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8화
식사를 마치고 대찬은 허운과 흡연실로 향했다.
허운이 대찬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뭐야, 너 어떻게 알았어?”
“뭘?”
“유채경이 노래방 환장한다는 거.”
“우리 또래 중에 노래방 싫어하는 사람 얼마 없잖아?”
“싫어하지 않는 거랑 환장하는 거는 완전 다른 얘긴데.”
“아, 뭘 꼬치꼬치 캐물어.”
“네가 유채경하고 썸싱 있는 거 아닌지 의심하는 거 아냐, 지금.”
“절대 아니니까 염려 붙들어 매셔.”
대찬은 그렇게 얼버무렸다.
유채경은 딱히 취미가 없는 사람이었다.
뭘 해도 의욕이 없고 시큰둥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노래방에는 환장했다.
이건 대찬이 첫 번째 삶, 유채경을 데면데면한 상사로 알고 지내던 적에 습득한 정보였다.
회식자리를 문상객처럼 침울한 얼굴로 지키던 유채경, 당시 대리는 노래방으로 가자마자 180도 돌변했다.
우연히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된 대찬은 그 당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녀의 취향을 강제로 들었다.
“나는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좋아요. 랩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
“래, 랩이요?”
“그래요. 딱 보니까 조대찬 씨는 랩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거 같네? 아쉽게도.”
‘랩 잘해서 그쪽 눈에 들고 싶은 생각 별로 없거든요.’
당시 별 쓸데없는 말을 다 한다고 생각했던 대찬은, 두 번째 삶에서 그 정보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채경이는 랩 잘하는 사람 좋아한대. 형, 힙합에 관심 좀 있어?”
“히, 힙합? 나 잘 모르는데.”
“하나 연습해 가. 혹시 알아? 유채경 눈에서 하트 뿅뿅 나올지.”
“힙합이라…….”
허운은 영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허운은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난 핸들이 고장 난 eight톤 트럭. 내 인생은 언제나 삐딱선. 세상이란 학교에 입학 전. 나는 꿈이라는 보물 찾아 유랑하는 해적선 like one piece sun comes up and down…….”
그걸 보고 2팀 팀장인 오 과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허운! 아까부터 자꾸 중얼중얼 뭐야? 신경 쓰여 죽겠네.”
“아, 아! 죄송합니다…….”
허운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만 ‘난 핸들이 고장 난 eight톤 트럭’을 중얼거렸다.
건너편의 대찬은 그걸 보고 소리 죽여 웃었다.
‘이따 볼만하겠는데.’
대찬은 허운의 단독 콘서트를 관람할 생각에 얼른 퇴근 시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찬의 바람은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오후 5시 58분.
퇴근 시간이 임박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때 옆자리의 유백기가 대찬을 불렀다.
“조대찬.”
“네.”
“자.”
유백기는 대찬의 책상 위에 서류철을 한 아름 올려놨다.
대찬은 그걸 물끄러미 보다가 유백기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대관업무 담당자들이 현장에서 수기로 작성한 정보들이야. 취합해서 한눈에 보기 쉽게 파일 1개로 정리해 놔. 폼은 매뉴얼에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고.”
이제 분침은 58에서 59로 넘어갔다.
퇴근 1분 전이다.
대찬은 표정 관리를 하며 최대한 호의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인가요? 혹시 아니라면 내일 출근해서 오전 중으로 끝내 놓겠습니다.”
“안 돼. 급하게 처리할 일이야. 출근하자마자 부장님께 보내 드려야 돼.”
“그런가요.”
대찬은 겉으론 웃었지만 속으로는 육두문자를 속사포처럼 쏘아 댔다.
‘그럼 진즉 주든가, 이런 개…….’
6시 정각.
남의 눈치 안 보는 이들은 칼같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대찬이 유백기에게 물었다.
“유 선배도 남아서 같이 하십니까?”
“오늘 제사가 있어서 그렇게 못할 거 같네.”
“그래요?”
“어.”
‘개새끼.’
6시가 조금 넘자 송희근 과장이 짐을 챙겨 일어났다.
“슬슬 퇴근들 할까? 부장님 외근 나가셔서 눈치 볼 필요도 없는데.”
송희근 과장의 말에 천원석 대리와 한태윤 대리도 짐을 챙겼다.
“퇴근하시죠.”
유백기도 주섬주섬 외투를 입으며 일어났다.
