 개나 줘’ 필래의 근거 있는 자신감
-앙숙 형제 단합… 월드몰, 필래 품으로?
서청수 회장이 대서특필된 건 2가지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인 인수전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인수 의사를 밝혔다.
극히 이례적이므로 이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누구나 다 아는 필래 서씨 형제의 알력에도 불구하고 필래그룹이 통일된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었다.
필래유통의 직원들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술렁였다.
쉬쉬하긴 했지만 서청수 회장과 서청규 사장의 알력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서청규 사장이 너무나도 쉽게 서청수 회장에게 양보를 해버렸다.
직원들도 어리둥절했다.
혹시나 회사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건 아닌가.
그런 걱정을 하는 상사들이 많았다.
딱히 서청규 사장과 밀접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의 보스가 맥없이 물러나는 모습이 그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다른 부서 상사들도 일도 없으면서 괜히 대외협력부로 찾아와 서원웅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어흠, 저 서원웅 씨, 혹시 말이야, 뭐 들은 거 없어?”
“예?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 이번 주총에서 말이야…….”
“아, 하하… 저도 아는 건 없습니다.”
서원웅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그렇게 오전에만 열 사람이 넘게 다녀갔다.
그럼에도 서원웅은 짜증내는 기색 없이 친절하게 답변했다.
심지어는 인사팀의 박 과장마저 은근슬쩍 다가와 서원웅에게 물었다.
“별일 없는 거지? 우리 회사.”
“…잘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까요?”
서원웅은 다른 상사들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눈빛으로 박 과장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게 다 대찬이 박 과장 덕분에 서청규의 비리를 알아챈 덕분이었다.
박 과장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란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박 과장을 보던 대찬은 묘한 상상을 했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서원웅은 날파리처럼 꼬이는 타 부서 상사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서원웅은 곤란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뜩이나 일도 많은데 너무들 찾아오시네.”
“어쩌겠어. 너처럼 속 편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서원웅을 다독였다.
그러나 내막을 모르는 허운과 유채경은 상사들과 마찬가지로 불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진짜 우리 회사 아무 이상 없는 거지?”
“우리한테 별일이야 없을 거 같긴 하지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거 같으니까…….”
대찬은 그들의 불안감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거 쓸데없는 걱정 관두고 밥이나 먹읍시다.”
“너는 걱정도 안 돼?”
“어, 하나도 안 돼. 그러니까 형도 그만하고 밥 먹어.”
대찬이 대수롭게 여기지 않자 허운도 불안감을 한 김 식혔다.
허운은 젓가락을 들면서 중얼거렸다.
“조대찬이 괜찮다고 하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단 말이야… 별 근거도 없는데.”
“형이 나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그래. 그거 심해지면 병 된다.”
“야! 내가 널 뭘 좋아해. 내가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라……!”
허운은 언성을 높여 한바탕 쏟아 내려다가 옆에 있는 유채경을 의식했다.
그는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대찬은 상황을 즐기듯 실실 웃으면서 물었다.
“내가 아니라 그럼 누군데?”
“됐어! 밥이나 먹어.”
유채경이 허운을 보면서 물었다.
“뭐야? 오빠, 누구 좋아해?”
“…아니야.”
허운은 침통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대찬도 가볍게 웃으며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대찬은 서원웅을 따로 불러 커피를 마셨다.
서원웅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기 손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당장은 일이 잘 풀리지만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니 긴장도 당연했다.
대찬은 서원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상 좀 펴. 주름 생긴다.”
“그래도 불안하니까.”
“불안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제 우리 손을 떠난 일이야. 앞으로는 회장님의 수완과 결단이 유일한 변수야.”
“만약 월드몰 인수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우린 어떻게 될까?”
“아직까진 모르지. 그래도 일단 인수에 성공하면 우리한테 어떻게든 보상이 돌아올 거야.”
“그렇겠지? 네가 아니었으면 삼촌하고의 알력 때문에 인수에 뛰어들지도 못했을 테니까.”
