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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8화 (87/556)

난 할 수 있어 88화

8월이 지나 여름과 가을의 경계인 9월로 접어들었다.

직원들은 모두 추석 연휴에 들어갔다.

연휴 전날 퇴근하면서 허운은 해방감에 두 팔을 쭉 뻗었다.

“아아, 드디어 연휴다!”

“형은 이번에 고향 내려가?”

“당연하지! 내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왜긴! 지금까지 받았던 설움 한 큐에 날릴 기회잖냐. 내가 친척들한테 얼마나 구박받은 줄 알아? 나이 그렇게 처먹고 여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냐면서.”

의기양양한 허운의 얼굴을 보고 대찬도 웃었다.

“이번에는 당당하겠네.”

“당당한 정도가 아니지. 대 필래그룹의 정규직 사원으로서 어깨 딱 펴고 부모님 기 좀 살려 드려야지!”

“오우, 대 필래그룹. 회장님이 들으셨으면 금일봉 쥐여 주셨을 거야.”

“너 회장님이랑 꽌시 있잖아. 나중에 잘 비벼 줘.”

“비비긴.”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자자, 그럼 명절 끝나고 살 쪄서 보자!”

허운은 손을 휘휘 저으며 금방 멀어졌다.

대찬은 그의 떳떳한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때 뒤따라 나오던 유채경이 뾰로통한 시선으로 허운을 쏘아봤다.

“저 오빠는 저걸 덕담이랍시고 한다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유채경을 봤다.

“명절 때 살 쪄서 와도 어차피 일하면 빠지게 돼 있어. 그렇게 치면 덕담이지, 뭐.”

“오빠도 참 그래. 이럴 땐 너는 너무 말라서 살 좀 쪄야 돼, 하면 어디가 덧나?”

“요즘 세상엔 그런 것도 다 성희롱이거든.”

“으이구! 칭찬해 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

유채경은 대찬에게 눈을 흘기고 씩씩거리며 먼저 갈 길을 갔다.

이어서 서원웅이 나왔다.

대찬이 그를 보고 물었다.

“이번 추석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아, 평소처럼.”

어떻게 하기로 했냐는 물음은, 명절에 그의 부친인 서청수 회장과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평소처럼이란 건 대학 들어와서 서청수 회장과 재회한 이후 명절마다 택했던 방식을 의미했다.

서원웅은 본질적으로 서청수의 본가에 자연스레 녹아들 수 없는 신분이었다.

그 집에는 서원웅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단 당연히 서청수의 본처부터가 그랬다.

또 명실상부한 필래가문의 적장자인 서승학 역시 서원웅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서청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청수는 집안에서 가장 힘이 센 어른이지만 최소한의 염치는 있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도, 그리고 그 결과 혼외자를 가진 것도 떳떳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청수는 연휴 중 하루는 기사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서원웅의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조촐하게 명절 음식을 나누고, 안부를 묻고 조용히 돌아왔다.

대찬이 생각하기에도 그 편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서원웅은 대찬의 손에 무언가를 들려 주었다.

대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게 뭐야?”

“아버지가 주시는 명절 선물.”

“나한테?”

“응. 원래 개인적으로 친분이 깊거나 특별히 감사를 표하는 분들한테는 직접 명절 선물 챙기시거든.”

‘원래’라는 말에서 부쩍 가까워진 부자 사이가 느껴졌다.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는 서청수가 대찬 자신을 기꺼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따로 감사 인사 드려야겠네. 고맙다. 네 덕분에 뵙기도 힘든 분한테 직접 선물도 받아 보고.”

“무슨 말이야. 나나 아버지나 너한테 빚진 게 얼만데.”

“아이구, 황송합니다.”

서원웅은 미소를 띠었다.

“자, 그럼 나 먼저 간다. 명절 잘 보내.”

“어, 그래. 너도.”

대찬은 손을 흔들어 보이고 각자가 그랬듯 갈 길을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대찬은 익숙한 집 냄새를 맡으며 현관에서 신발을 벗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여지없이 누나 조수진의 핀잔이 떨어졌다.

대찬도 응수했다.

“연휴 전날까지 고생고생하고 들어온 동생한테 짜증부터 내야겠어?”

“누군 일 안 하고 온 줄 알아?”

“자, 이거나 받아. 베란다에 보관해 둬.”

대찬은 조수진에게 서청수 회장의 선물을 건넸다.

순간 조수진이 얼굴을 구겼다.

“뭐 얼마나 대단한 거라고 날 짐꾼으로 부려먹어?”

“가면서 확인해 보시든지.”