대찬만 가만히 앉아 있자 송희근 과장이 물었다.
“조대찬은 왜 안 일어나?”
대찬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백기가 나섰다.
“조 사원이 제 일 좀 도와주기로 해서요. 저는 오늘 제사라.”
“아, 그래? 그럼 좀만 수고해.”
송희근 과장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퇴근했다.
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백기는 싱긋 웃으며 대찬의 등을 두드리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상사들이 모두 퇴근하자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대찬의 동기들이 대찬의 자리로 왔다.
허운이 대찬에게 말했다.
“제사는 개똥이 제사야. 핑계를 댈 거면 좀 성의 있게 대든가.”
“나한테 성의 있게 대서 뭐하겠어. 형 노래 듣고 싶었는데 유백기 때문에 완전 망해 버렸네.”
“오늘 만사 제쳐 두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말이지. 난 핸들이 고장 난 eight톤 트럭!”
“8톤 트럭으로 유백기 쳐 죽이고 싶다.”
“오우, 괴팍하긴. 조대찬 점점 본색이 드러나는구나.”
대찬은 이마를 쓸며 귀찮은 듯 손짓으로 허운을 물리쳤다.
“암튼 나 없이 잘 먹고 잘 놀다 오셔.”
“오냐. 네 몫까지 잘 놀아 주마.”
허운은 서원웅, 유채경을 데리고 퇴근했다.
7시가 되자 대외협력부의 모든 직원들이 퇴근했다.
대찬 혼자만 사무실에 남았다.
“그래, 실컷 부려 먹어라. 쌓아 뒀다가 배로 갚아 줄 테니까.”
대찬은 꿍얼거리면서 휴게실로 갔다.
삼각깁밥 2개와 컵라면 하나로 저녁을 때웠다.
대찬은 면발을 후루룩 마시듯 먹으면서 서류를 검토했다.
대관 업무 담당자들이 취합한 정보는 양이 방대했다.
대찬은 뜨끈한 국물을 머금으며 생각했다.
“일들 열심히 하셨네.”
매운 국물에 목구멍이 칼칼했다.
대찬은 5분 만에 식사를 해치우고 자리에 앉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운 좋으면 막차를 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근처 찜질방에서 눈을 붙일 판이었다.
그나마 일이 손에 익었기에 망정이지, 순도 100퍼센트 신입 사원이었다면 오전까지도 일을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날 쏟아지는 유백기의 핀잔과 비아냥거림, 양동식 부장의 야단을 홀로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일을 줘도 양심껏 줘야 될 거 아니야.’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하긴, 유백기한테 양심 찾는 내가 등신이지.’
대찬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막차가 끊기기 전에 일을 끝내겠노라 각오를 다졌다.
잠시 후, 대찬은 취합된 정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대관 업무를 수행했지만, 이들의 능력은 인정해 줄 만했다.
양철 차장 역시 그 오만함 때문에 흥읍시의회에서는 일을 망쳤지만, 국회에서는 확실히 능력을 발휘했다.
수집된 정보는 국회의원들과 그 주변인의 자질구레한 신변잡기부터 회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책과 법안까지 다양했다.
대찬은 일도 일이지만, 이런 정보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그러다 보니 진척이 느려지고,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넘었다.
‘젠장. 꼼짝없이 밤샘이네.’
대찬은 낭패감을 맛보면서도 정보를 찬찬히 읽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일을 하다 보니 몇 가지 누락된 정보들이 있었다.
하루걸러 하루 간격으로 작성된 수기가 중간에 1, 2주씩 빠진 것들이 있었다.
대찬은 유백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에 연결되지 않고 두 번 만에 연결되었다.
유백기는 다소 짜증 돋친 목소리로 응대했다.
“뭐야?”
“양철 차장님이 작성한 정보 중에 중간에 빠진 게 있는 거 같아서요.”
그제야 유백기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어, 그거 내 책상 위에 있으니까 확인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수화기를 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야, 여기서 뭐 해! 빨리 들어와. 여자들 기다리잖아.”
유백기와 동년배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뒤 전화는 끊겼다.
대찬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내려놨다.
“제사는 개뿔.”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만 직접 확인하니 속이 더 끓었다.
대찬은 툴툴거리며 유백기의 책상을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누락된 서류철이 놓여 있었다.
서류철을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무언가가 대찬의 눈에 띄었다.
“이게 뭐지?”
