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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2화 (101/556)

난 할 수 있어 102화

대찬이 서원웅과 친분이 있고, 서청수 회장과도 면식이 있는 줄은 그들도 알았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이렇듯 격식 없이 대하는 줄은 몰랐다.

송희근 과장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굉음으로 울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송희근 과장을 바라봤다.

“저… 과장님, 저 먼저 점심 좀 일찍 먹어도 되겠습니까?”

송희근 과장의 몸에 전류가 흘렀다.

“다, 다, 당연하지! 얼른 가! 얼른 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웃으면서 송희근 과장에게 손짓을 했다.

“부하직원 빼돌려서 미안하게 됐어요, 송 과장.”

“아, 벼, 별말씀을요, 회장님! 조대찬 사원은 제 부하 직원이기 전에 회장님 부하 직원입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요.”

서청수 회장은 미소를 짓고는 대찬을 대동하고 필래유통 사옥을 나섰다.

서청수 회장은 좌우를 물리치고 대찬과 단둘이 식사했다.

제법 값나가는 식당을 통째로 예약했다.

서청수 회장에게는 일상적인 자리였지만 대찬에게는 다소 불편했다.

대찬은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말했다.

“이 넓은 식당에 회장님과 단둘이 있으려니 부담스럽습니다.”

“부담스러울 건 또 뭔가.”

“저 같은 말단한테는 하늘같은 분이신데요.”

서청수 회장이 풋, 웃었다.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지금 조대찬 사원이 아니라 조대찬 군으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예?”

“부하직원이 아니라 내 아들의 절친한 친구로 있는 거라고. 회장이니 말단이니 하는 말은 필요 없어.”

“그렇긴 합니다만…….”

“나랑 밥 먹는 자리가 처음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점잔을 빼고 그러나. 조 군답지 않게.”

“그럼 편하게 있겠습니다.”

“부디 그래 주게나.”

음식이 나오고 둘은 한동안 고기를 씹었다.

서청수 회장이 대찬에게 웃으며 말했다.

“와인이나 한잔할 텐가?”

“근무 중에 술이라뇨. 지금 시험하시는 건가요?”

“하하하, 그렇게 치면 나도 근무 중에 음주하는 건데 피차 같은 입장 아닌가?”

“다릅니다, 입장. 회장님은 근태 평가에 낑낑거리진 않으시잖습니까.”

대찬이 웃으며 대답하자 서청수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술은 관두지.”

“이미 음식만으로도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아비 된 입장으로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자네를 생각하면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

“부끄럽습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운 적이 없는걸요. 그건 앞으로 물심양면으로 도우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허허, 왜? 이번에도 사방팔방 뛰어다니면서 소중한 정보를 물어다 줬잖나. 그것도 자기 공로로 내세우지 않고 오롯이 우리 원웅이의 몫으로 말이야.”

서청수 회장의 말에 고기를 썰던 대찬의 손이 멈칫했다.

대찬은 고개를 들어 서청수 회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회장님, 그건…….”

“겉치레하는 말로 시간 낭비하지 말지.”

“…알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큼지막한 고기 덩이를 썰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원웅이도 제법 뻔뻔해졌더군. 남이 만들어 준 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더라니까. 실은, 그것도 자네가 그러라고 시킨 거지?”

“제가 조언했지만, 원웅이가 선택했으니 원웅이의 생각입니다.”

“능수능란한 혓바닥으로 잘 빠져나가는군.”

“감히 농락하려는 것처럼 비쳤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농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자네 선의를 믿으니까.”

“…….”

서청수 회장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웃었다.

“이왕 신세 진 거 하나만 더 물어볼까?”

대찬은 굳은 얼굴로 서청수 회장을 바라봤다.

“어떤 걸 말씀입니까?”

“내가 월드몰 인수에 관심이 있다는 걸 자네는 용케 맞췄어.”

“예. 짐작일 뿐이었습니다만…….”

“월드몰 인수에 있어 내부의 위험 요소는 자네 덕에 제거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상황은 만만치 않아.”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드몰에 군침을 흘리는 업체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때보다 비상한 전략이 필요해. 월드몰은 패잔병이야. 이 마당에 괜한 경쟁이 붙어서 비싼 값을 주고 인수하면 보람이 없어.”

“예. 아무래도.”

“그래서 말인데, 무슨 기똥찬 전략이 없을까? 헐값에 월드몰을 사들이는 전략 말이야. 월드몰은 패잔병이니 헐값이 제값이야.”

