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9화
양철 차장의 교육부 관련 정보를 대찬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었다.
-내년부로 현재 수혜 중인 장학 프로그램이 수정될 예정 : 현재 수급한 장학금에 대한 증빙 검토가 다소 느슨해질 가능성
-Y VM, CEO와 지속적인 상호 협력 의사 강해
“Y VM?”
대찬은 잠깐 고심하다가 곧 답을 얻었다.
CEO는 말 그대로 서청규 사장을 의미할 거다.
Y VM의 Y는 유춘기의 영문 이니셜일 테고, VM은 Vice Minister, 즉 차관을 의미할 테다.
“지속적인 상호 협력을 한다……?”
게다가 양철 차장은 현재 수급한 장학금에 대한 증빙 검토가 느슨해질 것이라는 예측을 굳이 서술했다.
그 말인즉슨, 증빙 검토가 느슨해질 거란 정보가 윗선에 유용할 것이란 뜻이다.
대찬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양철 차장의 장학금에 관한 정보는 다시 유백기의 메모에 적힌 장학금이란 말로 이어졌다.
‘유춘기 차관, 수상한 장학금 수급…….’
대찬은 유백기의 메모를 양철 차장의 정보와 대조했다.
“안전한 사람을 섭외해서 장학금 수급을 증빙한다라……. 명단은 윗선에서 내려 보낸 것이고.”
대찬은 팔짱을 낀 채 한참을 생각했다.
돌부처처럼 자세를 고치지 않고 한참을 그랬다.
그때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비밀스러운 궁리를 하던 와중에 갑자기 소리가 들리자 대찬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허운에게서 온 전화였다.
대찬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뭐야? 한창 잘 놀고 있을 때 웬 전화야. 나 없으니까 재미없지?”
“아닌데? 완전 재밌게 놀고 있는데? 너 없는 거 티도 안 나는데?”
대찬은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왜 전화했어?”
“야근 끝났으면 집으로 도망가지 말고 합류하라고 전화했지.”
“안 돼. 오늘 밤샘이야.”
“뭐? 밤을 새운다고?”
“그래. 아주 죽을 맛이다.”
“아이고, 고생해라.”
“내 몫까지 재밌게 노슈. 아, 형, 잠깐만.”
“왜?”
“채경이 잠깐 바꿔 줘.”
허운은 순순히 유채경에게 휴대폰을 넘겨줬다.
“어, 오빠, 왜?”
“다음 주부터 장학금 수혜 대상 명단 작성한다고 했지?”
“지금 심술부리는 거야? 한창 노는데 갑자기 웬 일 얘기람.”
“질투 나서 그런다. 혹시 그 명단 윗선에서 내려온 거 있어?”
“어어. 아직 대상 지정이 시작 안 돼서 완성본은 없는데, 임원급에서 지정한 대상들이 있다고 해서 일단 그 명단은 갖고 있지.”
“혹시 그 명단 좀 볼 수 있을까?”
“왜?”
“업무차 참고 좀 해야 할 거 같아서.”
윗선에서 내려온 서류를 달라니, 보통의 경우라면 망설였을 일이다.
하지만 유채경은 대찬에게 순순히 자료를 넘겨주었다.
대찬이 같은 부서이면서, 동기이면서, 그리고 적잖은 시간 함께 지내면서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신뢰가 있는 까닭이었다.
“문자로 내 PC 비밀번호 보내 줄게. 업무 폴더 들어가면 바로 볼 수 있을 거야.”
“고마워. 마저 잘 놀고.”
“그래. 오빠도 수고해.”
대찬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유채경을 붙들었다.
“아, 채경아, 잠깐만.”
“응?”
“허운, 노래 잘 부르디?”
대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채경은 소리 내서 웃었다.
그녀는 한참 웃다가 대답했다.
“아니? 노래 부르랬더니 귀신 소리 내고 장난 아니었어.”
“…그래, 알았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곧장 유채경의 자리로 가서 명단을 확인했다.
과연 장학금 수혜 대상자가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결정된 이름들이 있었다.
