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90화
머리를 식히려고 휴게실로 향하던 유백기는 휙 몸을 돌려 대찬을 째려봤다.
대찬은 뒤통수가 뜨끈했지만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한태윤 대리가 나서서 유백기에게 한마디 쐈다.
“조대찬 씨한테 할 말 있습니까? 있으면 하세요. 그렇게 뜸들이지 말고.”
“아, 아닙니다…….”
유백기는 화들짝 놀라며 찌그러진 채로 휴게실을 향했다.
그는 혼자서 궁싯거렸다.
“씨발, 며칠 전까지는 우쭈쭈 하더니 갑자기 나한테만 독박 씌우고 있어. 엿같게.”
“뭐가 그렇게 엿같아?”
내놓고 상사 욕을 하던 유백기는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씨, 뭐야! 깜짝이야.”
“지은 죄가 많나 봐. 그렇게 놀라게.”
“아, 너였냐? 다른 선밴 줄 알고 놀랐잖아, 새끼야.”
유백기는 자신의 동기인 걸 확인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동기는 대외협력지원팀의 고 주임이었다.
고 주임은 필래백화점 입점 업체 경합에서 흥부냉면과 손을 잡았다.
그는 원래 업체 선정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유백기 덕분에 구원받았다.
포 빌리지와 손을 잡은 유백기가 그에게 흥부냉면을 선선히 넘겨주었다.
덕분에 고 주임은 땅에 떨어진 물건을 줍듯 쉽게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
유백기는 자기가 준 상처는 쉽게 잊어도 자기가 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았다.
“야, 흥부냉면 감사 턱 언제 낼 거야?”
“야야, 나 보면 흥부냉면 소리밖에 안 나오냐? 어련히 날 잡을까.”
“빨리 잡으라고. 이러다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말고.”
“참 나, 암튼 유백기 질긴 건 알아줘야 된다. 알았어, 알았다고.”
유백기와 고 주임이 투닥대는 사이에, 한 무리의 여직원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필래유통, 그중에서도 대외협력부는 여직원의 숫자가 적었다.
그래서 한 줌뿐인 여직원들은 서로 식사도 함께 하고 티타임도 가지면서 종종 무리 지어 다녔다.
잠깐의 휴식 시간도 함께 모여 수다를 떨었다.
여직원들은 유백기, 고 주임과 마주쳤다.
겨우 입사 2년 차인 둘보다 경력이 많은 여직원들이 있었다.
이에 유백기와 고 주임의 고개가 자동으로 숙여졌다.
“안녕하십니까.”
“네.”
구원희 차장은 그들의 인사를 냉랭하게 받았다.
경합 과정에서 유백기의 파탄 난 성품이 여직원들 사이에도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구원희 차장은 대외협력부에서 연차가 가장 높은 여직원이었다.
더불어 대외협력지원팀의 팀장이었다.
그는 직속 부하 직원인 고 주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고 주임, 휴게실 온 지 30분 다 돼 가지 않아? 그렇게 노닥거릴 여유가 없을 텐데?”
“아… 이제 가려던 참입니다.”
“내 입에서 이런 얘기 나오기 전에 좀 움직여 줬으면 좋겠는데.”
“…예, 죄송합니다.”
유백기, 고 주임보다 유일하게 연차가 낮은 유채경은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채경 씨.”
둘은 고개를 까딱여 인사를 받았다.
고 주임은 그러고 바로 시선을 뗐지만, 유백기의 시선은 유채경을 따라 오래 머물렀다.
고 주임은 그런 유백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고는 검지와 중지를 붙여 입에 갖다 댔다. 담배 한 대 피우잔 소리였다.
흡연장으로 간 유백기가 피식 웃으면서 고 주임에게 말했다.
“야, 쿠사리 먹었으면 자리로 가서 일이나 할 것이지, 그 와중에 담배를 또 피우냐?”
“쌍년, 내가 뭘 해도 지랄할 텐데 내 멋대로 할란다.”
“암튼 깡다구는.”
담배를 뻑뻑 피워 대던 고 주임이 유백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야.”
“왜?”
고 주임의 입가가 살짝 벌어졌다.
“너 유채경 좋아하지?”
“뭐, 뭐?”
“새애끼, 얼굴 빨개지는 거 보니까 맞네.”
“아, 아니야…….”
“아니긴, 귀신을 속여라. 아주 그냥 유채경한테서 시선을 못 떼더만.”
