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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1화 (100/556)

난 할 수 있어 101화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이 단독으로 정보를 물어 왔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대찬이 동분서주, 좌충우돌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것이다.

그렇다면 서청수 회장은 그의 동분서주, 좌충우돌을 마냥 어여삐 여겨 주기만 할까.

대찬은 거기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밤중 지친 나그네가 산기슭에 유일하게 밝은 오두막에 의지하듯, 그 오두막에 인정 많은 노파가 살지, 구미호가 살지 관계하지 않듯 대찬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귀신이 나올까, 부처가 나올까.’

그런 일본 속담처럼 대찬은 불안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졌다.

그다음 주, 서청수 회장은 필래제과 평택 공장을 돌아보고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를 오래 모신 기사가 서청수 회장에게 말했다.

“댁으로 가겠습니다.”

“아니야.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가 싫네.”

“그럼 어디로 모실까요?”

“공장에서 좀 더 들어가면 옛날에 아버지가 쓰시던 사택 있어. 거기서 묵고 가지.”

혼자서 멍하니 서울보다 어두운 야경을 바라보던 서청수 회장은 마음이 적적해졌는지 휴대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 3번을 눌렀다.

액정에 서원웅 사원이라는 글자가 떴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서원웅이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서울이냐?”

“네. 집에 있습니다.”

“차 보냈으니까 준비하고 있어라.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으레 있는 일이라 서원웅은 덤덤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으레 있는 일이지만 이날만큼은 특별했다.

서원웅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평택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한밤중에 정체 없는 도로는 서원웅을 금세 아버지 앞에 내려놓았다.

서원웅은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할아버지가 회사의 밑거름을 닦던 낡은 사택 안으로 들어갔다.

서청수 회장은 반팔에 편한 추리닝 차림으로 아들을 맞았다.

“왔니. 오늘은 소주나 한잔하자. 이런 데선 값나가는 양주보다 소주가 더 맛있거든.”

“네, 회장님.”

“여기 회사 아니다.”

“…네, 아버지.”

식탁에는 기사가 공수해 온 폐계닭이 놓여 있었다.

서청수 회장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폐계닭이 평택에만 팔아서 괜히 여기 오면 이게 당긴단 말이야.”

“폐계… 닭이요?”

“응. 늙은 닭을 푹 익혀서 양념에 볶은 건데, 대단한 맛은 아니어도 평택만 오면 찾게 된단 말이지.”

서청수 회장의 폐계닭 타령이 서원웅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았다. 중차대한 일을 알려야 하는 부담 때문이었다.

수도 없이 사람을 봐 온 서청수 회장이 서원웅의 불안감을 대번에 눈치챘다.

“뭐 할 말 있냐?”

“네? 아, 그게…….”

“말이 쉽게 안 나오면 먼저 한 잔 해라.”

서청수 회장은 잔을 내밀었다.

서원웅은 아버지와 잔을 부딪치고 쓴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서청수 회장은 팔짱을 낀 채 아들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서원웅은 좀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서청수 회장에게 호출되기 전, 대찬이 한 당부를 떠올렸다.

‘설명은 짧고 분명하게 해. 어물거리고 말 더듬으면 네 정보가 아니라 남이 물어다준 정보란 게 티 나니까.’

“아버지, 서청규 사장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청규? 너한테 삼촌이자 사장 되는 사람인데. 윗사람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서청규 사장이 유춘기 교육부 2차관과 음험한 계획을 실행해서, 부정한 돈을 산하 재단으로 착복했습니다.”

“…뭐야?”

‘상대방이 가질 만한 불필요한 오해는 선제적으로 해소해 주는 게 좋아.’

“쓸데없는 이간질이나 분란을 일으키려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알아 두셔야 한다고 판단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정한 돈을 착복했다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 부자지간이라고 어물쩍댈 거면 이쯤에서 그만둬라.”

“책임질 수 있습니다. 분명한 정황이 있습니다. 듣고, 아버지께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서청수 회장은 다리를 꼬고 건들거리던 자세를 바로 했다.

차림이야 여전히 옆집 아저씨처럼 편했지만, 자세를 바로 하는 것만으로도 재벌 회장님의 위엄이 살았다.

