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5화
“우리? 내 임무지. 네 임무는 내 시다고.”
대찬은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옆에서 풍겨 오는 양철 차장의 발 냄새가 계속 코를 찌르는 것처럼, 그의 모욕적인 말이 대찬의 귀에 맴돌았다.
양철 차장은 대찬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태평하게 제 할 말만 늘어놨다.
“시의회 정도는 꽉 눌러 줘야 돼. 인정사정 보지 말고 재벌의 권위를 내세워 줘야 한단 말이야.”
“당근이 아니라 채찍으로 대우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시의원들이 뭐 별거야? 툭 까 놓고 말해서 돈 주고 자리 산 놈들이거든. 그런 놈들은 어흥, 해 주면 똥오줌, 방귀 안 가리고 지려 버린다니까.”
“…그래도 처음에는 어르고 달래 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양철 차장은 대찬의 뒤통수를 후렸다.
아픔보다 분노가 불쑥 솟았다.
“이 새끼가, 뭘 안다고 설쳐. 야, 나 국회에 10년 있었어. 시의원 같은 새끼들은 우습지도 않아.”
“…….”
“국회에서는 알랑방귀 뀌는 게 중요해. 그쪽은 확실히 우리보다 우위에 있어. 하지만 기초 의회 정도는 숙이고 들어가는 것보다 배부터 내미는 게 효과적이야.”
“그렇습니까.”
대찬은 사무적으로 응답했다.
양철 차장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네가 뭘 알겠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넌 냉수나 떠오고 옆에서 내가 조지는 거나 구경하고 있으면 돼.”
양철 차장은 호언장담했다.
꼴 보기 싫었다.
대찬은 코너를 돌 때 급가속하며 운전대를 급하게 꺾었다.
쾅!
원심력 때문에 양철 차장의 머리가 차창에 쾅 부딪쳤다.
“악!”
양철 차장이 순간 소리를 지르며 뒤통수를 감쌌다.
대찬은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면허 딴 지 얼마 안 돼서.”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럴 리가요.”
양철 차장은 대찬에게 눈을 흘기고는 뒤통수를 매만졌다.
차를 타고 오면서 양철 차장이 떠들어 댔듯 국회에서의 그의 경력은 화려했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근거 있는 자신감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것이 그에게 독이 되었다.
양철 차장은 보무도 당당하게 흥읍시의회에 입성했다.
그는 연달아 시의원들과 만났다.
시의원들은 방문의 목적을 인지하고 있었다.
전통상업지구 보존을 위해 필래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건 지역 현안이었다.
시의원들은 양철 차장과 대찬의 방문을 사양하지 않았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 좀 멀더군요.”
양철 차장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웃었다.
초면에 예의를 갖춘 태도는 아니었다.
시의원은 약간 당황했다.
“이번에 발의된 조례 때문에 찾아오신 거지요?”
“예. 그러시면 안 되죠.”
“…예?”
“제가 국회에 10년 있어 봐서 압니다. 드러나는 이슈만 만지작거리는 건 군맹평상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양철 차장의 고압적인 태도에 시의원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친놈. 저럴 줄 알았다.’
대찬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양철 차장의 태도는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대찬은 가만히 있었다.
괜히 한마디 보탰다간 쓸데없는 야단을 맞을 테니까.
“바닥 민심을 읽어야 재선하십니다. 그래야 도의원도 하고 시장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시죠. 대형 마트 규제해 보세요. 한 줌 시장 상인들이야 좋아하겠죠.”
“한 줌……?”
“잘 쳐줘야 두 줌이지. 선거는 부동층을 잡는 게 관건입니다. 아시잖아요? 여기 새로 이사 온 신혼부부, 사회 초년생들 잡아야 당선돼요.”
“…….”
“그 사람들은 마트 가지, 시장 안 갑니다. 대형 마트 규제하면 그 사람들이 다음 선거 때 의원님 찍어 주겠어요?”
같은 뜻이라 해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양철 차장의 태도는 마치 선배가 후배에게 인생 조언이랍시고 지청구를 늘어놓는 듯했다.
제3자인 대찬이 봐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다.
이래서야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악화될 판이었다.
