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2화
“정분은 무슨. 하나도 안 어울려. 거기다 둘이 동성동본 아냐?”
“한자가 달라, 둘이. 그럼 뭐, 나랑 유채경은 어울려서 지금 이렇게 안달복달하는 거야?”
“아, 안달복달은 내가 언제 또 그랬다고……!”
징징거리려는 허운의 입을 대찬이 손으로 막았다.
“유백기가 유채경 좋아해.”
“뭐, 뭐라고?”
“이천 가는 명단이 우연히 나온 게 아니야. 분명히 유백기가 고 주임한테 사주했을 거야.”
“유백기 지가 뭔데 유채경을 넘보냐?”
허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을 곁눈질로 흘끔 살핀 대찬이 물었다.
“그렇게 화낼 정도는 아니지 않나?”
“웃기잖아. 지가 뭔데, 지가 뭔데…….”
허운은 자기 일처럼 분노했다.
그걸 보고 대찬이 음흉하게 웃었다.
“형, 솔직히 말해.”
“뭐, 뭘?”
“유채경 좋아하지?”
그러자 허운은 낚싯대에 걸린 도미처럼 파닥거렸다.
“미, 미쳤어? 아니거든? 아니야! 아니라고!”
“침 튀기는 거 보니까 아닌 게 아닌데, 뭘. 나한텐 솔직히 얘기해도 돼.”
“아니라고! 내가 걜 왜 좋아해? 싸가지 없지, 뻑하면 시비 걸지, 나만 차별하지,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하고… 나한테만 쌀쌀맞고… 걔가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허운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면서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의외의 반응에 대찬도 미간을 좁혔다.
허운의 말은 ‘내가 걜 왜 좋아해.’에서 시작해 ‘걔가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로 끝났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네, 좋아하는 거.”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진짜. 쪽팔리니까.”
“뭐야, 언제부터 좋아했어?”
“신입 연수 때부터.”
“그때 형 거라고, 건들지 말라고 했던 게 진심이었어?”
“그래! 진심이었다.”
“오해해서 미안해?”
“됐어. 저리 치워.”
“그럼 왜 소개팅 갖고 안달복달했어?”
“그거야 유채경이 날 대놓고 싫어하니까 나도 내 살길 찾아 떠난 거지.”
“흠, 그렇단 말이지.”
대찬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허운은 툴툴거렸다.
“어차피 될 인연도 아니니까 너도 더 내색하지 마.”
“왜 시도도 안 해 보고 지레 포기해?”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 봐야 아냐? 당연히 안 되지.”
“왜, 될지도 모르지.”
허운은 꿍한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도 너처럼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내가 푸시 좀 해 줘?”
“…진짜?”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 사이야 원래 둘이 알아서 하게 놔두는 게 맞긴 하지만, 조금씩 밀어주는 거야 나쁘지 않지. 대신 나랑 약속 하나만 해 줘.”
“뭔데?”
“앞으로 유백기가 유채경한테 집적거리면 형이 가서 막아 줘.”
“뭐? 내가 왜?”
“내가 왜라니? 그럼 허운의 유채경이 유백기한테 막 괴롭힘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
“그, 그건…….”
“나도 유채경 쫓아다니면서 유백기 떼어내는 것도 싫으니까. 형도 그 꼴 보기 싫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
“그럼 앞으로 유채경 전선은 제너럴 허가 맡는 걸로 하자. 이걸로 나도 한 짐 덜었네.”
대찬은 흡족한 표정으로 허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허운이 여태 유채경을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대찬으로서는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이제이.
허운이 유채경에게 마음을 두고 있으니 유백기가 집적대는 건 허운의 선에서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직장의 상하 관계가 엄정하니 노골적으로 대서지는 못하지만, 허운도 나름의 결기가 있으니 유백기에게 맥을 못 추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역시나 유백기는 이천에서 한 번 당했다고 해서 유채경에 대한 마음을 쉽게 접지 않았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촛불이라면, 여자에 대한 집착은 곰탕 솥도 펄펄 끓이는 장작불이었다.
“채경 씨, 혹시 주말에 일정 있나? 없으면 나랑 봉사활동 시설 답사 좀 안 갈래?”
“네? 유 선배님이 답사를 왜…….”
“아니, 뭐, 나도 평소에 봉사활동에 관심도 많고…….”
“그, 그러세요?”
유채경은 단칼에 거절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유백기의 얄팍한 속내를 알게 된 허운은 적극적인 방어전에 돌입했다.