대찬은 도로 유백기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자리에는 여러 서류가 겹쳐 있었는데, 이질적인 메모 한 장이 있었다.
유백기가 워낙에 악필인 데다 갈겨쓰기까지 해서 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게 더 대찬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뭐라고 쓴 거야…….’
얼핏 보면 러시아어 필기체로 착각할 정도로 극악의 가독성을 자랑하는 글씨였다.
하지만 대찬은 유백기체 해독 검정시험이 있다면 1급을 딸 자신이 있을 정도로 통달했다.
10년간 그의 사노비가 돼서 굴려진 경력에 더하여 두 번째 삶에서도 그의 부하 직원으로 일한 지 만 1년이 다 돼 가는 탓이었다.
대찬은 해독된 글자를 천천히 발음했다.
“장학금 지급 증빙… 안전한 사람들 섭외… 대가 지급 입막음… 명단 작성 윗선 지시로 반발 무마… 단순 지급 대신 구체적인 프로그램 작성으로 의혹 제거… 아버지-사장님 친밀감 조성에 최선…….”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게?”
한참 갈겨쓴 글씨에서 고뇌의 흔적이 느껴졌다.
대찬은 그 글씨에서 수상한 냄새를 감지했다.
어느 것 하나 수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찬은 몰래 그 메모를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다.
2008년의 휴대폰 카메라는 화질이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유백기가 워낙 악필이었다.
대찬은 메모 전체를 촬영한 다음 다시 메모를 꼼꼼히 분할 촬영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깨끗한 글씨로 따로 옮겨 적기까지 했다.
다시 업무에 열중하려고 했지만 유백기의 메모가 눈앞에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신경 쓰였다.
그가 가장 신경 쓰이는 메모는 바로 ‘아버지-사장님 친밀감 조성에 최선’이었다.
“사장님은 서청규일 거고… 유백기 아버지가 서청규랑 친밀감을 조성하려면 그만큼 체급이 맞아야 하는데…….”
손꼽히는 대기업의 2인자이자 계열사 사장인 서청규와 맞먹으려면 사회적인 위신이 보통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대학 교수나 은퇴한 장군처럼 명망은 높되, 서청규 사장에게 실익을 줄 수 없는 직업도 서청규 사장과 친밀감을 조성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대찬은 에피니키온 선배이자 유백기와 동기인 민승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랜만이다.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선배, 잘 지내시죠? 뭐 하나만 여쭤보려고요.”
“뭘?”
“유백기 선배 있잖아요, 혹시 유 선배 부친이 사회적으로 명망이 좀 있으신 분인가요?”
민승기는 싱겁게 웃었다.
“네 상사잖아. 직접 물어보면 편할 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알잖아요, 원수지간인 거.”
민승기는 웃음을 마저 웃고 답을 주었다.
“유백기 아버지 행시 붙어서 공무원 하시잖아. 지금 교육부 2차관인가 그럴걸?”
“차관이요?”
“그러고 보니 모를 만하네. 떠벌리기 좋아하는 유백기가 유독 자기 아버지 자랑은 안 했으니까.”
“고맙습니다, 선배.”
“뭘. 다음에 시간이나 좀 내 봐. 술이나 한잔하게.”
“저야 언제든 가능하지만 선배가 워낙 귀하신 몸이시잖아요? 바쁘셔서.”
“귀하신 몸이 아니라 회사의 노예인 몸이지. 알았다. 조만간 보자.”
민승기는 얕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전화를 끊자마자 유백기의 아버지이자 교육부 2차관을 인터넷으로 찾았다.
“유춘기… 성도 똑같은 걸 보니 정말 맞나 보네, 유백기 아버지가.”
대찬은 인터넷 화면에 뜬 유춘기 차관의 어색한 증명사진과 한동안 눈싸움을 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장학금 지급 증빙 어쩌고 쓰여 있었는데…….’
대찬은 교육부 유춘기 차관과 장학금이 같은 메모에 적힌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대찬은 우선 업무를 뒷전으로 미뤘다.
밤샘을 각오했다.
그는 대관업무 담당자들이 취합한 정보 중에서 교육부를 상대로 한 정보가 있는지 뒤졌다.
‘있다.’
양철 차장이 수차례 교육부 측 정보를 올린 자료가 있었다.
필래유통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통 회사였다.
굳이 교육부 측의 동향을 살필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대관업무 담당자 중에서도 베테랑인 양철 차장이 교육부 측과 접선했다.
그렇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