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7화
휴대전화가 산산조각이 나서야 양철 차장은 후회했다.
“으악! 으악! 으아아아악!”
그는 허공에 상욕을 빽빽 지껄이며 고함을 질렀다.
“으음, 으음, 으흠흠음음.”
대찬은 콧노래를 부르며 수첩에 적어 놓은 마지막 공략 목표의 이름 위에 가위표를 쳤다.
마지막 시의원은 술이 떡이 되도록 먹이고, 아첨으로 비행기 몇 번 띄워 주니 헤벌레 침을 흘리는 종자여서 가장 쉬웠다.
처음부터 조례에 반대하던 시의원들에 이들을 더하니 조례안은 부결의 조건을 갖췄다.
조례는 끝내 부결되었다.
대찬은 단독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송희근 과장에게 올렸다.
-업무 결과 : 흥읍시 전통 상업지구 보존을 위한 조례 부결
예상 효과 : 필래마트 흥읍점 정상 영업 보장, 안정적 매출 유지 기반 마련
향후 조치 : 지역 상인 자제를 위한 서청규 장학금 수여식에 공재식 외 시의원 1명 초청 및 대 언론 홍보, 흥읍사랑산악회 간식 및 식사 제공, 흥읍시장 상인 연합회와 원만한 관계 수립
업무 경과 : …….
대찬으로부터 직접 보고서를 전달받은 송희근 과장은 꼼꼼히 보고서를 읽었다.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
그걸 위해 수반되는 조치들은 회사 입장에서는 약소한 정도였다.
흠잡을 곳 없었다.
송희근 과장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긴 했지만 무리해서 트집 잡지 않았다.
“음, 수고 많았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대찬의 트집을 잡고 싶었던 송희근 과장이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런데 양철 차장님하고 한 팀으로 움직였는데, 왜 자네 단독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따로 움직이도록 부장님께 허락 받았습니다. 양 차장님도 제 도움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요.”
송희근 과장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양 차장님의 방식대로 업무를 진행하면 필연적으로 차질이 발생할 터라, 어쩔 수 없이 개별적으로 처리했습니다.”
“자, 자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건방진 말을 해!”
“외람되지만 결과가 그렇습니다. 양 차장님은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하셨습니다.”
대찬의 말대로 결과가 그랬다.
때문에 건방지게 느껴질 법한 말에도 송희근 과장은 얼굴만 붉어질 뿐, 제대로 받아치지 못했다.
그가 호기롭게 포섭한 양철 차장은 오히려 대찬의 제물이 되었다.
송희근 과장은 그와 따로 술자리를 가졌다.
술기운이 불콰하게 돈 그는 양철 차장에게 툴툴거렸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시의원들을 못 구슬려서 신입한테 쪽이 팔려요?”
“뭐야?”
“국회에서 10년 동안 구내식당 밥만 퍼 드셨어요? 실력 좋다더니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렇잖아도 성질이 드센 양철 차장이었다.
그 역시 속이 상하는 터, 술을 적잖이 마신 상태였다.
그런 차에 송희근 과장이 속을 벅벅 긁고 나서니 양철 차장은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이 씹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기어코 그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고 나서야 송희근 과장은 정신이 들었다.
“차, 차장님, 그게 아니고요!”
“야, 개새끼야, 가만히 있는 사람 부추겨서 신입 물 좀 먹이라고 한 놈이 누구야? 이 새끼가 부려 먹을 땐 언제고, 어디서 되도 않는 잡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차장님, 일단 진정 좀…….”
양철 차장은 쥐고 있던 노가리를 거칠게 내팽개쳤다.
바싹 마른 노가리가 죽은 보람도 없이 먼지 날리는 바닥에 뒹굴었다.
양철 차장의 눈이 희번덕 뒤집혔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진정은 씨팔! 너 따라 나와. 안 나와?”
양철 차장은 송희근 과장이 바들바들 떨기만 하고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자, 거친 손길로 그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박았다.
다음 날, 송희근 과장은 얼굴 곳곳에 반창고를 붙이고 출근했다.
천원석 대리는 송희근 과장의 꼴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과장님, 어디서 넘어지셨어요?”
“천 대리, 그냥 가만히 있어. 얘기 안 하고 싶으니까.”
“예예, 그러죠. 얼굴 흉 안 지게 연고 잘 바르시고요.”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까 그만 말하라니까!”
