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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9화 (88/556)

난 할 수 있어 89화

“저도 뭐 약소하지만 회사에서 선물 받은 거 있거든요. 그것도 같이 나눠 드시죠.”

자기 것도 나눠 먹자는데 싫다고 할 명분이 없었다.

큰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자꾸나. 얼마나 대단한 건지 구경이나 해 보자.”

“아이, 대단한 건 아니고요. 누나.”

대찬의 부름에 조수진이 대답했다.

“어?”

“회사에서 선물 준 거, 그것 좀 갖다 줘.”

“어, 그래…….”

한바탕 쏘려던 조수진은 대찬의 눈짓에 일단은 수긍했다.

대찬이 아까 선물을 넘겨줬을 때 조수진은 선물의 정체를 미리 확인해 둔 참이었다.

조수진이 선물을 가지러 간 사이, 대찬은 5남매 중 막내인 삼촌에게 물었다.

“삼촌, 술 좋아하시죠?”

“어? 어, 좋아하지, 그럼.”

그는 주당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단순히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다. 좋은 술을 찾아 마시는 미식가적 취향을 갖고 있었다.

덕분에 그가 술에 지불하는 돈은 한 줌 되지도 않은 살림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회사에서 선물로 술을 줬어요. 고기에 곁들이면 좋을 거 같아서.”

“그, 그러냐? 좋은 술이래?”

술이란 말에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 모양이었다.

파블로프에게 개가 있다면 조씨 일가에는 막내 삼촌이었다.

대찬은 빙글빙글 웃었다.

“글쎄요, 저는 술을 잘 몰라서. 삼촌이 보고 알려 주세요.”

대찬은 술병을 삼촌에게 넘겼다.

삼촌은 조심스럽게 넘겨받은 뒤 찬찬히 살폈다.

“어디 보자…….”

“어때요, 좋은 거예요?”

대찬이 넌지시 묻자 친척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쏠렸다.

갑자기 한우에서 술병으로 옮겨진 관심이 조은찬은 내심 짜증났다.

‘저게 뭐 별거라고…….’

대찬은 조은찬의 꽁해진 얼굴을 흘끔 봤다.

술병을 천천히 살피던 삼촌의 눈이 커졌다.

“리샤르 에네시?”

그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왜요, 좋은 거예요?”

대찬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술로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조예가 깊은 삼촌이었다.

웬만한 술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러니 놀라는 삼촌을 보고 친척들이 더 놀랐다.

삼촌이 얼떨떨한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너희 회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회사니?”

삼촌의 이례적인 반응에 작은고모가 궁금증이 동한 얼굴로 물었다.

“왜, 왜, 좋은 거야?”

“리샤르 에네시. 헤네시의 설립자 이름을 딴 제품인데, 100년 이상 된 원액만을 블렌드해서 만든 고급 꼬냑이야.”

“뭔진 모르겠지만 좋은 건가 봐.”

“이북의 김정일이 즐기는 제품이고, 북한에서는 최고의 뇌물로 통하거든?”

“오마나!”

작은고모의 생기 넘치는 리액션이 판소리의 고수처럼 찰떡같았다.

“명절 선물로 이런 걸 줄 수가 있나?”

“그래서 얼마, 얼만데?”

“모르긴 몰라도 대리 월급보다는 많을 거다.”

“어머머머, 어떡해!”

리샤르 에네시 한 병으로 갑자기 관심을 뺏긴 조은찬의 목젖이 꿈틀거렸다.

이 상황이 못마땅한 큰고모가 따갑게 쐈다.

“상여금 대신 준 거 아냐?”

“상여금은 따로 받았어요, 고모.”

대찬은 능글능글 웃으면서 틀린 의혹을 바로 정정해 주었다.

그러자 큰고모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더 말하지 못했다.

그때 조수진이 술병과 함께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이게 뭐야?”

봉투에 종이가 담겨 있었다.

조수진이 펴 보니 붓 펜으로 정갈하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조수진은 험험, 헛기침을 하고 다 들으라는 듯 낭랑한 목소리로 읽었다.

-사랑하는 조대찬 사원에게.

안녕하십니까. 필래그룹 회장 서청수입니다.

명절마다 가장 많은 은혜를 준 감사한 50분께 친필로 명절 인사를 드립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조대찬 사원께 감사를 전합니다.

“어머, 어머! 웬일이야! 서청수가 그 서청수 맞아?”