고 주임의 말에 유백기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좀 구미가 당기긴 해. 지연이랑 그렇게 깨지고 나서 유채경이 자꾸 눈에 보이더라. 난 여자가 끊기면 안 되거든.”
“유채경, 괜찮긴 하지. 애가 싹싹하고 생글생글 잘 웃는다더라.”
“미드도 빵빵하고…….”
유백기는 실없이 헤에, 웃었다.
그런 그를 보고 고 주임은 웃음을 흘렸다.
“야, 그럼 흥부냉면 감사 턱 내는 대신 이거 어때?”
“뭐.”
“내가 유채경이랑 잘되게 다리 좀 놔줄게.”
유백기는 피식 웃었다.
“네가 뭔 수로 다리를 놓냐?”
“지원팀 무시하지 마.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는 지원팀이 직빵이거든요?”
“…기대해도 되냐?”
“형만 믿어라.”
고 주임은 필터까지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유백기에게 다리를 놔주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고 주임은 때를 포착했다.
기회는 금방 왔다.
구원희 차장이 고 주임에게 말했다.
“이번에 쌀가공식품협회에서 품평회 하는데, 우리 쪽에서 인원 참석시키라고 했어. 2명만 뽑아.”
“대리급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대리는 무슨, 안 그래도 손 달리는데. 어차피 구색만 맞추는 자리니까 주임, 사원급으로 보내.”
“옙, 알겠습니다.”
고 주임은 배시시 웃으면서 주저 없이 명단에 이름을 채웠다.
유백기, 유채경.
쌀가공식품협회의 품평회는 경기도 이천에서 열렸다.
꽤 먼 거리를 단둘이서 가다 보면, 유백기 하기 나름으로 유채경의 호감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게 고 주임의 판단이었다.
고 주임은 유백기에게 사내 메신저로 쪽지를 보냈다.
-이번에 쌀가식협 품평회 명단에 너랑 유채경 올려놨어. 잘해 봐.
그걸 보고 유백기는 살짝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그는 파티션 너머 일에 열중하는 유채경을 흘끗 바라봤다.
‘예쁘다, 예뻐.’
유백기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유채경과 유백기가 속한 팀의 팀장인 1팀의 구용표 과장과 3팀의 송희근 과장은 그들을 품평회에 보내는 걸 허락했다.
명분이야 그럴듯했다.
구원희 차장의 판단대로 구색만 맞추면 되었다.
말단인 유백기와 유채경을 보내는 게 맞았다.
거기에 한 팀에 집중한 게 아니라 인원을 적절히 안배했으니 구 과장과 송 과장도 오케이 사인을 냈다.
그걸 모르던 대찬은 유백기의 표정이 왜 저렇게 싱글벙글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왜 저렇게 신났어?’
대찬은 유백기의 웃음이 싫었다.
회사에 있는 내내 분노와 슬픔, 좌절만 맛보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굳이 수고를 감수하고서라도 그가 웃는 이유를 찾아내 망치고 싶었다.
그는 이메일이나 사내 메신저로 전할 수 있는 업무를 굳이 출력했다.
그리고 유백기가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출력물을 들고 가 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두 눈은 유백기의 모니터를 빠르게 훑었다.
모니터에는 하라는 업무는 없고 숱한 인터넷 창이 떠 있었다.
‘이천 맛집… 이천 유명한 카페… 이천 분위기 좋은 곳……. 뭐야, 이거.’
유심히 살펴보려는 사이, 유백기가 자리로 돌아왔다.
“뭐야? 내 자리에서 뭐 하냐?”
“아, 선배, 말씀하신 자료 출력해서 올려놨습니다.”
“어.”
유백기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천 가시나 봐요?”
“뭐?”
“아니, 보려고 본 건 아니고 모니터에…….”
그러자 유백기는 얼굴을 확 찡그리며 대찬을 밀쳤다.
“네가 알 바 아니야. 품평회 참석하러 가는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 마. 언제부터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냐?”
“아, 품평회, 알겠습니다.”
대찬은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고민했다.
‘겨우 품평회 가는데 왜 저렇게 힘을 줘?’
혼자서는 풀리지 않던 의문이 동기들과의 메신저 몇 번으로 금방 풀렸다.
대찬은 동기들에게 쪽지를 보냈다.
-혹시 이천에서 열리는 품평회 관련해서 아는 거 있어?
