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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96화 (95/556)

난 할 수 있어 96화

양동식 부장의 공식적인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로써 대찬은 제 방식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양철 차장이 시의원들에게 했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흥읍시는 신도시 건설 이후 꾸준히 젊은 세대들의 유입이 이뤄지고 있었다.

대형 마트는 아파트 밀집 지역에서 가까웠고, 전통시장은 구도심에서 가까웠다.

대형 마트의 영업이 규제되는 건 소비자인 그들의 권리가 침해되는 일이었다.

젖은 솜처럼 퇴근하는 그들이 가까운 대형마트를 놔두고 먼 전통시장으로 가야 하는 건 야근만큼 짜증나는 일이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부동층이었고, 시의원들은 그들의 의견에 민감해야 했다.

이렇듯 양철 차장의 취지는 옳았지만 말을 그르게 했다.

공자 왈, 내용과 형식이 모두 알맞아야 아름답다고 했다.

대찬은 시의원들에게 대학 교수가 아니라 학원 강사 노릇을 할 작정이었다.

“사람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는 법이지.”

그는 시의원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속 재판정에서 괘씸죄가 선고된 이상, 제법 큰 출혈을 감수하지 않으면 그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대찬은 시의원 대신 다른 사람을 만났다.

고숙희였다.

원영맘을 몰아내고 흥읍시 맘 카페의 운영자가 된 양반후반, 고숙희였다.

그는 여전히 맘 카페의 운영자였다.

“저희 필래마트 잘 이용해 주시고 계시죠?”

“네. 장을 볼 만한 곳이 거기밖에 없으니까.”

“시장이 있잖습니까.”

대찬의 말에 고숙희는 얼굴을 찡그렸다.

“거긴 차 없으면 못 가요. 잔뜩 장 보고 낑낑거리면서 올 수는 없잖아요. 가까운 데 두고 시장을 왜 가요?”

“그렇긴 합니다.”

고숙희는 풋 웃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필래마트에 정감이 갈 수밖에 없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시의회에 조례 올라온 건 알고 계세요?”

“시의회 일까지 신경 쓰고 살기에는 삶이 너무 팍팍한 걸요.”

“이번에 마트 영업을 규제한다고 해요.”

“네? 왜요?”

“전통시장 많이들 이용하시라고.”

그러자 고숙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다고 시장에 가지는 않을 거 같은데요. 급한 건 근처 슈퍼나 편의점에서 사겠죠. 장은 여전히 필래마트에서 볼 거고요.”

“저희도 저희 이익도 그렇지만 실효성 없는 대책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의회 쪽이 워낙 강경해서요.”

“역시 절 만나자고 한 목적이 있었네요. 여론을 조성해 달란 말이죠?”

“너무 속보였나요?”

“네, 너무요.”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고숙희는 어깨를 으쓱였다.

“부탁이랄 것도 없어요. 저희도 마트 영업이 규제되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요.”

고숙희는 선선히 응낙했다.

고숙희는 이 사실을 글로 작성하여 맘 카페에 게시했다.

당장 피부에 와 닿는 문제였다.

맘 카페 회원들의 마음을 흔들렸다.

물론 이를 위해 약간의 양념은 가미되었다.

-앞으로 마트 이용하기 어려워지겠네요…….

이렇게 시작하는 고숙희의 글은 어려운 말 없이 쉽게 쓰여 있었다.

거창한 법의 논리를 들먹이지도, 뜬구름 같은 대의명분도 쓰여 있지 않았다.

다만, 먹고살기 팍팍한 와중에 장을 보러 시장까지 먼 거리를 가야 하는 가정주부의 고충이 한탄조로 적혀 있었다.

그건 고숙희의 일이기도 했고, 정신없는 와중을 사는 맘 카페 회원들의 일이기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고숙희는 그 뜨거운 반응의 물줄기를 시의원 쪽으로 돌릴 방법을 제시했다.

-시의원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편하게 장볼 수 있도록 시의원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항의하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그 밑에 시의원의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두었다.

흥읍시의 엄마들은 기꺼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가두시위를 하거나 삭발 투쟁을 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절박하지도 않고, 그런 방식에 엄마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방구석에 앉아 문자 몇 줄 보내는 수고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그즈음, 시의원들은 지역 행사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국회 밥 좀 먹었다고 유세 떠는 꼴이 웃기지도 않더라니까.”