대찬은 그걸 출력해서 따로 보관했다.
명단까지 확보한 그는 다시 업무에 열중했다.
업무를 종료한 시간은 오전 4시 20분.
등에 귀신이라도 올라탔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대찬은 회사를 나와 근처의 사우나로 향했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갔다.
절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탕에 담근 몸은 국물에 끓여 낸 푸성귀처럼 무기력해졌다.
그는 그렇게 7시까지 무기력하게 풀어진 채로 탕에 있다가 다시 출근했다.
꼭 남이 조종하는 꼭두각시가 된 듯 사지가 제멋대로 놀았다.
유백기는 출근하자마자 대찬에게 물었다.
“일은 다 끝냈어?”
“네. 부장님 자리에 갖다 놨습니다.”
“야, 나한테 컨펌도 안 받고 부장님 자리에 바로 갖다 놓으면 어떡해?”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제깟 게 발견할 정도의 오류가 있으면 진즉 고쳤을 거다.
이건 굳이 10년 경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장담할 수 있었다.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선배님 자리에 복사본 올려놨으니 참고하십시오. 아마 오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다 하나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그렇게 건방을 떠냐?”
“하나라도 안 잡힐 걸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건방이 아니고 자신감이에요.”
할 일을 남한테 떠넘겨 놓고 여자랑 시시덕거린 놈에게 고분고분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찬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다시 제 업무를 봤다.
유백기는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대찬을 쏘아보고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서류를 꼼꼼히 검토했지만, 그럴 만한 건수는 발견되지 않았다.
허운은 아슬아슬하게 정시에 출근했다.
대찬은 지나가던 길에 허운의 자리에 잠깐 들렀다.
“어제 유채경한테 점수 좀 딴 거 같아? 노래 한 곡 잘 뽑았어?”
“보, 보통은 된 거 같은데.”
“형은 스스로를 좀 객관적으로 봐야 할 거 같다.”
대찬은 피식 웃고 자리를 떴다.
허운은 그 말뜻을 짐작하지 못하고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대찬에게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보냈다.
-객관적으로 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채경이가 어제 형 노래 실력 꽝이랬어.
충격에 휩싸인 허운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 후에 답장했다.
-그럼 나 어떡하냐?
-채경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일단 형이 잘하는 걸 찾아서 보여 주는 게 더 낫겠다 싶다.
-내가 잘하는 거?
-어. 채경이 눈에서 하트 뿅뿅 나올 수 있는 걸로 생각해 봐.
-좋아. 알았어.
그날 저녁, 대찬은 자신의 조언을 후회했다.
아직 유채경과 단둘만의 약속을 잡기 부담스러웠던 허운은, 서원웅과 대찬까지 데리고 한 라멘집을 찾았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주문했다.
“여기 슈퍼 점보 라멘 하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15분 안에 다 먹으면 공짜, 맞죠?”
“네, 맞습니다!”
허운의 앞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라멘이 놓였다.
올라간 차슈만 해도 삼겹살 1인분은 족히 돼 보였다.
국물까지 다 마셔야 성공이라고 하는데, 국물로는 강아지 목욕도 시킬 판이었다.
면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15분의 타이머가 시작되었다.
대찬, 유채경, 서원웅, 셋은 정상적인 양의 라멘을 시켜 놓고 허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허운은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허겁지겁 슈퍼 점보 라멘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
대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런 허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유채경 역시 젓가락을 그릇에 담근 채 시선은 허운에게로 향했다.
허운은 정말 게걸스럽게 먹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주변 손님들의 시선까지 모두 빨아들일 정도였다.
허운은 14분 42초 만에 슈퍼 점보 라멘을 국물까지 해치웠다.
허운은 물 한 잔을 죽 들이켜고 가슴을 쾅쾅 두드리다가 트림을 참지 못하고 드으윽, 입으로 가스를 방출했다.
유채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4명의 동기들은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허운이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정도면 유채경이 반했을까?”
“뭐?”