허운과 서원웅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신 유채경이 대답해 주었다.
-어? 나 거기 가기로 됐어요.
대찬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유백기가 유채경이랑 간다고?
그는 유채경에게 답장을 보냈다.
-누구누구 가는지 알고 있어?
-저 혼자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누가 또 간대요?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대찬은 그렇게 얼버무리고 유채경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대찬은 입술을 내밀고 혼자 골몰했다.
이미 유백기, 유채경이 명단에 포함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만한 행사에 3명 이상의 인원을 보낼 리 만무하다는 걸 대찬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유채경하고만 가는데 왜 맛집이며 카페를 검색해? 분위기 좋은 곳은 또 뭐고.’
대찬은 처음엔 잘 보여야 할 상사와 동행하는 줄 알았다.
만약 그렇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유채경과 둘이 가는데 그런 궁리를 한다는 건 예사로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 유백기는 유백기네.’
첫 번째 삶에서도 그랬다.
첫 번째 삶에서의 유백기도 유채경에게 집적거렸다.
그러다 매운 퇴짜를 받고 완전히 돌변, 유채경을 들들 볶고 쥐 잡듯이 잡았다.
그런 유치한 복수는 끝내 유채경을 이직의 길로 내몰았다.
그 찌질의 역사가 반복되려는 조짐이 대찬의 눈에 포착되었다.
“결자해지해야지.”
이는 대찬의 책임이 아주 없다고는 못했다.
경합 때 유백기를 고의로 도발하지 않았다면, 유백기는 지연이라는 이름의 애인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유채경에게 집적거리는 일도 없었을 터.
물론 유백기의 성격에 지연이라는 애인과 오래 갔을 리 만무하고, 역시나 그다음 타깃은 유채경이 됐을 확률이 농후하기는 했다.
‘그래도 유채경에게 유백기 묻히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대찬은 오지랖을 넓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외근 나가려는 송희근 과장을 복도에서 붙들었다.
“저, 과장님.”
“응? 왜.”
“이천에서 하는 쌀가공식품협회 품평회 있잖습니까.”
“어.”
“혹시 저도 같이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송희근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왜?”
“배울 점이 많아서 혹시 부담이 안 되면 동행하고 싶습니다.”
“뭘 겨우 그런 행사에 힘을 빼려고 그래? 내일 토요일인데 내일이 본 행사야. 뭐 하러 자진해서 주말을 날리려고 그래?”
“안 될까요?”
송희근은 대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안 될 거야 없지만, 사서 고생한다는 게 웃겨서 그렇지. 다녀오려면 다녀와.”
“옙! 감사합니다!”
“참 별 게 다 감사하다.”
송희근 과장은 피식 웃고는 자리를 떴다.
품평회에 가려면 정시보다 1시간 일찍 사무실을 비워야 했다.
대찬은 유백기가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간 사이 한태윤, 천원석 두 대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일도 많지 않은 때인지라 한태윤 대리는 선선히 승낙했다.
하지만 천원석 대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아는 대찬은, 그에게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했다.
“월말에 대리님이 가게 되신 양로원 봉사,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진짜? 그렇다면야 뭐…….”
대찬의 역성을 들어주는 게 마땅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호기를 그냥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두 대리에게 승낙까지 얻었으니 대찬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유백기의 연애 사업에 훼방을 놓을 참이었다.
그즈음 돌아온 유백기가 유채경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채경 씨.”
“네?”
“가자.”
“어딜 가요?”
“이천.”
그러자 유채경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예? 선배님도 가세요?”
“어. 너랑 나랑 가게 됐어.”
“…….”
유백기와의 동행이 내키지 않았다.
대찬에게 전해 들은 얘기로 유백기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었다.
굳이 전해 듣지 않았어도 몇 달간 같은 부서에서 근무해 본 것만으로도 견적은 비슷하게 나왔다.
이런 놈팡이랑 단둘이 이천까지 갔다 와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게다가 저녁에 쌀가공협회 소속의 중소기업 사장들과 안면을 트고 술자리를 가진 후, 다음 날에 있는 품평회까지 참석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백기와 1박 2일을 같이 있어야 한다는 뜻.
유채경은 절망했다.
그런 유채경의 속을 모르는 유백기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가자. 회사 차도 빌려 놨으니까.”
“네…….”
둘은 회사 차량이 주차돼 있는 곳으로 향했다.
표정은 대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