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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94화 (93/556)

난 할 수 있어 94화

잠시 후, 유 차관은 녹차를 한 입 머금고 말했다.

“저희 모자란 아들이 이번 일로 회사와 사장님께 큰 누를 끼쳐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차관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유백기 사원의 잘못인데.”

“자식새끼를 잘못 길렀으니 응당 제게도 책임이 있지요.”

“겸손도 하십니다.”

서청규 사장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유 차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제 얼굴을 봐서라도 우리 아들 잘못을 한 번만 덮어 주십사 해서 뵈러 왔습니다.”

“허허, 우리 회사는 사규가 엄격해서…….”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유 차관은 억지 미소를 걸치며 서청규 사장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장사꾼인 서청규 사장은 맨입으로 유 차관의 민원을 들어줄 의사가 없었다.

“허허,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게 나가면 그만큼 들어와야 헛헛하지 않고 그런 것인데…….”

“아무렴 제가 염치도 없이 맨입으로 왔으려고요.”

그제야 서청규 사장은 영업용 미소를 버리고 순전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유 차관은 빙긋 웃으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서 사장님이 운영하는 장학 재단 있죠? 이번에 정부에서 영재교육 진흥 자금을 마련해서 선정된 장학 재단에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오호라.”

“제가 실질적인 결정권자입니다.”

유 차관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서청규 사장의 장학 재단은 말이 좋아 장학 재단이지, 실제로는 서청규 사장의 개인 금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유 차관의 말은 정부의 돈을 서청규 사장의 주머니에 찔러 주겠다는 뜻이었다.

서청규 사장의 얼굴에 웃음이 만개했다.

“허허, 이번에 유백기 사원이 수업료를 비싸게 치렀으니 앞으로 더 크게 쓰일 겁니다.”

“모쪼록 잘 봐주십시오. 솔직히 우리 아들내미는 불운한 케이스지, 다들 속으로 청소부들 못 배워먹은 거 알고 있잖습니까?”

“아무렴요. 학력이 다른데, 학력이.”

“제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청소부한테 청소 좀 하라고 했다고 뉴스에 떠들썩하게 내보내니 이거 숨 막혀서 살겠습니까.”

서청규 사장은 유 차관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하기야 차관님 말씀이 틀린 게 없네요. 그래서 제가 그 청소 업체 바로 잘라 버렸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아주 현명한 결단 내리셨습니다. 역시 서 사장님 스타일은 시원시원하시다니까.”

“모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차관님이 유 사원 부친인 걸 알았으면 일을 크게 벌일 것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서청규 사장이 악수를 건네자 유 차관은 얼른 그 악수에 응했다.

“우리 아들내미가 워낙에 자립심이 큽니다. 애비 덕을 안 보고 제 힘으로 일어서려고 하니 기특하지 않습니까? 사장님도 부디 잘 키워 주십시오.”

“하하,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제가 어엿한 기업인으로 잘 키울 테니.”

서청규 사장과 유 차관의 만남은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유 차관은 사옥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사옥을 빠져나갔다.

서청규 사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비서실장에게 명령했다.

“유백기 대기 발령 풀어 줘. 그래도 당분간은 설치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고 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서청규 사장은 손을 비비적거리며 홀로 중얼거렸다.

“새끼, 애비가 차관이면 진즉 말을 할 것이지. 주변머리 없기는…….”

유백기는 대기 발령 사흘 만에 사무실로 복귀했다.

징계위원회도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대찬의 예상 밖이었다.

유백기는 보란 듯이 송희근 과장 앞에서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폐 끼쳤습니다! 앞으로 업무에 유의하겠습니다!”

지나치게 기합이 들어간 모습에 송희근 과장은 흠칫 놀라면서 어색한 미소를 걸쳤다.

“어, 어, 그래…….”

천원석 대리와 한태윤 대리는 의아한 시선으로 유백기를 바라봤다.

그들 역시 어떤 연유로 유백기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환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그건 대찬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뭐야, 저거.’

대찬도 당황했다.

떠들썩한 언론 보도는 일개 말단 사원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불과 사흘 만에 아무렇지도 않게 업무에 복귀하다니.

