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1화
유백기는 싱글벙글, 유채경은 시무룩했다.
그들보다 먼저 회사 차량 앞에 도착한 이가 있었다.
“좀 늦게 나오셨네요? 타세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
“조대찬, 네가 왜 여기 있어?”
“아, 못 들으셨구나. 저도 이천 같이 가기로 됐어요.”
“뭐? 과장님이 그러라고 했어?”
“네, 허락 받았습니다.”
유백기의 얼굴이 삽시에 망쳐졌다.
얄미운 녀석의 새로 산 운동화에 흙탕물을 끼얹은 듯, 대찬은 묘한 쾌감을 느꼈다.
유백기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대리님들은?”
“대리님들 허락도 받았죠, 당연히.”
대찬은 유채경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채경 씨, 얼른 차에 타요. 날씨 쌀쌀하다.”
“네!”
유채경은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당연하다는 듯 조수석에 올라탔다.
대찬은 멍하니 서 있는 유백기도 기꺼이 챙겨 주었다.
“타시죠, 선배.”
유백기는 뒷자리에 올라탔다.
뒷자리가 상석이라지만 어쩐지 그는 쓸쓸했다.
유채경은 자신에게 절대 보여 주지 않던 밝은 웃음을 대찬에게 지으면서 말했다.
“조대찬 씨, 피곤할 텐데 껌이나 하나 씹으세요. 자.”
“하나밖에 없잖아. 유 선배 드려.”
“그러다 조대찬 씨 피곤해서 사고라도 나면 우리 셋 다 죽는 거예요. 조대찬 씨 한테 주는 게 합리적이지. 그렇죠, 유백기 선배님?”
“어? …어.”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고맙게 먹을게.”
“안전운전 부탁해요.”
유채경은 생긋 웃으면서 대찬의 입에 껌을 넣어 주었다.
‘껌 하나 갖고 지랄이야.’
유백기는 입이 뚱하게 부어서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천으로 향하는 여정 내내 유채경은 대찬에게 말을 걸었다.
대찬은 또 그걸 부드럽고 능숙하게 받아 주었다.
유채경의 입장에선 대찬이 유백기보다 백배는 편했다.
동기면서 알고 지낸 지도 유백기보다 오래됐고, 무엇보다 말이 통했다.
그에 비하자면 유백기가 대찬보다 나은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유백기는 뚱한 얼굴로 이천까지 가는 내내 둘의 대화를 라디오처럼 경청해야 했다.
이 상황을 못 견뎌서 이어폰을 꺼내려던 유백기는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어폰까지 끼고 있으면 사람 꼬락서니가 이보다 더 우스워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천에 다다른 대찬은 차를 세우고 유백기에게 물었다.
“유 선배, 이 주변에 맛집 알아 놓으시지 않았나요?”
“뭐?”
“아니, 아까 선배 모니터 보니까 이 주변에 파스타 가게 찾아 놓으셨던데…….”
“아, 아니, 모르겠는데.”
“그래요? 이상하다.”
파스타 소리를 들은 유채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시라니 다행이네요. 피곤한 와중에 느글느글한 거 먹으면 완전 별로던데.”
유채경의 말에 유백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유백기는 푹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 숙소로 가자. 피곤하다.”
“네, 그럴게요.”
대찬은 품평회가 열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모텔에 차를 세웠다.
대찬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카운터에 말을 건넸다.
“사장님, 방 있죠?”
“셋이 한방은 안 돼요.”
“아무렴요. 일단 제일 편한 방 하나 먼저 주세요.”
사장에게서 열쇠를 넘겨받은 대찬은 유백기에게 다시 건넸다.
“선배, 편하게 혼자 방 쓰세요. 저랑 같이 쓰는 거 별로 안 좋아하실 거 아니까.”
“뭐? 그럼 너는?”
순간 유백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천까지 오는 내내 정다웠던 대찬과 유채경을 생각한 그는, 자연스럽게 대찬과 유채경이 한방을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었다.
대찬은 헛된 상상이나 하는 그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씩 웃었다.
“제 방은 사비로 결제할 거예요. 저는 공식 출장이 아니니까.”
“…어, 그래라.”
유백기는 입술을 쭈뼛거리더니 먼저 방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올라가는 그의 귀에 유채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배고픈데, 조대찬 씨는 배 안 고파?”
