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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3화 (102/556)

난 할 수 있어 103화

필래의 내부 문건 유출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크라즈망은 어떻게든 대답을 내놔야만 했다.

크라즈망은 한국 시장 철수를 공식 부인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필래의 내부 문건 유출을 접한 경쟁 업체들의 더듬이들이 열심히 움직였다.

크라즈망의 사정에 정통한 안팎의 사람들과 무수히 접촉했다.

밥을 먹이고 술을 먹이고 돈을 먹인 결과, 그들은 크라즈망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걸 파악해 냈다.

여전히 미심쩍었던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가설이 들어맞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네, 혹시 작두 타나?”

“하하, 작두 비스무리한 겁니다…….”

대찬은 어색한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갔다.

첫 번째 삶의 크라즈망이 그랬다고 얘기할 수 없었으니.

이 일로 크라즈망이 월드몰과 동시에 매물로 나왔다.

대찬은 아무도 모르던 가설을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이 맞아떨어졌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는 크라즈망이 한국 시장에서 절대 철수할 리 없다던 참모를 자택으로 소환했다.

“일본 명인은 비행기 탔다던가?”

“…면목 없습니다.”

“일본 명인 어디 있냐고!”

“이미 30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

“쯧. 봉분의 잔디라도 뽑아 오는 정성을 보여야지. 그러니까 언제나 입조심 하라는 걸세.”

“유념하겠습니다.”

“오늘처럼 자네한테 주는 월급이 아까웠던 적이 없네. 그만 나가 봐.”

일생일대의 굴욕을 맛본 참모는 서청수 회장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그의 저택을 떠났다.

그와 교차하여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이가 있었다.

참모는 그쪽을 흘끗 바라봤다.

‘뭐야,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뭔데 회장님 댁 문지방을 넘어?’

대찬은 참모의 불편한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이 뒷짐을 진 채로 현관 밖에서 대찬을 맞았다.

“어, 왔는가.”

“현관까지 나와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 옛날 주나라의 주공단은 인재가 찾아오면 먹던 음식도 뱉었다는데, 이 정도야.”

“아이고…….”

서청수 회장의 극진한 대접이 대찬은 못 견딜 지경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안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비즈니스를 논하는 자리에 나랑 독대하는 사람은 흔치 않아. 충분히 영광스러워해도 좋네.”

“영광스러우면서도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입니다. 아찔합니다.”

서청수 회장이 피식 웃었다.

“자꾸 배짱 없는 척하지 말게. 가증스러우니.”

대찬을 식탁 앞에 앉힌 서청수 회장이 말했다.

“오늘 술은 생략이야. 맑은 정신으로 대화해야겠어.”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의 표정이 자못 심각하게 굳었다.

“자네 말대로 크라즈망의 속내가 밝혀졌어. 이걸로 월드몰 다음 차례로 나서려던 크라즈망이 월드몰과 동시에 좌판 위로 올라왔단 말이야.”

“예.”

“자네 예상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고. 잔뜩 들떠야 정상 아닌가?”

‘회장님 같으면 들뜨겠습니까? 다 알던 일인데.’

대찬은 마음과 다른 말을 했다.

“이미 혼자 방방 뛰고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허허, 이제 어떡해야 하나?”

“위마트는 월드몰과 크라즈망, 두 군데와 동시에 물밑 협상을 시작할 겁니다.”

“그렇겠지. 그렇게 월드몰과 크라즈망을 서로의 배트나(BATNA)로 이용할 테니까.”

배트나는 협상이 결렬될 경우 취할 수 있는 대안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너 아니어도 만날 사람 있다고 배짱 튕길 수 있는 카드였다.

위마트의 새천년그룹에게는 월드몰이나 크라즈망이나 가치가 비슷했다.

어차피 둘 중 한 군데만 인수해도 업계 1위를 지키고 사세를 확장하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었다.

“위마트가 월드몰 인수를 포기하고 크라즈망 인수에 사활을 걸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충격과 공포 전략으로 선제해야 합니다.”