“부족한가? 대방동에 점보 돈가스 도전하는 곳 있는데 다음은 거길 가 봐?”
“허!”
대찬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운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 반응은?”
“형! 도대체 무슨 말이야. 설마 죽어라 라멘 먹었던 게 유채경한테 어필하려고 그랬던 거야?”
“어, 어어?”
대찬은 답답한 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형은 진짜…….”
“야, 그래도 유채경이 나한테서 눈을 못 떼던데?”
“동물원 고릴라가 탭댄스 추고 있으면 사람들이 눈을 못 떼겠지. 근데 그게 사랑스러워서야? 신기해서지.”
“그, 그럼 내가…….”
“탭댄스 고릴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어. 도대체 그걸로 점수 딸 거라는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
“안 되겠다. 내가 도와줄게, 확실하게.”
“어, 어떻게?”
“맨입으로는 안 되고, 주말에 나랑 뭐 좀 하자.”
“맨입으로라니? 내가 유백기한테서 유채경 지켜 주는 대가로 네가 나 도와주기로 했잖아?”
대찬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거야 그때 얘기고. 싫음 관둬. 형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개새끼.”
허운은 대찬을 노려보며 결국 항복했다.
주말.
대찬과 허운은 따로 만났다.
허운은 툴툴거렸다.
“하, 주말에 회사 동기랑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루 종일 그렇게 툴툴거릴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가.”
허운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너무 매몰차다, 야. 그래서 왜 불러낸 건데?”
“오늘 발품 좀 팔아야 돼.”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운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사람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간단한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허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뭔데?”
“형이 굳이 알아서 좋을 건 없어.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이니까.”
그런 대찬의 말은 진심이었다.
유춘기 차관과 서청규 사장 사이의 연결 고리를 캐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는 떳떳하지 않고, 음습하고 비겁할 확률이 높았다.
허운에게 일러줘 봤자 부담만 커질 뿐, 좋을 것이 없었다.
허운도 그런 기운을 감지했는지 입을 다물고 더 캐묻지 않았다.
대찬은 명단에 있는 수급자, 대찬의 마음에는 이미 부정수급자들 중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이들과 접촉했다.
중요한 건 절대 수상한 사람으로 보여선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되면 서청규 사장이든 유춘기 차관이든, 미심쩍은 점을 발견하고 선제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꼬리를 감출 것이다.
명단을 보던 허운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집이 제일 가깝네. 여기부터 가 볼까?”
“여긴 걸어서도 가겠네. 그러자.”
대찬은 선선히 허운의 제안에 응했다.
일행의 걸음은 한 연립주택 앞에 머물렀다.
대찬은 근처 슈퍼에서 12개들이 음료수를 사 들고 문 앞에 섰다.
대찬이 허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긴장하지 마. 수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까. 말은 내가 할 테니까 형은 가만히 있어.”
허운은 척 보기에도 얼굴에 긴장이 잔뜩 번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새소리가 났다.
곧 인터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고 대꾸했다.
“안녕하십니까. 잠시 말씀 좀 여쭈려고 찾아왔습니다.”
“안 믿어요.”
“종교 권유 아닙니다.”
“안 봐요.”
“신문 아닙니다. 혹시 박세운 학생 댁 아닙니까?”
“…우리 아들내미인데요.”
“잠깐 아드님 관련해서 말씀 좀 드리려 합니다.”
대찬이 명단에 있는 학생의 이름을 얘기하자 문이 열렸다.
그런데 대찬에게 함구령을 받은 허운이 대찬보다도 먼저 입을 열었다.
“바, 박 과장님!”
“응? 자네 대외협력부 허 사원 아니야?”
“아, 안녕하십니까!”
찰나의 순간에 대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대찬은 얼른 박 과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외협력 3팀 사원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어, 그래요. 근데 주말에 웬…….”
대찬은 얼른 음료수부터 넘겼다.
“일단 이거 받으십시오. 별거 아니지만.”
“고마워요. 근데 우리 아들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고…….”
실수다.
회사 상사인 줄 알았다면 아들의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