“나 거의 죽을 지경이야. 그래도 이천까지 왔는데 이천 쌀밥 맛이라도 봐야지 않아?”
“완전 좋아! 잘 지은 밥에 된장찌개 하나만 있어도 잘 먹을 자신 있어.”
재잘거리는 남녀의 목소리가 유백기의 귀에서 멀어졌다.
그들의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때맞춰 유백기의 배가 꼬르륵 소리를 냈다.
“…씨발.”
유백기는 호실에 비치된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컵라면을 먹었다.
커피포트에 끓인 물에서 썩은 양말 냄새가 났다.
다음 날, 품평회까지 셋은 스케줄을 안전하게 소화했다.
대찬이 굳이 유채경을 챙기지 않더라도 유채경이 대찬의 옆에 꼭 붙어 다녔다.
셋이 있으면 꼭 하나는 나머지가 되는 법, 나머지는 당연히 유백기였다.
그는 기분을 완전히 망친 얼굴로 품평회를 보냈다.
내내 그런 얼굴로 있으니 거기에 나온 중소 업체 사장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유 사원,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어?”
“예? 아, 아뇨…….”
유백기는 급히 거짓 웃음을 걸쳤지만, 노회한 사장이 얄팍한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다른 사장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볕 좋은 주말에 시골 이천까지 와서 노인네들 수발이나 들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지, 뭐!”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됐어! 자네 마음을 우리가 몰라?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그런 건 생각만 하라구. 표정에 드러내면 못 써, 샐러리맨이.”
“그게 아닌데…….”
아니라고 해 봤자 믿어 줄 사람들이 아니었다.
반면에 대찬은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얼굴 팔기에 바빴다.
대찬은 대외협력부의 업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 부서야말로 인맥이 곧 능력이었다.
아무리 당장에 불필요한 인연일 것만 같은 쌀가공협회 소속 기업의 사장님들이라도, 적어도 통성명쯤은 해 두는 편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이런 중소 기업 사장들은 대기업보다 치밀한 계산이 아닌 잠깐의 정, 사장의 직관에 의존하는 비중이 크다.
그러니 얼굴을 팔려면 골목에서 빈대떡이나 지져 먹고 장기나 둘 것 같은 이들에게 파는 게 훨씬 더 유익한 일임을 대찬은 잘 알았다.
대찬이 주말에 이천까지 온 건 물론 유백기로부터 유채경을 떼어내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거기에 큰 이득을 기대할 순 없지만 알아 둬서 나쁠 것 없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건 부산물쯤 되었다.
대찬은 단기 속성으로 암기한 내용으로 사장들에게 점수를 땄다.
사장들은 그걸 알면서도 기껍게 웃었다.
그들 기준으로 요즘 사람이 이 정도 열의를 보여 준 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그쪽 청년은 서글서글하네, 유 사원하고 달리.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
“조대찬 사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 좋아요. 나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사장들은 피식 웃으면서 기꺼이 대찬과 악수를 나눴다.
유백기의 속은 당연히 더 배배 꼬였다.
결국 유백기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천을 떠나야만 했다.
월요일이 됐을 때 유백기는 그 후유증마저 감당해야 했다.
송희근 과장은 출근하자마자 유백기를 찾았다.
“유백기.”
“네, 과장님.”
“품평회에서 일을 어떻게 한 거야?”
“…네?”
애초에 품평회 참석을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얼굴만 비치고 오는 것만으로도 제 몫은 다 한 게 아닌가.
그런데 주말까지 허비한 자신을 위로는 못할망정 꾸짖으려는 태세니, 유백기는 억울함이 솟을 수밖에 없었다.
송희근 과장은 그대로 화가 났다.
“품평회 가서 거기 있는 게 죽기보다 싫은 표정으로 있었다면서?”
“그건 아니고요…….”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사장님들이 전화를 걸어서 사원 품행이 방정치 못하냐고 한 마디씩 거드냐고.”
“그게…….”
유백기는 차마 유채경과의 핑크빛 출장이 대찬 때문에 뭉개져서 표정이 그랬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가 침묵하니 송희근 과장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 위험해. 정신 좀 차려.”
“…예, 알겠습니다.”
송희근 과장은 유백기 보란 듯이 대찬을 칭찬했다.