“지가 대통령이야, 국회의원이야, 뭐야. 꼴랑 보좌관 했던 주제에.”

“지금은 보좌관도 아니지. 일개 차장 주제에 모가지에 힘주고, 샛바닥에 빠다 바르고 거만하기가 아주 말도 못해.”

시의원들은 점심 식사를 같이하면서 밥알 대신 양철 차장을 씹어 댔다.

“괘씸해서라도 이 조례는 꼭 통과시켜 버려야지.”

그렇게 의기투합하던 시의원들의 휴대폰이 일제히 웅, 진동을 울렸다.

“응?”

진동은 한 번으로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뒤집힌 풍뎅이처럼 울려 대는 휴대폰에 시의원들은 당혹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더 아연실색했다.

-일 똑바로 하세요. 이제는 맘 편히 장도 못 보게 할 겁니까?

-당장 조례 취소하세요. 안 그러면 다음 선거 때 꼭 떨어뜨릴 겁니다.

-엄마들 잔뜩 화났습니다. 조례 밀어붙이면 진짜 재미없습니다.

-영업시간 규제하면 퇴근하고 장보는 맞벌이 부부는 지친 몸 이끌고 시장까지 가야 하는 건가요? 생각 좀 하고 사세요.

“뭐, 뭐야? 이것들.”

“필래에서 알바 푼 거 아니야?”

시의원 중 행동력 좋은 이가 받은 문자 메시지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 시의원 공재식이오. 댁이 누군데 이런 문자를 보냅니까?”

“아, 시의원 공재식 씹니까? 저는 저번 선거에서 공재식 씨 찍은 후평동 사는 원미라인데요?”

“그, 근데요? 왜 이런 문자를 보내는 겁니까?”

“왜 이런 문자를 보내긴! 일처리를 개떡같이 하니까 보내는 거지! 똑바로 좀 하세요!”

서릿발처럼 매서운 질타에 시의원 공재식은 움찔했다.

“아, 아니,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열 받으니까 그러지!”

후평동 사는 원미라는 빽 소리를 지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공재식과 원미라가 통화하는 와중에도 시의원들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다.

시의원들은 당혹감에 서로를 멀뚱히 바라봤다.

“허! 거참…….”

“어디서 소식을 이렇게 퍼트려서는… 곤란하게…….”

시의원들은 계속 울려 대는 각자의 휴대전화를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런 항의는 단발로 그치지 않았다.

평소 시의원 이름도 모르던 사람들이 몇 날 며칠 주야장천 문자를 보냈다.

정말 조례를 철회해 주기를 간절히 원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아예 재미가 들린 듯도 했다.

“미칠 노릇이군!”

새벽까지 이어지는 문자 세례에 시의원들은 아예 휴대전화를 꺼 버렸다.

며칠 뒤, 성난 문자와 전화가 잦아들 쯤이었다. 공재식 시의원은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공재식 시의원이십니까?”

완전히 노이로제에 걸린 공재식 시의원은 잔뜩 경계했다.

“누구십니까.”

“ONB 최재한 기자입니다.”

늑대가 물러나니 호랑이가 온다고, 성난 시민 대신 기자가 전화를 걸었다.

정치인은 보통 언론을 반긴다.

악평보다 나쁜 게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언론은 정치인을 최소한 무관심에서는 해방시켜 준다.

그러나 아무래도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기자의 전화가 반갑지 않았다.

도깨비가 나올까, 뱀이 나올까, 일본 속담처럼 공재식 시의원의 마음은 불안했다.

“무슨 일입니까?”

유감스럽게도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흥읍시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진다고 해서 취재차 연락드렸습니다.”

“흥미로운 사건이라뇨?”

“시민들이 요즘 의원님들께 항의 문자와 전화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공재식 시의원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렀다.

“직접민주주의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보도하고 싶습니다.”

“뭐, 뭐요?”

시민들의 행동을 좋게 보도한다면 시의원들은 필연적으로 악역이다.

절대 사양이었다.

“인터뷰를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인터뷰 안 합니다! 끊어요!”

공재식 시의원은 허겁지겁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런 썅!”

조례 하나를 만들려다 전국구 밉상으로 찍힐 판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찬이 다시 시의원들을 일일이 방문했다.

양철 차장 때와는 달리 사근사근한 미소를 머금고, 한 손에는 과일 바구니까지 들려 있었다.