“충격과 공포……?”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채용한 전술입니다. 압도적인 힘을 과시해서 적의 전의를 꺾어 버리는 겁니다.”

“이라크 파병 갔다 왔다고 티내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대찬은 난처한 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의 압도적인 자금력을 과시해서 위마트가 시도할 엄두를 못 내도록 해야 합니다.”

“압도적인 자금력……?”

“예. 지금 우리 회사는 필래 컬쳐인더스트리를 상장시키면서 2조 원의 목돈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새천년이나 샬롯은 그만한 사정이 안 됩니다.”

“그렇지.”

“확실한 강점을 과시하십시오.”

그 말에 서청수 회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자네는 내 목표를 잊었나? 내 목표는 월드몰을 헐값에 사들이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저 과시일 뿐, 그 비용을 실제로 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음…….”

“기업 인수 절차에서 보안은 가장 중요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다르다?”

“회장님께서 월드몰 인수에 총력을 투입할 것이라는 제스처를 천명하셔야 합니다.”

“잔뜩 위세를 과시해서 위마트가 월드몰에 뛰어들 전의를 아예 상실시키라는 말이지.”

“맞습니다.”

“어떻게 과시하는 게 가장 좋은 전략일까?”

“서청규 사장님을 이용하시죠.”

“음?”

대찬은 말을 길게 이었고, 이를 한참 들은 서청수 회장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그거, 내 앙숙을 짓뭉개고 위세도 과시하는 일석이조의 방법이군.”

* * *

서청수 회장은 서청규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전 필래유통 사옥의 기습 방문으로 잔뜩 심기가 뒤틀린 서청규 사장은 퉁명스레 전화를 받았다.

“웬 전홥니까?”

“그렇게 싸가지 없이 전화 받으면 안 될 텐데?”

“괜한 시빗거리 만들려고 건 거면 끊으십시오, 당장.”

그런 서청규 사장의 뻣뻣한 목을 부러뜨리는 데는 긴말이 필요 없었다.

문장도 필요 없었다.

유춘기 차관.

장학금.

부정 수급.

몇 개의 단어만으로 서청규 사장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잠깐 뵙죠, 형님.”

형제는 강남 필래호텔의 은밀한 공간에서 만났다.

협박을 위해선 구구절절한 말이 필요 없었다.

이미 서로의 패를 다 알고 있었다.

기다란 칼자루는 필요 없이 예리한 칼끝만 있으면 되었다.

서청수 회장이 서청규 사장에게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월드몰을 먹을 거야. 거기에 네 몫은 없어.”

“…….”

“그리고 나한테 적극 협조해. 그럼 네놈이 싸놓은 똥 치울 시간을 주지, 충분히.”

며칠 후, 필래그룹 지주회사인 필래지주의 임시 주주총회가 열렸다.

필래지주의 대표이사인 서청수 회장은 물론, 필래지주에 적잖은 지분을 갖고 있는 서청규 사장도 참석했다.

서청수와 서청규가 한자리에 모인다.

둘의 케케묵은 앙금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었다.

이건 일대 사건이었고, 사건을 좋아하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주주총회에 허둥지둥 몰려든 주주들과 이곳저곳의 기자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카메라 기자들.

주주총회장은 오일장처럼 시끌벅적했다.

“뭐야, 갑자기 주주총회를 왜 열어? 서청규 사장은 왜 굳이 얼굴을 내미는 건데?”

“일단 들어 봐야지.”

영문을 모르는 주주들과 기자들이 수군거렸다.

서청수 회장은 한없이 여유로운 얼굴로 이사석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서청수 회장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필래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이 의장으로 나섰다.

자질구레한 인사말과 실적에 대한 자화자찬, 감사 보고 뒤에 본격적인 안건을 설명했다.

의장은 제법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회사는 월드몰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 필래그룹의 새로운 가치 창출의 원동력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에 의장은 월드몰 인수의 건이 이번 임시 주주총회의 안건으로 상정합니다.”