남매의 국지전이 벌어지려는 찰나, 집 안쪽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찬이 왔냐!”

그 목소리에 대찬은 어깨를 움츠렸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고 대답했다.

“네. 큰고모 오셨어요?”

“오냐! 얼른 와서 얼굴 안 비치고 뭐 해!”

벼락같은 호령에 대찬은 후다닥 거실로 들어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큰고모님, 잘 지내셨어요?”

“조카란 놈들이 평소에 전화 한 통 없으니 잘 지낼 턱이 있겠니?”

“죄송해요. 이제부터 연락 자주 드릴게요.”

“명절 때마다 남발하는 공수표 안 믿는다.”

안산 큰고모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대찬은 삐질 땀을 흘렸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집안의 어른은 안산 큰고모였다.

예전에 투포환을 했다던, 83년 헬싱키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국가 대표로 나갈 뻔했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무용담을 말하길 좋아하는 큰고모의 덩치는 예사롭지 않았다.

두꺼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동기간이라지만 터울이 많이 나는 터라 대찬의 아버지를 포함한 형제들은 큰고모를 부모처럼 따랐다.

물론 부모처럼 어려워하기도 했다.

그런 판이니 조카들이야 말 다 했다.

대찬 역시 큰고모를 어려워했다.

그는 큰고모에게 인사를 올리고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가서 속닥거렸다.

“아니, 왜 연휴 전날부터 오셨대요?”

“큰고모 원래 그러시잖아. 암말도 말아. 자, 과일이나 갖다 드려.”

어머니 역시 큰고모를 껄끄러워했다.

과일을 계속 갖다 바쳐 입막음을 시도하는 건 어머니의 오래된 전략이었다.

대찬도 그걸 알기에 얼른 과일을 날랐다.

집에서는 꾹 무게를 잡고 있는 아버지도 큰고모의 등장에 부산을 떨었다.

덥지 않으시냐.

목마르지 않으시냐.

뉴스랑 드라마 중에 뭘 보실 거냐.

끊임없이 큰고모의 비위를 맞췄다.

그럴 때면 큰고모는 봉양을 당연시 여기며 상전 노릇을 했다.

대찬은 그것이 보기 싫어 자신이 두 배, 세 배로 뛰었다.

그렇게 간신히 연휴 전날 밤을 보냈다.

가족끼리 단란하게 외식이나 할까 생각했던 대찬은 큰고모가 내심 미웠다.

연휴 첫날.

큰고모를 두려워하는 일가친척들이 오전부터 부랴부랴 모여들었다.

덕분에 손님을 맞이하는 대찬과 조수진, 그의 부모도 바빠졌다.

큰고모의 지휘 아래 5남매와 그 자식들이 모두 참석했다.

좁은 집에 사람들의 온기가 빼곡히 들어찼다.

“오랜만에 보니까 얼마나 좋냐, 응?”

널찍한 소파를 독차지한 큰고모는 행복을 강요했다. 그러니 일가친척들은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큰고모는 사과를 와삭 베어 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은찬이는 일 잘하고 있냐?”

“네, 고모.”

은찬이, 그러니까 조은찬은 대찬의 사촌이었다.

둘째 큰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이는 대찬과 동갑이었다.

동갑이니 자라 오는 내내 비교 대상이 되었다.

명문대를 나오고 대기업에 입사한 조은찬은 첫 번째 삶의 대찬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던 원흉이었다.

두 번째 삶에서는 대찬도 번듯한 간판을 내걸었으니 조금 면이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큰고모는 조은찬을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다.

큰고모는 조은찬에게는 한없이 아량 넘치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우리 은찬이가 있으니까 우리 집안 면이 산다.”

“에이, 뭘요.”

조은찬은 쑥스럽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찬은 사과를 집어먹었다.

그런데 불똥이 멀쩡한 대찬에게 튀었다.

“대찬이 너는 그게 뭐니? 고원대씩이나 나와서 필래가 뭐야, 필래가.”

“네?”

대찬은 입안 가득 사과를 머금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고모가 끌끌 혀를 찼다.

“우리 은찬이를 봐라. 얼마나 야무지게 자기 인생을 개척하냐. 은찬아, 네가 어디 다닌다고 했지?”

“삼라물산 인사팀이요, 고모.”

조은찬은 콕 집어 인사팀이라고 했다.

같은 대기업이어도 삼라와 필래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애써 어필했다.

큰고모는 그의 말을 듣고 다시 대찬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필래가 삼라한테도 안 되지마는 은찬이는 인사팀이라잖니? 대기업의 꽃이라잖니?”