서원웅은 최대한 차분하고 분명하게 지금까지 파악된 내막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듣던 서청수 회장의 표정도 점점 심각해졌다.

서청수 회장은 팔짱을 낀 채로 무겁게 물었다.

“확보한 증거가 있냐? 정황이 그럴싸해도 뒷받침할 증거가 없으면 헛 거다.”

‘확인된 사실은 단정적으로 말해야 해. 네가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설득하겠어.’

“유춘기 차관의 아들이자 저희 회사 직원인 유백기 사원이 적은 메모가 있습니다.”

서원웅은 메모를 촬영한 사진과 대찬이 옮겨 적은 필사본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상부에서 미리 지정해서 내려보낸 장학금 수혜자 명단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대부분 필래유통 직원이거나 필래유통의 협력업체 임원들이었습니다.”

“…정말이냐?”

“예, 모두 확인된 사실입니다.”

“멍청한 자식, 욕심도 분수껏 부려야지!”

서청수 회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서청규 사장의 상투를 잡은 것에 기뻐하기 전에, 그의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작태에 탄식했다.

서원웅은 침묵을 지켰다.

“네가 말한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놈의 비위도 빼도 박도 못한 사실이야.”

“경험 짧은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이걸 네가 단독으로 캤냐?”

서청수 회장의 질문이 서원웅의 폐부를 훅 찌르고 들어왔다.

서원웅은 얼른 대찬의 조언을 떠올렸다.

‘이건 A부터 Z까지 네가 한 일이야. 설령 내가 개입됐다 하더라도, 나는 네 지시를 받아 수족으로 일했을 뿐이야. 그걸 항상 유념해.’

서원웅은 잠깐 망설이고 대답했다.

“네, 제가 알아냈습니다.”

“정말이냐?”

“예, 정말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괜찮은 수완이다.”

‘칭찬을 하면, 겸손 떨어.’

“괜한 소릴 해서 심기나 어지럽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모쪼록 알고 계신 편이 낫기를 바랍니다.”

“당연히 낫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 기분 좋다. 대외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대내적으로는 큰 건수거든……?”

“그런가요.”

“그럼. 지금 서청규 고놈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건이 하나 있는데… 네가 마침 이걸 물어다 줬단 말이지.”

“시의적절했다니 다행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픽 웃고 물었다.

“넌 이 사실을 언제 알았니?”

“예?”

“언제 알아냈느냐고. 알아내자마자 나한테 알려 준 거 같진 않은데. 왜 하필 지금 이걸 알려 주냔 말이야.”

“그, 그건…….”

서청수 회장의 눈이 빛났다.

“타이밍을 노렸어. 맞지? 어떻게 알았어? 내가 가장 이런 것을 필요로 할 때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서원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월드몰 인수 건으로 서청규 사장님과 줄다리기를 하고 계신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근데 넌 그걸 알 만한 위치가 아니야. 어떻게 알았니!”

서원웅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서원웅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계닭 같은 거 아닐까요?”

“뭐?”

“아버지가 평택에 오셔서 저녁으로 뭘 드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 결정하시기 전까지의 아버지마저도 모르시겠죠.”

서청수 회장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도 아버지를 오래 모신 기사님은 아실 겁니다. 평택에는 폐계닭이 유명하고, 아버지께서 으레 그걸 찾으셨다는 걸.”

“아마 그랬을 거다.”

“저도 그 정도의 짐작을 했을 뿐입니다. 최근 대관업무 담당자들이 월드몰에 관한 정보를 많이 올리더라고요.”

“그런데?”

“서청규 사장님이 탐내는 물건을 아버지라고 탐내지 않을 리 만무한데… 두 분 중 누구의 손아귀로 들어가느냐가 양보할 수 없는 쟁점일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니, 역시나 공상일 뿐이지만 근거가 터무니없지는 않았구나.”

“그냥 그 확률에 걸고 지금 말씀드렸습니다.”

“녀석, 누가 필래 서씨 아니랄까 봐 너한테도 저돌적인 면모가 있구나.”

“이런 도박이 종종 통하는 것도 집안 내력이니, 제가 아버지 아들이 맞기는 한가 봐요.”