“조대찬 씨, 사장님들이 조대찬 씨 서글서글하다고 난리야. 영감쟁이 구워삶는 스킬이 있나 봐.”
“스킬은요. 신입이라고 귀엽게 봐 주신 거죠.”
“그 영감들 성질이 더러워서 욕은 잘해도 칭찬은 잘 안 하거든. 조대찬 씨는 프라이드 가져도 좋아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송희근 과장은 피식 웃고 자리에 앉았다.
유백기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폐지 뭉치를 들고 파쇄기로 갔다.
종이라도 시원하게 갈리면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듯했다.
하지만 파쇄기마저 유백기에게 등을 돌렸다.
파쇄기는 붉은색 점멸 신호를 보냈다.
꽉 찼으니 비우라는 뜻이었다.
유백기는 파쇄기 문을 열고 폐지 뭉치를 버리려다가 그만 바닥에 엎지르고 말았다.
먼지 같은 폐지 뭉치가 풀풀 날렸다.
“씨발…….”
유백기는 거의 울 지경이었다.
오가는 길에 대찬과 마주친 유채경이 그에게 웃으며 말했다.
“조 사원님.”
“어, 채경아.”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물어봐.”
유채경은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며 말했다.
“왜 이천 따라왔어?”
“어?”
“그렇잖아. 솔직히 조대찬 씨는 집에서 쉬어도 되는데 굳이 왜 무리해서 이천 따라왔냐고.”
“그게…….”
대찬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모든 경우에 통하진 않지만, 이 경우에는 통했다.
유백기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유채경이 알아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니 대찬은 쉽게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게 유채경에게는 다른 신호로 느껴졌다.
수줍음 같은 그런.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
“뭐라고?”
“나한테 관심 있어서 일부러 따라온 거 아니냐구.”
“허, 참.”
“허, 참, 뭐? 너무 정곡을 찔렀나? 모르는 척해 줄 걸 그랬나?”
대찬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기야 유채경의 눈에 그렇게 보일 만도 했다.
달콤한 주말을 포기하고 자기 뒤를 쫄래쫄래 따라왔으니 좋아하지 않고서야 가당키나 한 일인가.
대찬은 얼른 유채경의 착각을 깨뜨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야.”
“뭐? 아니라고?”
“너 예쁜 거 알고 성격 쿨한 것도 아는데, 그냥 좋은 동기 동생이지, 흑심은 안 품고 있다고.”
유채경은 실망한 듯했다.
“뭐야, 그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따라왔어?”
“누가 너 따라갔대? 유 선배 따라간 거다?”
“둘러댈 거면 좀 성의 있게 둘러대라!”
유채경은 심통 맞게 쏘아붙이고는 대찬을 휙 지나쳐 갔다.
대찬은 난처하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진짠데…….”
유채경이 가니 허운이 왔다.
허운의 얼굴은 다소 상기되어 있었다.
“야, 너 주말에 이천 갔다 왔다면서.”
“소문이 빠르다.”
“유채경이랑 갔다 왔다면서.”
“어.”
“아우, 씨…….”
허운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대찬의 얼굴도 덩달아 일그러졌다.
“뭐야, 어디 아파?”
“너는 왜 굳이 그런 데 따라가냐?”
“엉?”
“설마 너, 유채경 좋아하냐?”
“형도 그 소리야?”
“빨리 말해. 좋아하냐고.”
대찬은 푹 한숨을 쉬었다.
“안 좋아해. 됐냐?”
“지, 진짜야?”
그제야 허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대찬은 그 변화를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진짜다. 근데 내가 유채경 안 좋아한다니까 왜 형이 안심하는 건데?”
“그, 그건 알 거 없고! 그럼 왜 따라갔어!”
“오늘따라 심하게 막무가내네, 이 형.”
“빨리 대답해.”
대찬은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춰 허운에게 말했다.
“소문 안 낼 자신 있어?”
“당연하지!”
대찬은 짧게 숨을 토하고 허운에게는 사실을 털어놨다.
“내가 만약에 유채경 안 따라갔어 봐. 그럼 그림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어떻게 되는데?”
“유백기랑 유채경 둘이 이천 가는 그림이야.”
“뭐 어때? 둘이 완전 어색한 선후배 사인데.”
“뭐가 어떠냐니, 정분나기 딱 좋은 그림이잖아.”
허운은 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