대찬은 난처한 듯 웃었다.

“왜 저한테 하문하십니까. 든든한 참모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또 자문을 보는 투자 은행도 있잖습니까.”

“물론 그렇지.”

“그쪽에 비하면 제 식견은 어린애들 장난 수준입니다.”

“당연히 자네가 그쪽보다 식견이 뛰어나진 않겠지.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냥.”

대찬은 얕은 숨을 뱉고 말했다.

“그럼 저도 부담 없이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래.”

대찬은 쥐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얌전히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 회사가 단독으로 월드몰 인수에 뛰어들면 회장님께서 말씀하시는 헐값, 제값에 사들일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 그땐 월드몰이 배짱을 못 부릴 테니까.”

“하지만 우리뿐만 아니라 위마트의 모기업인 새천년그룹도 뛰어든다고 들었습니다.”

“공식화하지는 않았지만 유력하지. 확실한 업계 1위 굳히기에 들어갈 테니까.”

“위마트가 끼면 우리 뜻대로 인수 협상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새천년이 월드몰 인수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서청수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방법이 없는걸.”

“크라즈망을 이용하셔야 합니다.”

“크라즈망?”

서청수 회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찬이 거론한 크라즈망은 서청수 회장에게는 뜬금없는 이름이었다.

크라즈망은 월드몰과 비슷한 시기에 한국 시장에 진출한 프랑스계 할인점이었다.

“새천년이 크라즈망 인수에 뛰어들면 우리는 월드몰에 단독으로 입찰할 수 있습니다.”

대찬의 말에 서청수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크라즈망이 매물로 나와야 인수를 하든 말든 하지. 크라즈망은 지금 성업 중이야.”

서청수 회장의 말대로, 크라즈망은 겉보기에 월드몰과는 상황이 달랐다.

월드몰은 누가 봐도 망해 가는 집안이었지만 크라즈망은 달랐다.

물론 매출이 떨어지고 자금 상황이 악화되는 건 월드몰과 유사했다.

하지만 크라즈망은 오히려 공격적으로 점포의 개수를 늘려 가고 있던 참이었다.

2007년, 지난해에만 15곳에 점포를 신설했다.

기존의 점포가 15곳이었으니 1년 만에 몸집을 2배로 불린 것이다.

이런 마당에 대찬의 말이 서청수 회장에게 궤변으로 들리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대찬은 주장을 꺾지 않았다.

“크라즈망의 상황은 월드몰보다도 좋지 않습니다. 회장님도 그쪽의 매출과 자금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계실 겁니다.”

“크라즈망이 절망적인 상황이란 건 나도 알아. 그러니 작년의 공격적인 점포 신설은 도박이라고 봐야지.”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크라즈망이 어떻게든 한국에서 버텨내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나?”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크라즈망은 1년 안에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겁니다. 그러려면 이제 슬슬 매각협상에 나서야죠.”

“자네의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 크라즈망이 그런 확장세를 보이는 건 본사 쪽에서도 아직 한국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야.”

“연막입니다.”

“…뭐?”

“크라즈망이 점포를 늘리는 건 몸값을 높이려는 전략일 뿐입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이 자못 심각해졌다.

그가 대찬에게 월드몰의 일을 물어본 건 가벼운 의도였다.

3살 딸에게 가갸거겨는 읊을 줄 아니, 9살 아들에게 너 구구단은 다 외웠니, 그렇게 물어보는 부모의 마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구구단을 물었더니 미적분으로 답해 온다.

서청수 회장의 태도도 사뭇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몸값을 높이다니. 그렇게 점포를 확장해 봤자 투자한 만큼의 값어치를 받기는 어려워. 중고는 반값에서 시작하는 거 모르나?”

“투자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대가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크라즈망이 점포를 늘리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야.”

“대형 할인점 시장에서 업계 1위인 위마트의 점포는 72곳, 업계 2위인 샬롯마그넷의 점포는 44곳입니다.”

“그런데.”

“샬롯마그넷이 크라즈망을 인수하면 점포 30곳을 새로 확보하게 되어 74곳이 됩니다.”

그제야 서청수 회장도 대찬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위마트가 샬롯마그넷에게 업계 1위를 뺏기게 되는 셈이죠.”

“그렇군…….”