서청수 회장은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 내 피가, 우리 아버지 피가 어디 가겠냐. 그렇지, 그렇지!”

서청수 회장은 아들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격려하고는 잔을 내밀었다.

“자, 한 잔 하자. 이번 잔은 아주 잘 넘어가겠다! 달겠다!”

“예, 아버지.”

서청수 회장은 잔을 죽 넘기고 말했다.

“하지만 외부에는 절대 발설해선 안 된다. 알지?”

“그럼요.”

풋내기인 서원웅이지만 인수전에 있어 보안이 최우선적인 가치임을 모르지 않았다.

한참 술을 마시던 서청수 회장이 뒤늦은 걱정을 했다.

“그러고 보니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냐? 그 생각을 못했다.”

“병가 내겠습니다.”

“녀석이! 엄연히 따지면 나도 직장 상사야. 그 앞에서 뻔뻔하게 꾀병을 부린다고 말을 해?”

“그게 당장 술잔 내려놓고 서울 올라가는 것보다는 덜한 불효 아닌가요?”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넉살도 제법 늘었다.”

부자는 늦은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 날 아침, 서원웅이 잠에서 깼을 때 서청수 회장은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아침 일찍 예고 없이 필래유통을 방문했다.

같은 필래이면서도 적진이나 다름없는 필래유통 사옥에 서청수 회장이 찾는 일은 이례적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회사가 들썩였다.

필래유통의 임원들은 그룹 최정상부에 있으면서도 자기 주군의 적대자인 서청수 회장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난처한 모습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사옥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서청규 사장은 느닷없는 형의 방문을 보고받고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웬 행패를 부리고 난리야!”

“그, 그래도 나가서 알은체라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양반이 예고도 없이 쳐들어왔는데 살살 기라는 소리야? 난 안 나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예, 예엡!”

“동향은 분 단위로 보고하도록 해. 허튼짓할 거 같으면 그 즉시 알리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쾅, 탁자를 내리쳤다.

서청수 회장의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은 순식간에 사옥 전체로 퍼졌다.

대외협력부 사무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동식 부장이 짧은 다리로 허둥지둥 뒤뚱거리며 직원들에게 말했다.

“저, 전부 자기 자리로 가! 절대 자리 이탈하지 말고 업무에 열중해! 열중 못하겠으면 하는 척이라도 해!”

양동식 부장의 채근에 직원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이른 시간에 갑자기 왜……?’

대찬 역시 어리둥절한 와중에 허리를 꼿꼿이 폈다.

서청수 회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양동식 부장이 부리나케 뛰어나가 그를 맞았다.

대외협력부 사무실 안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던 인물이, 서청수 회장 앞에서는 졸개도 저런 졸개가 없었다.

거수경례만 올려붙이지 않았다 뿐이지, 숫제 이등병의 모습이었다.

“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대외협력부장 양동식입니다!”

“어, 양 부장, 수고가 많아요.”

“아, 아닙니다!”

“우리 유통 대외협력부에서 올린 보고는 나도 종종 받아 봅니다. 솜씨들이 좋던걸.”

“감사합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양동식 부장에게 싱긋 웃고는 사무실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서청수 회장의 짙은 향수 냄새가 가까워질수록, 꼿꼿한 정자세로 앉아 일에 열중하는 척했다.

대찬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모니터에 시선을 꽂은 대찬의 코를 진한 향수 냄새가 맹렬히 찌르고 들어왔다.

서청수 회장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

대찬은 허리를 더 꼿꼿이 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텁, 서청수 회장의 손이 대찬의 어깨를 짚었다.

“어이, 빈 모니터를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어?”

“회장님.”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청수 회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들이랑 점심이나 한 끼 하려고 들렀는데 마침 병가를 냈지, 뭐야.”

“예. 오늘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병가 냈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조 사원.”

“네.”

“오늘 아들 대타 좀 뛰어 줘야겠어. 모처럼 좋은 식당 예약했는데 날리긴 아쉽잖아. 나도 어렵게 낸 시간이고, 노쇼도 매너가 아니고.”

서청수 회장의 말에 대외협력부 직원들은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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