둘째 고모의 호들갑에 조수진이 꼭 제 일인 양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조대찬 사원은 내 아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우리 필래그룹에 입사하기 전부터 에피니키온에서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회사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입사한 후로도 숱한 위기와 딜레마를 파헤치며 회사의 손실을 막고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입사한 지 불과 1년도 안 된 시점에서 이런 눈부신 성과를 이뤄 냈습니다.

조대찬 사원은 가히 뭇 샐러리맨의 귀감이 된다 하겠습니다.

미사여구와 칭찬이 계속 이어졌다.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재벌 총수가 깍듯하게 친필로 감사를 전하는 걸 보고 친척들은 충격에 빠졌다.

-앞으로도 조대찬 사원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회사의 동량지재로 자리매김해 주길 바랍니다.

나도 기업의 총수로서 조대찬 사원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최선을 다해 모색하겠습니다.

약소하나마 내가 평소 즐기는 술 한 병과 우리 필래백화점 상품권을 보냅니다.

모쪼록 부담스레 여기지 말고 받아 주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나의 사람으로 남아 주기를 간청하며 이만 총총 글을 줄입니다.

과연 그가 전한 대로 필래백화점 상품권 100만 원어치가 편지에 동봉되어 있었다.

서청수 본인에게는 약소하게 느껴지겠지만 대찬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살뜰히 챙겨 주는 모습에 대찬의 마음에 온기가 돌았다.

“이야, 우리 대찬이 진짜 최고다, 최고!”

막내삼촌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혀를 내둘렀다.

작은고모도 짝짝짝, 박수를 쳤다.

“대단해, 대단해. 회사 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회장이 직접 이럴 수가 있어?”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아들 친구라 예쁘게 봐 주시는 거죠.”

“일분일초도 쪼개 쓰는 양반이 그냥 예쁘게 봐 준다고 저렇게 친필로 편지를 보내? 아이고, 대단하다.”

작은고모는 아버지의 허벅지를 탁탁 치며 웃었다.

“오빠, 자식 농사 한번 잘 지었수!”

“그, 그래? 으허허허.”

지금껏 기가 죽어 있던 아버지도 그제야 맘 놓고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내삼촌은 젯밥에 관심이 있었다.

“야, 야, 대찬아, 딱 한 잔만 마시면 안 될까?”

“네. 드시라고 가져온 건데요.”

“이 귀한 걸 미천한 내가 마셔도 되는 거야?”

“암만 술이 귀해도 술보다 진한 게 핀데요.”

“역시 조대찬! 우리 조씨 집안의 자랑!”

막내삼촌은 황홀한 표정으로 리샤르 에네시를 개봉했다.

코냑의 향긋한 향기가 집 안을 메웠다.

향기 없는 한우는 슬펐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술을 입술에라도 적셔 보려고 친척들 모두 아우성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반상회에 가든 동창회에 가든 내가 이런 술도 먹어 봤다고 잘난 체를 할 수 있었다.

“키야! 역시 돈값 한다니까!”

술을 한 잔 맛본 막내삼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표정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친척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초콜릿 향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입안에 묵직하게 남는 향이 일품이야.”

“김정일이하고 재벌 회장님은 이 술을 맨날 옆에 끼고 먹는다, 이거지? 부럽다.”

저마다 감상평 한 마디씩을 남기느라 한우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렸다.

한우에게 부여된 감상평은 ‘음, 맛있네.’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큰고모와 둘째 큰아버지의 공동전선에 꽁해 있던 어머니는 한우를 구우면서 한마디 톡 쐈다.

“술은 좋은데 안주가 못 받쳐 주네.”

그 말에 둘째 큰아버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받아칠 도리가 없었다.

친척들은 술 한 병을 싹 비우고 고스톱을 치다가 저마다의 일정에 맞춰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네 가족만의 집이 되었다.

여기저기 술병이 널브러지고 이부자리가 엉망이 되어 온 가족이 청소에 동원되었다.

대찬의 아버지는 아들과 이불을 개면서 쩝, 입맛을 다셨다.

“대찬아.”

“네?”

“회장님 양주 덕분에 체면치레는 했다만, 어째 좀 아깝다.”

“뭐가 아까워요?”

아버지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그 귀한 술을 말이야, 두고두고 먹어야 하는데. 피붙이들 주는 게 아깝단 소리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찬은 풋 웃었다.