“그렇기 때문에 작년 크라즈망이 사활을 걸고 점포의 수를 2배로 늘린 겁니다. 기존의 15곳만으로는 샬롯마그넷의 구미가 별로 당기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크라즈망이 2007년, 점포를 늘리지 않았다면 15개 점포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렇다면 샬롯마그넷의 44곳에 15곳을 추가해 봤자 위마트의 위상을 넘기는 힘들어진다.

하지만 지금의 크라즈망을 인수하면 단숨에 대형 할인점 시장에서 1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점포의 숫자에서 우위를 점하는 건 단순한 산수가 아니었다.

업계 1위라는 간판은 회사의 이미지, 신뢰, 고객 유치, 협력 업체들과의 거래에 막대한 강점으로 작용한다.

‘내가 1등이다.’

‘내가 2등이긴 한데, 1등하고 근소한 차이일 뿐이고, 우리도 나름대로 상당한 경쟁력을 갖고 있고… 이러쿵저러쿵.’

전자는 후자보다 훨씬 짧은 문장이지만 위력으로는 후자를 압도한다.

그렇기에 크라즈망의 전략이 통할 수 있었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크라즈망은 월드몰이 인수된 후 시장에 나오려 할 겁니다.”

“음, 그렇겠지.”

월드몰이 어느 기업에 인수되든, 월드몰을 인수하지 못한 쪽은 몸이 잔뜩 달아오를 것이다.

“월드몰과 크라즈망이 동시에 좌판에 깔려야 인수하는 쪽이 칼자루를 쥘 수 있습니다.”

“옳은 말이야.”

“회장님께서 크라즈망을 강제로 좌판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언론을 이용하셔야 합니다.”

“…언론?”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대찬은 오랫동안 말했다.

제법 긴 시간, 서청수 회장은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인내심 있게 들어 주었다.

대찬이 말을 마치자 서청수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들었네. 일단 자네 말은 알았어. 한번 검토해 보지.”

“짧지 않은 시간, 짧은 소견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재미있었네.”

서청수 회장은 가볍게 대꾸했지만, 실은 속이 마냥 편하지 않았다.

신입 사원이 제시한 날것의 이론을 닳고 닳은 참모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서청수 회장은 대찬과 점심식사를 마치고 저녁에 참모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오늘 재밌는 말을 들었거든? 크라즈망이 1년 안에 한국 시장에서 철수할 거라고 누가 장담하더군.”

서청수 회장의 말에 참모들의 입에서 봇물 터지듯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 냈다.

“그럴 리가요. 크라즈망은 지금 어느 때보다 공격적인 경영을 하고 있습니다.”

“철수를 계획한 마당에 그렇게 오체투지 하겠습니까? 한 달 남은 전셋집에 인테리어 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소립니다.”

예상한 반응에 서청수 회장은 슬며시 웃었다.

“그래? 그런데 나는 그게 정말인지 확인해 보고 싶단 말이야.”

“똥인지 된장인지 굳이 찍어 먹어 봐야 아는 건 아닙니다.”

“자네, 틀리면 어떡하려고 그렇게 세게 말을 해?”

“틀릴 일이 없으니까 세게 말씀 올리는 겁니다, 회장님.”

“오호라, 자네가 틀리면 어떡할래? 내가 탐내던 일본 명인 사시미칼 나한테 줄래?”

“아예 일본 명인을 모셔다가 회장님 것을 맞춤 제작 해 드리겠습니다.”

참모의 당찬 자신감에 서청수 회장은 푸하하 웃었다.

“이거 확인 안 해 보고는 배길 수가 없게 만드는군.”

“도대체 어떻게 확인하려고 하십니까?”

“그 녀석 말이, 언론에 슬쩍 흘려 보라던데.”

며칠 후, 유력 경제지에 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필래 내부 문건 유출 충격……. '크라즈망, 월드몰 매각 후 한국 시장 철수할 것'

그 기사는 필래가 경제지에 청탁한 결과였다.

내부 문건 유출을 가장해 크라즈망의 속내를 만천하에 까발렸다.

물론 이를 결심하는 데 서청수 회장은 주저했다.

“만약 자네가 헛다리짚은 거면 어떡해?”

“그래도 괜찮습니다. 내부 문건 유출이니 도덕적, 법적 책임이 없습니다.”

“쪽팔리잖나.”

“그 정도도 감수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자네가 오히려 나를 꾸짖는군?”

서청수 회장은 불쾌하지 않은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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