의장의 선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월드몰 인수에 관해 설왕설래한다는 건 그룹 수뇌부에 빨대를 꽂아 놓은 몇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청수 회장과 서청규 사장의 알력다툼이 해결돼야 월드몰 인수에 뛰어들 수 있음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둘의 알력이 해소된 것인가?

주주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어떤 낌새나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발언권이 센 대주주들은 서청수 회장이든 서청규 사장이든 어느 한쪽 계파에 대개 속해 있었다.

방관하는 쪽도 둘 중 한 곳에 조금이라도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서청수 회장과 서청규 사장의 거수기와 다름없었다.

그들이 ‘예.’라고 하면 예, 라고 하고, ‘아니.’라고 하면 아니, 라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의장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 침묵은 고의였다.

그는 침묵 속에서 어리둥절한 주주들의 얼굴을 즐겼다.

정확히는 서청수 회장이 즐기도록 한 것이었다.

의장은 꽤 긴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월드몰 인수에 대하여 반대의사를 표시하거나 기타의견을 말씀하실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주식을 사들여 기업을 인수하는 일은 굳이 주주총회의 의결을 거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서청수 회장은 굳이 이를 주주총회의 안건으로 올렸다.

남들 다 들으라고 광고하기 위함이었다.

안건이 상정되자 서청규 사장 측의 주주가 손을 들었다.

의장이 그에게 발언을 허락했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주주 번호와 이름을 말하는 것도 생략하고 당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미 필래그룹에는 필래유통 산하의 필래마트가 있는데, 필래그룹에서 월드몰을 인수하면 필래마트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필래유통 측에서 결정할 일입니다만, 우선적으로 말씀드리면 필래마트는 월드몰 인수와 동시에 필래지주 측에 매각될 예정입니다. 이후 필래마트는 별도의 독립 법인으로 출범하여 필래그룹의 계열사로 운용될 계획입니다.”

서청규 사장의 평소 의견과 완벽히 대치되는 주장이었다.

이제 주주들의 눈은 서청규 사장에게로 쏠렸다.

당연히 어깃장을 놔야 했다.

그런데 서청규 사장은 불쾌한 표정만 지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의장은 확인 사살에 나섰다.

“서청규 주주님의 의견을 먼저 여쭙는 것이 여러 가지 의문점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일 듯합니다. 여기는 필래지주의 임시 주총입니다만, 결례를 무릅쓰고 필래유통 대표이사이신 서청규 주주님께 여쭙겠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일련의 계획에 필래유통 측은 적극 협조할 의사가 있습니까?”

“…….”

서청규 사장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즉답을 내놓지 못했다.

설마, 동의할 리가.

주주들은 그야말로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서청규 사장을 바라봤다.

서청규 사장은 의자의 팔걸이를 세게 쥐었다 놨다.

의장이 서청규 사장의 대답을 재촉했다.

“주주님?”

“…소.”

“다른 주주님들이 잘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있소! 그럴 의사가 있소!”

짧은 대답에 장내가 술렁였다.

저거 서청규 맞아?

소름 끼치게 닮은 사람을 대타로 갖다 놓은 거 아니야?

주주들은 혼란에 빠졌다.

의장은 빙긋 웃었다.

“서청규 주주님, 의견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안건에 대해서도 동의하시는 거지요?”

“…동의하오.”

의장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주주님들의 의견도 여쭙겠습니다. 이번 안건에 대해 동의하십니까?”

이에 서청수 회장 측의 주주들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를 외쳤다.

서청규 사장 측의 주주들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불분명하게 발음하거나 대답하지 않았다.

의장이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 주주님들은 반대 의사를 표시해 주십시오.”

“…….”

서청규 사장 측 주주들은 서청규 사장이 침묵하는 상황에서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의장은 충분한 말미를 제공한 뒤 발언했다.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주주님들이 없으므로 이 안건은 만장일치로 의결되었습니다.”

의사봉이 땅, 땅, 땅, 빠른 박자로 쳐졌다.

임시 주총은 그것으로 산회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좌우의 이사들과 악수를 나눈 후 퇴장했다.

서청규 사장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 듯 황급히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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