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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100화 (99/556)

난 할 수 있어 100화

대찬은 침착하게 둘러댔다.

“실은, 허운 사원과 커피나 한잔할까 했는데 이 근방에 박 과장님이 사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례를 무릅쓰고 인사라도 한번 드리려고…….”

“그런데 왜 우리 아들 얘기부터 꺼냈죠?”

“하하, 넉살 좀 피운다는 게…….”

박 과장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주말에 안면도 없는 상사를 불쑥 찾아오고 이러는 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대찬은 즉각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신입사원이라 예의에 미숙했습니다. 그저 인사드리려고 찾아뵌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속 보이는 방문은 오히려 독입니다. 아첨은 그 자체로 나쁘지만, 내놓고 하는 아첨은 그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리석었습니다. 과장님께 잘 보이려는 얄팍한 생각이었습니다.”

“뭐, 알았다니 더 말 안 합니다.”

“반성하고, 앞으로는 업무를 통해 저를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박 과장은 피식 웃었다.

“알았다니까.”

“과장님의 가르침, 뼛속 깊이 새기고 다시는 오늘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찬은 꾸짖은 쪽이 되레 민망할 만큼 저자세로 사과했다.

박 과장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음에 회사에서 봅시다.”

“예. 주말 편히 쉬십시오, 과장님.”

박 과장은 문을 쿵 닫았다.

문이 닫히자마자 대찬은 허겁지겁 달아나듯 골목 어귀를 돌았다.

허운 역시 적잖이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뭐, 뭐야? 왜 박 과장이 저기서 나와?”

“도대체 무슨 박 과장이야?”

“인사팀 박 과장. 저번에 우리 팀 회식할 때 우연히 같은 식당에서 마주치고 통성명했거든.”

“알아본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 근데 박 과장이 왜 저기서 나오느냐고.”

대찬은 박 과장의 연립주택에서 한참 벗어난 골목에서 한숨을 돌리고 찬찬히 상황을 짐작했다.

장학금은 기본적으로 저소득층이나 재래시장 상인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다.

박 과장은 어느 곳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오히려 내부자였다.

허름한 연립주택이지만 이 근방은 애초에 지가가 높았다.

대기업 과장의 월급으로 가난에 허덕댈 확률도 적었다.

그러니까 박 과장은 장학금 수혜의 부적격자였다.

그럼에도 윗선은 박 과장의 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이득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 이상의 탐문은 불필요해. 위험하기도 하고.”

“응?”

“형, 그만 집에 들어가 봐.”

“뭐야! 무슨 불러낸 지 30분 만에 집에 가래? 사람 똥개 훈련 시켜?”

“안 그럼 방금 같은 상황이 계속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

허운은 더 항의하지 못했다.

첫 물질에 박 과장이 걸린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명단에 수록된 또 다른 학생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필래유통의 직원이지 말란 법이 없었다.

도리어 박 과장 같은 경우가 허다할 가능성이 높았다.

대찬은 기어코 허운을 다시 돌려보냈다.

허운은 진한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자기 몫은 분명히 챙겼다.

“너 약속한 거 잊으면 안 된다? 유채경하고 잘되게 해 준댔다, 분명히!”

“알았어, 알았어. 나 못 믿어?”

“널 어떻게 믿냐? 여우 같은 놈! 너구리 같은 놈!”

대찬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운을 보냈다.

대찬은 월요일에도 야근을 자청했다.

회사에서 맡긴 업무는 없지만 스스로 맡은 업무가 있었다.

대찬은 회사 비상 연락망을 입수했다.

그곳에는 직원들의 주소까지 모두 적혀 있었다.

그는 장학금 수혜 대상 명단에 적힌 주소를 일일이 비상 연락망의 주소와 대조했다.

그 결과, 명단에 적힌 134명의 수혜 대상 중 42명이 필래유통 직원의 자녀로 확인되었다.

“인사팀 박 과장… 기획실 곽 과장, 송 차장, 원 과장. 백화점사업본부 권 차장, 우 차장, 성 과장, 김 과장…….”

적힌 이름들은 모두 사내 핵심 부서의 중간 관리자급 직원들이었다.

대찬은 약한 전율을 느꼈다.

모두 장학금 수혜 대상으로는 부적격자였다.