시의원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는 영세상인 보호를 위해 당연히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큽니다.”
“그건 시의회 측 입장이지요. 비밀투표의 원칙이 사람들의 치사한 속성을 선거에 얼마나 잘 반영시키는지 아시잖습니까?”
따갑게 쏘아 대는 양철 차장의 말에 시의원의 인내심이 고갈됐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가 주시죠.”
“…예?”
양철 차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시의원 나부랭이가 국회에서 잔뼈가 굵은 자신을 환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 양철 차장은 실세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10년을 지냈으니까.
길가의 들풀처럼 널린 시의원들은 실세 국회의원에게 줄을 대려고 선거철이면 국회의원하고 안면 한번 트겠다고 의원실 앞에 장사진을 쳤다.
그리고 잠깐의 만남에 감격하며 손바닥을 비비고 술을 따랐다.
그러니 양철 차장의 눈에 시의원 나부랭이는 그야말로 나부랭이였다.
그런 마당이니 시의원의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는 배짱을 부리는 쪽을 선택했다.
이렇게 적당히 압박하다가 시의원이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깝쇼, 조언을 구해 오면 잘 구슬릴 작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전은 초입에서부터 엉망이 돼 버렸다.
문을 닫고 나오면서 대찬은 양철 차장의 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분노와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대찬은 속으로 웃었다.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전략을 수정해야 할까요?”
대찬이 은근히 말하자 양철 차장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뭐? 이 새끼가 어디서 훈수야……!”
그의 언어는 조금도 정제되지 않았다.
흥분한 게 확실했다.
“훈수가 아니라… 텐션을 조금 낮추시는 게 어떨까 하는 의견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내가 언제 네 의견 물어봤어? 내가 묻기 전까지 입 열지 마.”
“예, 그러죠.”
양철 차장은 대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멍청하긴.’
대찬은 속으로 그를 조롱하며 뒤를 따랐다.
양철 차장은 유화적으로 나가라는 대찬의 조언을 면전에서 거부했다.
대찬의 조언은 옳았다.
양철 차장도 그걸 깨닫고 있었다.
미사여구로 어르고 달래고, 술도 따라 주고, 돌아가는 길에 홍삼이라도 한 박스 사다 바쳐야 말을 들어줄까 말까다.
지금이라도 저자세로 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대찬의 조언은 양철 차장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였다.
대찬은 양철 차장이 자신의 의견이 무엇이든 일언지하에 거부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것으로 양철 차장은 전략을 수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즉 전략을 수정하라는 조언은 전략을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똥통에 처박히라는 저주였다.
틀린 걸 알면서도 틀린 전략을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2명의 시의원을 더 만나 봤지만 결과는 처음과 판박이였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양철 차장과의 만남을 거부했다.
국회의원은 300명이었고, 흥읍시의원은 15명이었다.
좁은 동네에는 소문이 금방 퍼졌다.
필래에서 웬 깡패 같은 녀석을 보내서 윽박지르더라는 후문이 그들 사이에 파다했다.
결국 첫날 장사는 완전히 공쳤다.
대찬은 어떠한 권한도 부여받지 못했다.
그러니 어떠한 책임도 없었다.
대찬은 퇴근하고 김산하와 전화 통화를 했다.
대찬의 얘기를 들은 김산하는 풋, 웃었다.
“나도 제약 회사에 다니니까 대관 업무가 중요한 건 들어서 알거든. 이쪽 일 하는 사람 말 들어 보면 눈물 나.”
“왜?”
“무조건 숙이고 들어가야 해. 아쉬운 건 대관 업무 담당자들이야. 관청 사람들이야 술 한 번 못 얻어먹으면 그만이거든.”
대관 업무는 관청 사람들로부터 일방적으로 혜택을 받는 입장이었다.
정보를 받거나 정책과 법안에 회사의 이익을 관철시키거나.
그것의 대가로 관청 사람들은 좋은 술이나 밥을 얻어먹거나, 뇌물이 되지 않을 만큼의 선물을 챙기는 정도였다.
그러니 대관 업무 담당자들은 관청 사람들에게 바짝 엎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나도 그렇게 들었어. 왜 저렇게 배짱인 거야?”