“알았다니까요. 제가 흉터 제거 연고 잘 아는 거 하나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천 대리!”
“아이고, 알았습니다.”
천원석 대리는 큭큭 웃으면서 입을 닫았다.
송희근 과장은 일주일 내내 우울한 얼굴을 하며 아랫사람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
얼굴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인 그는 직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직원들이 셋 이상 모이면 송희근 과장 얘기부터 했다.
대찬, 서원웅, 허운도 그 기준에 충족했으니 송희근 과장을 운운했다.
셋은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허운이 목소리를 죽여 대찬에게 물었다.
“뭐야, 너희 팀장 바람피운 거 걸려서 마누라한테 옴팡 두들겨 맞기라도 했어?”
대찬은 피식 웃었다.
“송 과장님이 바람피울 배짱이나 있으신 분이면 가능한 얘기겠다.”
“그럼 저 몰골을 뭐로 설명할 건데?”
내막을 말하자면 상사의 치부를 들추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스스로의 공치사를 하기도 민망해서 그냥 웃기만 했다.
자연스레 화제가 전환되었다.
허운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대찬에게 말했다.
“조대찬.”
“왜?”
“너 왜 약속 안 지켜?”
“약속이라니, 무슨 약속?”
대찬이 모른다는 표정을 짓자 허운의 입이 약간 나왔다.
“유채경이랑 나랑 잘되게 해 준다며. 왜 여태 손 놓고 있느냐고.”
이 말에 대찬보다 서원웅이 먼저 반응했다.
허운이 유채경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소식을 그는 처음 들었다.
“뭐야, 허운 형, 채경이한테 관심 있어?”
“뒷북 한번 요란하게 친다.”
“형이 나 따돌리고 대찬이한테만 말하니까 그렇지.”
허운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저 새끼가 제일 나쁜 새끼야. 도와주기로 했으면 도련님까지 진즉 포섭해 놨어야지. 구구절절 내 입으로 말해야 되겠어?”
대찬은 질린 듯 양손을 들었다.
“아아, 알았어. 내가 쳐 죽일 놈이지.”
“알면 됐다.”
서원웅은 교생의 첫사랑 얘기를 듣는 중학생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빛냈다.
“언제부터 채경이 좋아한 거야?”
허운은 젓가락으로 대찬을 가리켰다.
서원웅의 정수리 위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야, 유채경이 아니라 조대찬 좋아하는 거였어? 야! 너 산하 누나는 어쩌고?”
“그럴 리가 있냐, 이 밥통아! 조대찬 때문에 유채경을 좋아하게 됐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신입 연수 때 말이야.”
“응.”
“유채경 처음 보고 예쁘다는 느낌만 있었거든? 예쁘다고 무조건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근데 유채경이 나는 완전 개밥 취급하고 조대찬 볼 때는 눈깔에서 아주 아카시아 꿀이 떨어져.”
“좋아한다는 사람한테 눈깔이 뭐야, 눈깔이.”
“암튼. 그러니까 내 마음에 불이 확 붙는 거야.”
여기까지 들은 대찬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것만 들으면 형은 채경이가 아니라 날 좋아하는 거 같은데?”
“꺼져. 그렇게 내 사랑을 원해?”
대찬은 진절머리를 내며 서둘러 해명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질투심 때문에 좋아한다는 거잖아?”
“사람마음 복잡한 거다. 그건 계기일 뿐이야, 계기. 1차 대전이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시작됐지만 원인은 그게 아니듯이, 질투심은 한낱 사라예보의 총성에 불과하다고!”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사라예보의 총성은, 무슨. 둘러대는 게 뭐 그리 거창해?”
“으이구, 설명한 내가 바보지. 네들이 무슨 사랑을 알겠냐? 야, 서원웅, 너 모태솔로지?”
그 말에 서원웅이 펄쩍 뛰었다.
“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네, 확인해 줘서 감사하고요. 조대찬, 너도 모태솔로 아니냐?”
“나는 자발적 솔로야. 내 의지로 여태 혼자인 거라고. 저 비자발적 모태솔로인 도련님하고는 종류가 달라, 종류가.”
“헹, 구차하기는! 암튼 사랑을 모르는 건 너나 쟤나 매한가지야.”
첫 번째 삶에서 이런저런 연애를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허운의 말마따나 이러쿵저러쿵 주워섬겨 봤자 구차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찬은 할 말을 삼키고 끙, 앓는 소리만 냈다.