나머지 92명 중에서 대부분의 신원도 대찬은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의 다수는 필래유통의 핵심 협력 업체 소속 중역들이었다.

주로 필래유통에 단단히 목줄이 쥐인 연약한 업체들이었다.

“그러니까 믿을 만한 놈, 배신하지 않을 놈들의 자제들을 명단에 올렸다는 건데…….”

이렇게까지 꼼꼼히 정성을 기울인 일이라면, 숨기고자 하는 바가 그만큼 추악하고 부끄러운 것일 터.

즉, 서청규 사장의 약점이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이상으로 파고드는 건 대찬 단독의 능력으로는 벅찼다.

게다가 무리하게 파고들다가 덜미라도 잡힌다면, 모처럼의 좋은 건수가 도리어 대찬의 목을 찌르고 말 것이다.

대찬은 퇴근길에 조용한 곳에서 서원웅과 단둘이 만났다.

서원웅은 영문을 몰랐다.

“왜? 어제도 야근해서 피곤할 텐데 굳이 나랑 단둘이 자리를 가져?”

“할 말이 있어서.”

“응, 해 봐.”

대찬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낸 사실의 자초지종을 서원웅에게 말했다.

서원웅의 얼굴은 말을 들을수록 심각해졌다.

“그럼 나 빼고 채경이한테 전부 장학금 관련한 일을 몰아줬던 건…….”

“보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거겠지.”

“그럼 유춘기 차관이 재단 쪽에 장학금을 지급하는 대가로 유백기 선배의 잘못을 무마해 줬단 말이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장학금은 명목상 내부자들에게 지급됐고. 아마 현금은 서청규 사장 주머니로 들어갔겠지.”

“유춘기 차관이 자기 아들 구명하자고 그런 위험한 수를 뒀단 말이야?”

“단순히 이번 한 번만의 효용을 위한 건 아니겠지.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몰라. 천덕꾸러기 아들을 전도유망하게 만들기 위해서.”

“서청규 사장도 그렇지,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리스크가 큰 만큼 실익도 크지. 애초에 서청규 사장이 재단을 만든 목적을 생각해야 해. 사회에 기여하고 공익을 추구하려고 만들었을까?”

“그게 아니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야, 네 아버지에게 맞설. 당연히 모금은 이런 찝찝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이뤄지는 거고.”

서원웅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얘기를 지금 왜 나한테 해 주는 거야? 곧바로 그룹 본사에 알려도 될 텐데.”

“이건 나보다 너한테 더 유용한 건수니까.”

“뭐라고?”

“이 정보는 회장님께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이걸 내가 터트리는 것보다는 네가 터트리는 게 더 맞아.”

“어째서?”

“어째서긴. 내가 터트리면 일개 내부 고발자에 불과하지만, 네가 터트리면 일약 회사 내에서 존재감을 확 띄울 수 있어.”

서원웅은 그 말이 다소 부담이 되었는지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럼 바로 아버지께 알리면 될까?”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장 효과가 클 때 터트려야지. 대외적인 효과도 노려야 하지만, 대내적인 효과도 잡아야 해.”

“대내적이라면?”

“네 아버지 서청수 회장님이 가장 목말라하실 때 네가 물 한 바가지를 건네야지. 그러니까 회장님이 서청규 사장과 대립각을 세우려 하실 때, 그때 이걸 알려 드려야 해.”

“하지만…….”

서원웅이 불안한 시선으로 말하려는 걸 대찬이 차단했다.

“알아.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건 불안하지. 손에 시한폭탄 들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게 맞아.”

단호한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투정 같은 말을 꿀꺽, 목구멍 뒤로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서원웅에게 들려 준 패를 활용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11월 즈음이 되자 대관업무팀의 보고서에 한 대형 마트 체인의 이름이 빈번히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월드몰.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1위의 대형 마트 체인이었다.

1998년 한국에 처음 상륙한 월드몰은 점포를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월드몰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출이 급감했다.

월드몰이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는 한국인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기울어져 가는 한국 월드몰의 모습을 필래유통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월드몰은 필래유통과 동종 업계였다.

더군다나 필래유통 역시 야심차게 필래마트를 출범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전례가 있었다.

지금 월드몰의 몰락이 마냥 남 일 같지 않아 동병상련의 마음이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어쨌거나 필래유통에는 아직 한 곳의 점포가 남았으니 월드몰은 명목상 필래유통의 경쟁사였다.