삼라물산은 대찬과도 인연이 있는 회사였다.

대학 시절, 수영실업에서 잠깐 일할 때 삼라물산에 제대로 인상을 남겼다.

당시 대찬을 눈여겨봤던 부장과는 종종 연락했다.

취업 시즌에 이르러서는 대찬의 견실한 경력을 탐내 입사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상무이사로 승진해 아직 회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큰고모의 타박에 대찬은 구구절절 응수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봤자 그다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

큰고모의 마음은 이미 조은찬 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대찬은 뭉툭하게 응수했다.

“에이, 저희 회사도 나름 보람 있어요. 회사 잘 다니면 됐지, 뭘 그 와중에 옥석을 가리고 그러세요. 고모도 참.”

여기서 바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워 봤자 부모님 얼굴에 먹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큰고모는 이제 시작이었다.

“잘 다니면 그만이라니, 얘가 이렇게 물렁해요. 대찬 아빠, 애를 잘 키워야지.”

“아이구, 좋은 날 좋은 말만 해요, 누님.”

“얘는. 물렁한 건 부전자전인 모양이다.”

아버지도 어설픈 억지웃음만 짓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역시 괜히 명절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 침묵했다.

누나 조수진의 얼굴은 뚱했다.

남매란 게 그랬다.

평소 치고받고 싸우는 게 일이지만, 제3자의 공격에는 자기 일처럼 예민해진다.

울컥해서 따지고 드려는 걸 보고 어머니가 조수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분위기가 좀 잦아들길 기대하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은찬의 아버지, 그러니까 큰고모에게는 남동생이 되고 대찬에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우리 은찬이 이번에 미국 출장 일정하고 겹쳐서 오늘 못 나올 뻔했어요. 그래도 상사가 예뻐해서 일정을 조정해 줬답디다.”

“그래? 미국으로 출장도 가? 아이고, 출세했다, 출세했어.”

“해외 출장이야 뭐 비일비재한 일인데요. 뭘 그런 거 갖고 출세까지야.”

대찬의 큰아버지는 겸손을 떨었지만 큰고모의 역성에 잔뜩 고무된 기색이었다.

“암튼 우리 은찬이가 와따다, 와따.”

큰고모는 꼭 조은찬을 우리 은찬이라고 불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은찬의 이름을 조우리은찬으로 알 판이었다.

“고모,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어지러워요.”

조은찬은 멋쩍게 웃었다.

‘밥맛이야.’

대찬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신경이 쓰였다.

특히 자기 칭찬이 나오고 대찬을 깔아뭉개는 말이 나올 때마다 조은찬은 대찬 쪽으로 흘끗흘끗 시선을 던졌다.

대찬의 썩어 들어가는 표정을 구경하려는 심산이었다.

그 얕은 속내를 알기에 대찬은 표정만큼은 평온하게 다스렸다.

조은찬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큰고모에게 말했다.

“아, 저희 회사에서 선물 나온 거 오늘 친척분들이랑 나눠 먹으려고 가져왔어요.”

“아이고, 우리 은찬이 마음씨도 참 비단결이다.”

큰고모는 박수까지 쳐 가며 조은찬의 선심을 칭찬했다.

조은찬은 커다란 선물 세트를 거실로 가져왔다.

굳이 일가친척이 다 보는 앞에서 개봉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큰고모는 입을 쩍 벌리며 놀랐다.

“어구야, 한우 세트네!”

상자 안에는 목도리처럼 돌돌 잘 말린 한우 갈비가 들어 있었다.

조은찬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저녁은 소고기나 구워 드시죠.”

“아, 이미 차려 놨는데…….”

대찬의 어머니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자 둘째 큰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제수씨 솜씨는 잘 알지만, 한우에 비기겠어요?”

큰고모도 그의 편을 들었다.

“그래, 맞다. 올케 음식은 냉장고에 넣었다가 올케 가족끼리 두고두고 먹으면 되겠네.”

“네……?”

그 말에 분위기가 일순 싸해졌다.

‘이건 아닌데.’

시종 묵묵히 있던 대찬의 심기가 못 견딜 정도로 거슬렸다.

다른 친척들 역시 선을 넘은 행동에 난감하기만 했다.

그때 대찬이 입을 열었다.

“그거 좋네요. 은찬이 덕에 오랜만에 한우 먹어 보겠네.”

“야, 조대……!”

조수진은 대찬에게 한마디 할 작정이었다.

자기 부모가 면전에서 괄시를 당했는데 속 좋게 한우 타령을 하는 대찬이 밉기만 했다.

그런데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대찬이 조수진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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