대찬은 입을 살짝 벌리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보고 유백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첫 번째 삶에서 10년 넘게, 그리고 두 번째 삶에서도 적지 않은 세월 유백기를 지켜본 대찬이었지만 유 차관의 존재를 알지는 못했다.

유 차관은 물밑에서 조용한 일처리를 추구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대찬마저 그런 속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바퀴벌레처럼 지독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유백기가 짜증날 뿐이었다.

업무가 한가할 즈음, 송희근 과장이 유백기를 조심스레 따로 불렀다.

유백기는 송희근 과장을 따라갔다.

송희근 과장은 빈 회의실에 들어가 문을 꼭 잠그고 유백기에게 물었다.

“이봐, 백기 씨.”

“네, 과장님.”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유백기는 말뜻을 알면서도 부러 모르는 척했다.

“마법이라뇨?”

“자네 빼도 박도 못할 중징계감이었잖아. 어떻게 빠져나왔느냐고.”

“어째 중징계를 받았어야 한다는 듯한 말투시네요.”

내내 유백기를 구박하던 송희근 과장은 어설픈 미소를 머금었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이해를 안 하시는 게 빠릅니다.”

“차, 참새……?”

유백기는 한껏 으스댔다.

“그럼 사장님이 봉황이면 과장님은 참새 해야지, 별수 있나요.”

“사, 사장님 선에서 결정된 일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수로 제가 이러겠어요?”

“그, 그렇지?”

“그러니 더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좋으실 거 없어요.”

“그, 그래…….”

유백기는 회의실을 나가려다가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송희근 과장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조대찬 그 새끼한테 실실 웃어 주고 그러지 마요. 재미없어요, 진짜.”

유백기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짜릿한 느낌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혼자 남은 송희근 과장은 쓴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그는 새까만 후배가 건방지게 운운하는 말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유백기의 뒷배가 누구인지에 쏠려 있었다.

‘유백기가 사장님하고 줄이 닿아 있단 말이지…….’

누구 역성을 들어줘야 하나.

송희근 과장의 좋지 못한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그는 짧지 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10월 중순.

완연한 가을이었다.

낙엽은 바삭하게 밟히고, 남자의 옆구리가 유독 시려지는 계절이었다.

대찬에게는 말단으로서의 업무가 완벽하게 손에 익은 무렵이었다.

송희근 과장이 팀별 회의에서 말했다.

“어, 조대찬.”

“네, 과장님.”

“이제 업무 좀 익숙해졌지?”

“지금까지 배운 업무는 손에 좀 익었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대관 업무를 소화해도 괜찮겠군.”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관 업무는 최선을 다하는 걸로 끝나면 안 돼. 잘해야 돼.”

송희근 과장의 말투가 종전보다 쌀쌀맞아졌다.

대찬은 온도 차를 금세 감지했다.

그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유백기 동아줄이 튼튼해 보이니 그쪽에 붙겠다는 심산이겠지.’

과장씩이나 돼서 부하 직원의 동아줄이나 기웃거리며 저울질하는 품이 우습기만 했다.

송희근 과장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처음부터 국회 쪽 상대하기는 체급이 달리니까 안 되겠지.”

“아무래도 직급이 낮으니 그럴 것 같습니다.”

대찬도 일개 사원 주제로 곧장 국회에 투입되는 건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원이 아니라 대리이던 시절에도 비서관들에게 번번이 퇴짜를 맞기 일쑤였다.

송희근 과장이 말했다.

“조대찬, 우리 회사에서 대관 업무 소화하는 게 우리 팀 인원만이 아니라는 거 아나?”

“예. 외곽에서 활동하는 인원이 많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누가 알려 준 적 있나?”

“아뇨. 그냥 오다가다 들었습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물론 일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국회와 정부 부처의 숱한 공무원들을 상대하는 일을, 송희근 과장을 비롯한 5명의 팀원으로 감당해 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필래유통에서는 이들 외에도 CR팀이라고 불리는,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 활동을 하는 인원들을 운용했다.

오히려 대관 업무에 있어서 핵심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국회와 정부 부처에서 근무한 경력과 인맥을 바탕으로 회사의 이익을 관철시켰다.