허운이 말싸움에서 대찬을 이기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허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이제라도 약속을 좀 지키란 말이야.”
“알았어. 도와줄게.”
허운은 대찬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미소를 머금었다.
“진즉 그럴 것이지. 자, 말해 봐. 어떻게 도와줄 건데?”
“당신의 멋짐을 보여 주세요.”
“뭐, 뭐라고?”
“유채경이가 반할 기회를 만들어 줘야지. 지금처럼 껄렁거리기나 하고 촐싹대면 채경이가 어떻게 좋아해?”
대찬의 따가운 공세에 허운은 풀이 죽어 서원웅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그렇게 엉망진창이야?”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허운의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대찬은 다독이듯 말했다.
“채경이한테 점수 따려면 형이 고생을 좀 해야지.”
“무슨 고생?”
“재래시장 상인 자녀 장학금 지원 건으로 다음 주부터 1팀 바빠지는 거 같던데, 일을 신입한테 다 떠넘기는 모양이더라. 원웅아, 맞지?”
서원웅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대찬의 물음을 확인해 주었다.
“응, 맞아. 예고된 재앙이지. 장학 재단 쪽 직원 대부분이 계약직인데 곧 계약 만료 시즌이라 우리 쪽에 일이 넘어왔어.”
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장학금 수혜자 목록 구성하고 전반적으로 점수 매기는 작업을 채경이가 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
“그렇다고 하더라. 서원웅, 아주 노났네?”
대찬이 슬슬 서원웅을 약 올리자, 서원웅의 정직한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서원웅은 대찬에게 툴툴거렸다.
“너는 남의 팀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알아?”
“남의 팀이 아니라 우리 부서라고 생각하면 피차 사정을 잘 파악해 둬야지.”
“할 말 없게…….”
“원웅이한테 일을 안 맡기는 걸 보니, 윗선에서 제법 까다롭게 여기는 일일지도 모르겠어.”
“왜?”
“왜긴, 너는 사장님한테 완전 주적인데. 비밀스러운 일을 적에게 맡길 순 없지.”
“그러는 너는 주적 아닌 척한다.”
“나는 주적은 아니지. 주적의 하수인일 뿐인걸.”
대찬은 서원웅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고는 허운에게 말했다.
“암튼 채경이가 다음 주부터 바빠진다니까 형이 좀 도와주면 어때?”
“뭐? 내가? 왜?”
“왜는, 그렇게라도 점수 따야지. 단둘이 야근하면서 끝나고 소주도 한잔하고, 얼마나 좋아?”
“그렇게까지 해야 돼?”
“당신의 사랑이 딱 그 정도로 미적지근한가 봐.”
“그건 아니지만…….”
“모든 사업은 아쉬운 놈이 땀 흘리는 거야.”
허운은 싱겁게 웃었다.
“연애가 사업이냐.”
“연애 사업이지, 뭐.”
“억지는.”
“암튼 다음 주에는 그렇게 도와주는 걸로 하고, 오늘은 동기들끼리 노래방이나 갈까?”
대찬의 말에 허운은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노래방?”
대찬이 대답하려는 찰나, 느리게 식사하는 셋 사이에 누군가 끼어들었다.
“아, 진짜 치사하네.”
그 목소리에 셋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대찬이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채경아.”
“내가 일이 좀 늦게 끝나도 그렇지, 어떻게 나만 쏙 빼고 밥 먹을 수가 있어?”
대찬은 허운의 연애 사업을 위한 작당 모의라고 실토하지 못하고 어설픈 웃음만 걸쳤다.
“나는 또 일 끝나고 1팀 상사들이랑 먹는 줄 알았지.”
“내가 미쳤어? 그 망나니들하고 밥 먹게? 차라리 혼자 먹고 말지!”
“그래. 다음부턴 꼭 먼저 물어볼게. 화 풀고 밥부터 먹어. 배고플 텐데.”
“내가 배고파서 봐준다.”
대찬은 잠깐 유채경의 눈치를 살피고는 은근히 말했다.
“그럼 오늘 퇴근하고 다 같이 저녁 먹고서 노래방 어때? 다음 주부터는 너희 팀 완전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어? 노래방? 오빠가 웬일이야? 생전 노래방 한번 안 찾던 사람이.”
“오늘은 왠지 가고 싶네.”
“나야 완전 좋지!”
유채경은 대찬의 제안을 격하게 환영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반응에 허운과 서원웅은 얼떨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