그래서 필래유통 역시 대관 업무 담당자들을 비롯한 레이더망을 월드몰에도 뻗치고 있었다.

그런 월드몰이 슬슬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액션을 취하고 있다는 정보가 일관되게 상부로 보고되고 있었다.

그 정보는 대찬의 귀에 다르게 들렸다.

대찬은 이미 첫 번째 삶에서 월드몰이 한국시장에서 철수하는 과정을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 월드몰 인수에 필래그룹도 관심을 보였지.’

하지만 필래그룹은 최종적으로 월드몰 인수전에 뛰어들지 않았다.

이유는 형제간의 갈등이었다.

서청규 사장은 월드몰을 인수해 필래마트 간판을 걸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야 필래유통 산하의 사업부로 둘 수 있는 까닭이었다.

당연히 서청수 회장은 월드몰을 인수한 필래마트를 별개의 계열사로 분리하여 서청규 사장의 입김이 닿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결국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통일된 견해를 도출하지 못하고, 필래그룹은 월드몰 인수에 뛰어들지 않는다.

결국 기존의 강호였던 위마트가 인수전에 뛰어들어 월드몰을 잡아먹는다. 월드몰을 잡아먹고 대형 마트 시장의 1위 자리를 쭉 고수하게 된다.

‘서 회장은 월드몰 인수에 관심이 있어.’

대찬은 그렇게 확신했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에서 바뀐 것이라곤 대찬의 인생뿐이다.

그게 서청수 회장의 월드몰 인수에 대한 생각을 바꾸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부쩍 월드몰에 대한 동향 보고가 대관업무 담당자들로부터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다.

즉, 서청규 사장 역시 여전히 월드몰 인수에 적극적이라는 뜻이었다.

대찬은 서원웅과 단둘이 만났다.

“요즘 회장님하고 가끔 만나?”

“보는 눈이 있으니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생각나시면 동해 별장으로 부르셔.”

“보통 주기가 어떻게 되는데?”

“격주에 한 번 주말에? 안 찾으실 땐 한 달에 한 번 부르실 때도 있고.”

“최근에 회장님하고 만난 건?”

“지지난 주 토요일, 그땐 일본에서 들어오시는 길에 강화도에서 뵀어.”

강화도에는 서청수 회장의 불륜 상대이자 서원웅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만간 찾으시겠네.”

“확신은 못하지만, 지금까지 패턴을 보면 그렇지.”

“그럼 다음 번 만남이 타이밍이네.”

서원웅은 순진한 눈을 깜빡거렸다.

“타이밍이라니……?”

“그때 회장님께 말씀드려, 서청규 사장하고 유춘기 차관이 벌인 일들을.”

“왜? 아버지가 가장 목말라하실 때 알려 드리라며?”

대찬은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이 그때야.”

“지, 지금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이 잘되면, 지긋지긋한 우리들 필래유통 라이프도 이걸로 청산이야.”

대찬은 제법 많은 품을 들여 서원웅에게 지금이 왜 적기인지를 설명했다.

듣는 귀 있는 서원웅도 충분한 설명 끝에 완전히 대찬의 의중을 이해했다.

서원웅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말씀드릴게.”

“그래. 잘할 거야, 너라면.”

대찬은 미더운 눈빛으로 서원웅을 바라봤다.

서원웅의 목울대가 빈번히 일렁거렸다.

긴장의 표시였다.

대찬이라고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이건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과는 규모와 차원이 달랐다.

대찬이 열심히 좌충우돌하며 얻은 이 정보가 서청수 회장이 보기에는 어린애들 장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있었다.

또 설령 그 정보가 서청수 회장에게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대찬의 목표는 서청수 회장의 이익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서원웅이 서청수 회장의 확실한 총애를 얻고, 대찬 역시 그 반사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서원웅이 그 정보를 제공했을 때 서청수 회장의 반응이 마냥 긍정적이라 단정할 수 없었다.

사냥개가 주인에게 토끼를 물어다 줬을 때 돌아오는 것이 토끼의 부산물일 수도, 혹은 펄펄 끓는 솥일 수도 있는 까닭이었다.

서원웅이야 서청수 회장의 핏줄이니 그럴 염려가 없다손 치더라도 대찬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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