직함도 과장 나부랭이가 팀장인 대외협력 3팀과 달랐다.

차장, 부장, 그리고 말 그대로 요인을 상대하는 이들은 상무 직함까지 달았다.

송희근 과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이번에 좋은 선생님 붙여 줄 테니까 잘 배우고 와.”

“좋은 선생님이라면…….”

“통성명은 가서 직접 하라고. 1층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안 올라오시나요?”

송희근 과장은 픽 웃었다.

“그 양반은 우릴 마이너리거 취급하는 사람이야. 무조건 독고다이라고.”

“아… 알겠습니다.”

마이너리거.

독고다이.

대찬은 두 단어를 듣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간 대찬은 그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체감했다.

‘아, 하필 저 인간이…….’

대찬은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물론 그 사람은 대찬이 초면이었다.

대찬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대외협력 3팀 신입 사원 조대찬입니다.”

“아, 네가 회장님 입김 타고 날아온 애냐?”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고압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상사라지만 초면에 너라니.

하지만 그 사람의 품성을 익히 아는 대찬은 당황하지 않았다.

“공정한 절차를 거쳐 입사했습니다. 불필요한 오해는 안 해 주셨으면 합니다.”

“뭐? 이 새끼가 초장부터 기어오르네.”

“오해를 바로잡아 드린 것뿐입니다.”

“네깟 게 뭔데 바로잡네 마네 건방을 떨어?”

대찬은 그를 쏘아보며 자극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틀린 말씀을 하시는데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뭐야? 이 새끼가 근데 보자 보자 하니까…….”

“아무리 신입 사원이라지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십시오. 불쾌합니다.”

“뭐? 불쾌? 신입이 불쾌할 자격이나 있냐? 불쾌하다고 함부로 말할 자격이나 있냐?”

“그럼 차장이면 부하 직원 함부로 깔아뭉갤 자격 있습니까? 양철 차장님.”

양철 차장은 뜨끔한 눈치였다.

송희근 과장이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일절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건, 대찬을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었다.

1층 커피숍에 있다고만 말하고 대찬더러 사람을 알아서 찾으라는 것도 그랬고, 직급이나 직무 같은 것도 일러주지 않은 건 속 좀 썩으라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런데 대찬이 1층에 가득한 인파 속에서 양철 차장을 척 찾아내고 그의 신상까지 파악하고 있자, 송곳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거 같지 않던 양철 차장도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대찬은 양철 차장을 잘 알았다.

실세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10년 넘게 일한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그 경력이 이따금 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회의원이 쥔 권력의 콩고물을 손에 좀 묻혀 봤다고, 자기를 대단한 권력가로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대찬을 대하는 고압적인 태도도 그런 경력에서 비롯된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찬이 그의 비위를 맞춰 주기는커녕 도리어 바락바락 대드는 건, 역시나 그렇게 바닥을 기어 봤자 이득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양철 차장은 대찬이 한 번의 으르렁거림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걸 확인하고, 일단 분노를 한 김 끄기로 결정했다.

“면허 있지? 네가 운전해라. 흥읍시로 간다. 업무는 그때 설명해 주지.”

“조대찬 사원입니다.”

“뭐?”

“너가 아니라 조대찬 사원입니다. 호칭은 제대로 해 주십시오. 그것도 싫으시면 이름이라도 불러 주시죠.”

양철 차장은 대찬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픽 웃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지랄. 또라이 새끼.”

대찬은 이를 악물고 운전석에 탔다.

꽉 악문 입술이 터져 피가 고였다.

양철 차장은 카시트를 뒤로 최대한 젖히고 대시보드에 발을 올렸다.

구린 냄새가 풍겼다.

대찬은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양철 차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에 흥읍시의회에서 조례를 하나 제정한다고 하던데, 그게 좀 거슬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전통상업지구 보존을 위한 조례. 내용은 전통상업지구, 즉 전통시장이 있는 곳 반경 2킬로미터에는 대형 마트 영업시간 제한.”

“흥읍점 근방에 전통시장이 있는데, 저희도 적용 대상이겠군요.”

“어.”

“그럼 그 조례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하는 게 우리 임무입니까?”

양철 차장은 대찬을 흘긋 보고는 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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