“아마 그 사람도 국회 드나들 때는 비굴 모드일 거야. 그런데 시의회는 물렁하게 보였나 보지.”
“권력의 규모가 다르니까.”
“응. 아마 시의회 출입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걸? 국회 짬 먹은 부장급을 시의회로 보내진 않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찬아.”
“응?”
“검정고시 준비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상대로 한 야학이 있다고 치자.”
“응.”
“대학 교수랑 학원 강사 중에 누가 낫겠어?”
“아무래도 학원 강사가 낫지 않을까……?”
“응. 검정고시 보는 데는 삼각함수만 알면 됐지, 오일러 방정식을 알 필요는 없거든. 근데 대학 교수는 오일러 방정식을 가르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한 거야.”
“그 말인즉슨.”
“양철인지 고철인지 하는 새끼는 대학 교수 노릇이 하고 싶은 거야, 시의원들 상대로. 자기가 국회에 있을 때는 그 사람들이 한참 자기보다 아래로 보였을 거야.”
대찬은 풋 웃었다.
“일리가 있네.”
“일리가 있는 게 아니라 정답이야. 그거랑은 별개로 또 있어.”
“또 뭐?”
“그냥 그 새끼가 또라이 새끼야.”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는 김산하를 보고 대찬은 픽 웃었다.
이미 시의원들의 반감을 산 터라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관 업무는 명절 고속도로처럼 꽉 막혀 버렸다.
양동식 부장은 양철 차장과 대면했다.
아무리 콧대 높은 양철 차장이라 해도 위아래는 엄격히 따졌다.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양동식 부장에게는 고분고분했다.
한 군데만 남은 필래마트의 존폐는 회사 자체로서도 중요한 일이었고, 그 때문에 양동식 부장도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대찬 역시 담당자로서 동석했다.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보고에 양동식 차장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국회를 주물럭거리던 자네가 왜 시의회에서 쩔쩔매고 있어? 일을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양철 차장도 양동식 부장 앞에서는 철처럼 굳세지 못하고 양처럼 순했다.
그때 대찬이 나섰다.
“혹시 제가 방법을 강구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양동식 부장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음? 해도 되겠습니까, 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자네 업무이기도 해.”
“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양 차장님께서 저더러 나서지 말라고 하셔서요.”
대찬의 말에 양철 차장은 대찬을 째려봤다.
틀린 말은 아니니 그 앞에서 부정하지 못했다.
양동식 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양 차장, 자네 혼자만의 일이 아니야. 조 사원 의견도 충분히 청취해야지.”
“예,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순진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저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모쪼록 빨리 일이 해결됐으면 좋겠군.”
양철 차장은 양동식 부장 앞에서 벗어나자마자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대찬을 쏘아보며 윽박질렀다.
“이 새끼야, 너 이딴 식으로 고자질해 가면서 점수 땄냐?”
대찬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는 양철 차장을 노려봤다.
“내가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지.”
“뭐, 뭐야……? 너 이 새끼, 상사한테 무슨 말본새야!”
“상사 대접 받고 싶으면 상사답게 굴어. 뒷골목 양아치처럼 지랄하지 말고.”
“이 새끼가 어디서……!”
이에 눈이 뒤집힌 양철 차장이 대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대찬은 손찌검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대로 양철 차장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으으윽……!”
비틀린 손목을 따라 양철 차장의 몸도 비틀어졌다.
“성질이 더러우면 일이라도 잘하든가. 도대체 잘난 구석이 하나 없어.”
대찬은 그의 손목을 비튼 채로 회사 차량의 열쇠를 양철 차장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완전히 달라진 태도에 당황한 양철 차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찬은 그를 등지고 걸어가면서 말했다.
“너는 너대로 일해. 나는 나대로 일할 테니까.”
대찬은 망설임 없이 양철 차장에게서 뚜벅뚜벅 멀어졌다.
그가 양동식 부장의 면전에서 굳이 자기 방식을 강구해도 되냐고 물은 것은, 책임 소재를 양철 차장에게로 확실히 돌리고 자신의 뜻을 자유자재로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