대찬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말은 정확히 하자. 내가 아니라 우리 덕택이야. 너 아니었으면 회장님께 귀띔할 기회도 없었을 거야.”
“그렇게라도 내 지분 인정해 주니 고맙네.”
대찬과 서원웅은 서로를 보며 한동안 웃었다.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말했다.
“회장님이 어떤 식으로 상을 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일단 한 가지부터 무조건 관철시켜야 해.”
“어떤 거?”
“이 지옥도에서 탈출하는 거.”
“지옥도라면…….”
대찬은 바닥을 발로 쿵쿵 울리며 말했다.
“이 빌어먹을 필래유통.”
“아아…….”
“필래마트를 지주회사 밑의 자회사로 새로 만든다잖아.”
“응.”
“그럼 직원들이 필요하겠지? 지주회사에서 보내기에는 업무 성격도 안 맞고 인원도 턱없이 적으니까.”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번에야말로 적기야. 회장님께 말씀드려서 필래유통에서 필래마트로 전보시켜 달라고 해.”
“그, 그러면 해 주실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아주 지옥불에 타 죽으라고 우릴 여기에 떨어뜨린 게 아니니까. 얼마나 핍박에 잘 견디는가, 그걸 알아보려고 하셨을 뿐이지.”
“그러니까 네 말은, 성장을 위한 시련이면서 동시에 시험이었다는 거지?”
“응.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낙제는 면한 거 같으니까.”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낙제 정도가 아니라 장원급제 같은데, 네 덕에.”
“회장님 기준은 더 엄격할지도 모르니까.”
대찬도 서원웅을 마주 보며 웃었다.
서원웅은 한동안 웃음을 머금다가 다시 힘 빠진 얼굴을 했다.
“어쨌거나 탈출이 확정되려면 역시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져야겠지.”
“응.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잘될 거 같으니까.”
“아버지가 큰소리를 뻥뻥 쳐 놓긴 하셨는데, 그렇다고 위마트나 샬롯마그넷이 월드몰을 포기할까?”
“포기까지는 장담할 수 없어. 그래도 상당히 위축된 건 사실이겠지. 월드몰에 2조 원씩이나 투입할 생각은 둘 다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잠깐의 위축을 위해서 우리 패를 다 까는 게 결과적으로 잘한 일일까?”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잠깐의 위축만이 목적이 아니야.”
서원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더 노리는 효과가 있다는 말이야?”
“응. 이걸로 월드몰 인수 협상은 예정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시작될 거야.”
“어째서?”
“회장님이 2조를 당장 투입할 수 있다고 하셨어. 월드몰의 예상을 웃도는 금액이지.”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정한 액수라고 시중에 떠도는 말보단 확실히 큰 금액이더라.”
“이걸로 월드몰은 서둘러 협상을 진행하려고 할 거야.”
“2조가 단순한 선언이지, 보장된 금액이 아니란 걸 월드몰도 모르진 않을 텐데.”
“응. 월드몰은 2조를 믿는 게 아니라 그 액수에 담긴 회장님의 의지를 믿고 협상을 진행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대찬은 서원웅 쪽으로 상체를 더 기울였다.
“월드몰이 원하는 건 거액의 보상금이 아니라 빠르고 안전한 철수야.”
“그걸 어떻게 장담해?”
“월드몰은 수차례 한국시장에서의 철수의사를 밝혔어. 게다가 독일시장에서도 발을 빼려고 하고 있어. 규제랑 세금 문제, 고용 승계 따위에 발이 묶이고 싶지 않을 거야.”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만큼의 자금을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려운 위마트하고 샬롯마그넷은…….”
“크라즈망에 주안점을 두고 전략을 짤 거야. 특히 샬롯은 얽힌 일들이 많아서 절대 물리적인 시간을 맞추지 못해.”
“그럼 일단 위마트하고의 경쟁인데… 이길 수 있을까?”
“승산은 충분하지. 인수 협상 TF에서 알아서 잘 논의할 거야.”
대찬은 서원웅을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