허운이 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 유채경, 그거 나랑 가기로 했잖아.”
“어, 어어? 허운 씨랑?”
허운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래. 너 건망증 점점 심해진다?”
“아, 아아! 맞다, 그랬지! 유 선배님, 어떡하죠? 그러고 보니 허운 사원이랑 같이 가기로 했었네요.”
“…그래?”
“네. 죄송해요.”
“그래. 그럼 뭐…….”
유백기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는 물러나면서 쥐고 있던 빈 종이컵을 한 손으로 구겼다.
‘이 새끼들이 하나씩 튀어나와서 남의 연애 사업을 망치고 지랄이야…….’
유백기는 한없는 불쾌감에 휩싸였다.
그는 복도를 걷다가 감정을 실어 종이컵을 휙 쓰레기통에 던졌다.
종이컵은 쓰레기통의 귀퉁이를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유백기는 그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저기, 이봐요.”
“에?”
“쓰레기가 안 들어갔으면 주워서 다시 넣으셔야지.”
“에?”
유백기는 뒤를 돌아봤다.
늙수그레한 청소부였다.
그 모습에 유백기는 피식 웃었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가 아니고, 다시 넣으시라고요.”
“아이, 아주머니! 그 정도는 아주머니가 좀 해 주셔야 되는 거 아닌가요?”
“뭐예요?”
“아주머니 청소 용역 맞으시죠? 당연히 아주머니가 하셔야죠.”
그러자 청소부도 한 성질 하는지 허리에 손을 얹고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여기 직원이면 아무 데나 종이컵 버려도 돼요? 내가 아니라 사장님이 주우라고 했어도 똑같이 말할 거예요?”
“사장님이 주우라고 했으면 군말 없이 바로 주웠죠. 근데 아주머니는 청소부잖아요. 청소가 업무잖아요. 청소부한테 청소하라는 게 뭐, 잘못됐어요?”
청소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그리고 아줌마도 똑같은 거 아냐? 내가 아니라 사장님이 종이컵 저렇게 던져 놨어도 똑같이 불러서 주우라고 했을 거예요? 아니잖아요?”
“뭐, 뭐라고요……?”
“안 그래도 여기저기 짜증나는 일만 있는데 왜 아줌마까지 나서서 보태요, 보태긴.”
유백기는 쉬지 않고 쏘아댔다.
청소부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우연히 목격한 대찬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겨우 종이컵 하나 갖고 좋은 날에 얼굴 붉히시고 그래요. 이건 공평하게 제가 치울게요.”
“착한 척하지 마.”
“착한 척도 착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는 선배는 왜 착한 척도 못하실까. 천성이 안 착해서 그럴까.”
“야! 너 말 다 했어?”
“네, 다 했어요.”
대찬은 미소를 지으면서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청소부의 팔을 살짝 잡으며 한마디 보탰다.
“여사님도 마음 푸세요.”
“아휴…….”
유백기의 눈에는 그게 또 가식이고 천사 코스프레였다.
곱게 보이지 않으니 말도 곱게 안 나왔다.
“너 진짜 상사 알기를 엿같이 알 거야? 너 이러다 큰코다친다고.”
“상사 알기를 엿같이 아는 게 아니고요, 유백기를 엿같이 아는 거고요, 이러다 큰 코 안 다치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고요.”
“이, 이 새끼가……!”
“그래, 차라리 나한테 화를 내요. 아무 힘도 없는 여사님한테 왁왁대지 말고.”
유백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간신히 화를 다스렸다.
요즘 평판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마당에 분란을 일으키면 다치는 건 대찬이 아니라 유백기 자신이었다.
그는 핏줄이 곤두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씹어 뱉듯 대찬에게 말했다.
“조대찬, 일 없어? 노닥거리지 말고 들어와서 업무나 봐.”
“옙.”
대찬은 서둘러 걸음을 옮기다가 슬쩍 청소부의 손에 자신의 명함을 꽂았다.
청소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대찬은 눈짓을 하며 소곤소곤 말했다.
“오늘 일 도저히 그냥 못 넘어가겠으면 연락 줘요.”
그러고는 유백기의 호통이 떨어질까 얼른 그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대찬은 그러는 순간까지 청소부에게 웃으면서 고개 숙였다.
청소부에게서 전화가 온 건 오후 8시였다.
일부러 퇴근 시간을 피해서 전화를 건 걸 테다.
대찬은 씩 웃음을 지었다.
‘센스 있는 아주머니시네.’