“의원님, 필래유통 대외협력부 조대찬 사원입니다.”

“…….”

시의원들은 이전처럼 필래유통 측을 문전 박대 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대찬은 더 예의를 갖췄다.

“이번 조례안에 대해 저희 회사 측 입장을 차분히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그래요.”

“감사합니다. 과일 드시면서 편하게 들어 주십시오.”

“알았습니다.”

편하게 들으라고 했지만 불편하게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찬은 구태여 과한 알랑방귀를 뀌지 않았다.

정론으로 돌파했다.

“이번 조례안의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소상공인과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저희 회사에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뭐, 그러시겠지.”

“하지만 이번 조례안은 저희 회사에게 큰 손해일뿐더러 시장 상인분들께도 그다지 이롭지 않습니다.”

논리는 충분했다.

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한다고 해서 시장에서 멀리 거주하는 시민들이 시장을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동네의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을 이용할 터.

시장의 매출 감소는 대형 마트의 등장이라기보다는 시장을 중심으로 구축된 구도심의 구매력이 저하된 까닭이다.

즉,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대형 마트의 규제보다는 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제품군의 다양화를 꾀해야만 한다.

이미 시의원들도 들어 알고 있는 일이었다.

공재식 시의원은 대찬의 말을 듣고도 툴툴거렸다.

“말씀은 잘 압니다. 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어요. 밥값을 하려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원님의 고충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말해 보세요.”

“저희 회사에서는 재래시장과의 상생을 위한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를테면 지역 상인의 자녀를 위한 장학금, 재래시장 현대화를 위한 시설 지원, 일부 품목 매장 판매 자제 등 말입니다.”

“네, 그래서요.”

“이번 조례를 폐기해주시면, 회사는 흥읍시장 상인들을 위한 더 확실한 지원책을 내놓을 겁니다. 필래마트 흥읍점은 우리 회사 최후의 자존심 같은 거라서요.”

“으음…….”

명분만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공재식 시의원은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찬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생색낼 건수가 아니었다.

조례는 시의원이 만들지만, 일련의 사업들은 필래유통이 해낸다.

즉, 필래유통이 이런저런 해결책을 내놔 봤자 공은 시의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대찬은 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장학금 수여식, 시장 발전 기금 증정식, 상생을 위한 품목 제한 서약식 등에 의원님이 주역으로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음?”

“따지고 보면 이런 좋은 방안이 탄생한 게 시민을 생각하는 시의원님의 따뜻한 마음 덕분 아니겠습니까.”

“아, 하하… 그렇게까지 칭찬받을 일은…….”

“마땅히 가운데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셔야죠.”

“그래도 됩니까?”

공연한 겸손을 떨던 공재식 의원은 대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대찬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당연하죠.”

“그, 그렇다면야…….”

공재식 시의원은 못 이기는 척 대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를 넘어뜨린 대찬은 다른 시의원들도 포섭했다.

1명은 역시 마찬가지로 장학금 수여식에 초대했다.

다른 1명은 그가 만든 산악회가 등산을 나갈 때 음료와 간식, 식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가 생색낼 수 있도록.

그렇게 대찬이 도미노처럼 차례대로 시의원을 공략하는 동안, 그에게 면전에서 모욕을 당한 양철 차장도 혼신의 발버둥을 쳤다.

양철 차장은 흥읍시를 지역구로 둔, 면식이 있는 국회의원에게 통사정을 했다.

“아, 형님! 그러니까 저 부스러기 같은 시의원 새끼들한테 압력 좀 넣어 주시라니까요. 예? 그게 뭐가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십니까?”

“에이, 자네도 알잖아. 시의원들이 내 핵심 후원자들이야. 그 사람들 없이 총선 못 치러. 올해 총선 있는 거 알잖아. 소탐대실할 순 없지. 그지?”

“형님, 제가 사 드린 양주가 몇 병입니까? 볼링 핀으로 세워 놓으면 열 게임도 쳐요. 진짜 이러실 겁니까?”

“이 사람이 진짜 왜 이래? 국회에서 굴러먹던 거 다 까먹었어? 그래서 글러먹은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여기 생리가 어떤지 다 알면서 양주 몇 병에 생색을 내?”

“형님, 그게 아니고요……!”

“시끄러워! 다신 전화하지 마!”

양철 차장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휴대전화를 벽에 냅다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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