“아무래도 아깝죠?”

“조금 그렇구나.”

“걱정 마세요.”

“걱정 말라니. 네 월급에 무리해서 한 병 더 사 올 요량이냐?”

대찬은 난색을 표했다.

“그건 너무 사치인걸요.”

“그럼 어떻게 하겠단 거냐?”

아버지의 질문에 대찬 대신 거실을 걸레질하던 조수진이 대답했다.

“술은 그대로 있어요.”

“잉? 그게 무슨 말이냐?”

조수진의 목소리는 시니컬했다.

“친척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다고 그 귀한 걸 갖다 바쳐요. 병만 리샤르 에네신지 뭔지 그거고, 내용물은 집 앞 주류 매장에서 1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뭐, 뭐라고?”

“솔직히 10만 원도 아깝지만, 캡틴큐 사다 넣으면 주당 삼촌이 금방 눈치챌 거 같아서.”

아버지는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대찬은 아버지가 쥔 이불 귀퉁이를 자기 쪽으로 뺏으면서 웃었다.

“진짜 술은 다른 병에 잘 담아 뒀으니까 다시 원상복구시키면 돼요. 그러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조수진도 냉소를 지으며 한마디 보탰다.

“결국 막내삼촌 내공도 그 정도였다는 거죠. 초콜릿 향은 무슨.”

아버지는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이내 가족 모두에게 전염되었다.

네 가족은 배를 붙잡고 한참을 웃었다.

명절 때 잘 먹고 잘 마시면서 전열을 재정비한 산업 역군들은 다시 직장으로 출근했다.

저마다 살 쪘네, 얼굴이 달덩이만 해졌네, 하는 식의 악담 같은 덕담을 던지면서 그들은 동료들과 재회했다.

대찬도 마찬가지의 인사를 나눴다.

서원웅에게는 특별히 몇 마디를 보탰다.

“회장님 덕분에 친척들 앞에서 면 좀 섰어.”

서원웅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버지도 그러라고 편지에 힘 좀 주셨대.”

“이런 일 있을 줄 어떻게 아시고.”

“보통 명절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안 터져도 아버지가 널 각별히 여기시는 건 사실이잖아. 힘 좀 들여서 나쁠 건 없지.”

“나중에 기회 닿으면 큰절이라도 올려야겠어.”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씩 웃었다.

명절을 쇠고도 유백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침침했다.

천원석 대리가 그를 보고 시비를 걸었다.

“백기, 요즘 여친하고는 어때?”

“…뭐가 어때요, 진즉에 쫑 났다니까요.”

“뭐야, 헤어졌어?”

유백기는 천원석 대리에게 눈을 흘겼다.

“저번 회식 때 말씀드렸거든요?”

“아, 그랬나? 기억이 안 나서……. 모를 수도 있지, 눈을 째리긴 왜 째려?”

천원석 대리가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했다는 걸 대외협력 3팀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그렇게 유백기를 골려 주기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분이 풀렸다.

기실 원인을 따지자면 황금루를 이길 식당을 찾지 못한 상사들의 책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천원석 대리는 자기 성찰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대찬은 생각했다.

‘내 덕에 유백기랑 조기에 쫑 났으니 그 여자한테는 다행이네.’

대찬은 유백기의 시무룩한 표정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았다.

회사 차원에서 밀어줬던 업무도 엉망진창으로 끝나고, 막 꽃을 피우려던 로맨스도 시궁창에 처박힌 터.

유백기는 좀체 붕괴된 정신을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니 안 그래도 잘 못하던 업무에 구멍이 더 생겼다.

가뜩이나 유백기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수 없는 송희근 과장은 평소보다 더 격앙된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내가 맞춤법 좀 틀리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응?”

“…죄송합니다.”

“그리고 말이야, 내가 본문은 바탕체로 쓰라고 했지? 왜 네 멋대로 돋움체 쓰고 난리야. 돋움체로 맞아 볼래?”

“죄송합니다.”

“이 회사 다닌 지 1년이 넘었는데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야 해? 천 대리야, 얘 어떡하냐?”

천원석 대리는 이럴 때만큼은 송희근 과장과 쿵짝이 맞았다.

“뭘 어떡합니까. 부하 직원 잘못 둔 저희 업보죠.”

“어휴! 속 터져, 속 터져!”

한바탕 혼쭐이 난 유백기는 꽁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 한동안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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