작은 배려지만, 자신의 화 때문에 눈이 뒤집혀 작은 배려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생각하면 청소부는 제법 사려 깊은 성정이었다.
대찬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내가 그냥 넘어가려고 해도 자꾸 속에서 천불이 나서 그럴 수가 없어…….”
“그럼요. 그거 참으면 병 돼요.”
“그래서 무작정 전화를 걸긴 했는데… 그쪽도 그 싸가지 없는 종이컵이랑 한 패 아뇨.”
“같은 회사에 다닌다고 어떻게 무조건 한 패예요. 아까 보셨잖아요. 저랑 그 사람이랑 한 패 같던가요?”
“…남보다 못해 보이긴 했어요.”
“거봐요.”
“그래서, 나더러 왜 전화하라고 했어요?”
“따로 뵐 수 있을까요? 여사님 편하신 곳에서.”
대찬은 청소부의 집 근처 커피숍에서 그녀를 만났다.
청소부는 지금 이 만남이 맞는 것인지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했다.
애먼 커피잔만 매만졌다.
대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사님, 이것만 여쭤볼게요. 그 싸가지 없는 녀석한테 한 방 먹이고 싶으세요?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지나가길 원하세요?”
“허구한 날 있는 일이긴 하지만 그런 싸가지는 드문 싸가지거든. 마음 같아서는 혼쭐을 내고 싶은데, 일개 청소부가 무슨 주제로 그러겠어.”
대찬은 미지근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려운 일이죠.”
“청소부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지, 어떡해요?”
“그럼 이번 한 번은 그냥 꾹 참고 넘어가 주세요. 단, 다음에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반드시 사과 받고 싶다, 이런 경우엔 제게 말씀을 해 주세요.”
“총각한테 말을 하면 뭐가 달라져요?”
“그건 여사님 결심에 따라 달라요. 저한테 화풀이만 하고 끝내셔도 되고, 작정하고 물어뜯으시겠다면 기꺼이 도와 드릴게요.”
청소부는 머뭇거리면서도 궁금증이 동하는 눈빛을 발했다.
“어떻게요?”
“그때 연락을 주세요. 아, 평소에 이거 항상 휴대하시고요. 켜 놓은 채로요.”
대찬은 휴대용 녹음기를 내밀었다.
청소부는 그걸 받아서 주머니에 챙겼다.
유백기와 청소부의 악연은 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차전이 벌어졌다.
파쇄된 종이 뭉치가 도화선이었다.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잘 동여매지 않아 봉투를 내놓자마자 잘게 부서진 종이들이 사방팔방으로 뿌려졌다.
삽시에 복도가 난장판이 되었다.
청소부 하나만으로는 턱도 없었다.
해당 층의 청소부들이 모두 달라붙어야 할 판이었다.
유백기는 그걸 보고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청소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봐요, 이거 이대로 놓고 그냥 가기예요?”
“하, 또 아줌마예요?”
“난 또 당신일 줄 알았어. 이 회사에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쓰레기 내놓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거든.”
“아줌마, 1절만 합시다, 제발 좀!”
“쓰레기만 제대로 내놓으면 그쪽하고 말 섞을 일도 없어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하,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아줌마, 나 잠깐 따라와요.”
“따라오라면 못 따라갈 줄 알고?”
유백기는 청소부를 기어코 빈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청소부에게 따졌다.
“진짜 나한테 뭐 억하심정 있습니까?”
“없어요. 쓰레기만 잘 버리면 돼.”
“쓰레기 치우는 게 아줌마 일이라고.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은근슬쩍 말 놓지 말고요. 쓰레기라고 다 치우는 줄 알아요? 복도에다 똥 싸 놓은 거 현행범 잡았는데도 그게 다 내 책임만 돼요?”
“지금 뭐 내가 똥이라도 갈겼다는 거야, 뭐야?”
“비유하자면 그렇단 거죠!”
유백기는 입술을 비틀었다.
“하, 비유? 아줌마, 비유가 뭔지나 알아요?”
“왜, 왜 몰라, 내가?”
“제대로 배웠으면 그런 잡소리를 비유라고 안 하지. 아, 됐어요! 나 바쁘니까 알아서 치워요.”
“뭐, 뭐? 제대로 배웠으면? 잡소리?”
유백기는 귀찮은 듯 손사래를 쳤다.
“됐다고요. 나도 가서 일할 테니까 아줌마도 가서 아줌마 일 하라고.”
청소부는 작정하고 유백기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