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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4화 (83/556)

난 할 수 있어 84화

숱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폭력을 휘두른 건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었다.

유백기는 당장이라도 울 듯 망연자실했다.

이럴 때 애인한테라도 위로를 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었다.

“지, 지연아… 나…….”

유백기는 애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애인은 유백기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뭐 하는 거야? 이거 놔!”

“지, 지연아!”

“오빠 이런 사람인 줄 정말 몰랐어. 우리 다시 생각해 보자.”

애인은 따갑게 쏘아붙이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유백기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대찬은 어깨를 으쓱하곤 그를 더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후배들이 남기고 간 빈 그릇을 부스로 옮겼다.

도리어 노근기가 딱한 눈빛을 하고 대찬에게 물었다.

“조 선생, 저, 저래도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상처 많이 받은 거 같은데, 저 사람…….”

대찬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옛날에 남들한테 상처 준 거 이자 받는 중이에요, 저 사람.”

그러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주로 식탁을 훔쳤다.

마강국은 사람들의 시선이 완전히 거둬질 때까지 신음 소리를 내며 후배들에게 의지했다.

그러다 매장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는 카이저 소제처럼 멀쩡히 걸었다.

후배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강국을 봤다.

“선배, 괜찮으셨어요?”

“그럼, 괜찮지. 저 엿밥한테 맞고 어떻게 되는 게 이상한 거 아니냐?”

“아 씨, 깜짝 놀랐잖아요! 선배 많이 다치신 줄 알고!”

마강국은 피식 웃었다.

“이 정도는 돼야 연기한다고 하는 거야. 알았냐? 너희처럼 국어책 읽듯이 하는 게 아니야, 연기는.”

한 달이 지났다.

필래플렉스에서 진행되었던 7개 업체의 경합은 성황리에 마감되었다.

경합 담당자들은 결과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승자는 누가 봐도 뻔했다.

한 달 매출액 4천만 원을 달성한 대찬, 노근기의 황금루가 우승을 차지했다.

황금루는 2위인 서원웅과 네팔 사장의 갠지스 키친을 큰 액수 차이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승자가 뻔한 만큼 패자도 뻔했다.

매출액 최하위는 허운의 수제버거 가게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허운은 경합이 끝나고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다.

“내가 패배자는 아니지. 패배자는 따로 있잖아?”

허운의 말에 서원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자는 누가 봐도 유백기 선배죠.”

유백기의 포 빌리지는 4위의 매출을 기록했다.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꾸중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포 빌리지의 역량과는 별개로 유백기 개인에게는 최악의 한 달이었다.

멋모르고 주먹 한 번 휘두른 대가는 컸다.

턱에 흠집 좀 난 것 가지고 입원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폭행을 휘두른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유백기는 여러 번 경찰서를 들락거려야만 했다.

같은 팀 상사는 물론 서청규 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도 우승은커녕 말썽만 일으켰다.

그 따가운 눈총을 감당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유백기는 송희근 과장 앞에 고개를 푹 숙였다.

송희근 과장은 오물 보듯 그를 쏘아봤다.

“꼴도 보기 싫어! 저리 가!”

아무리 부하 직원의 눈치를 보는 송희근 과장이라지만, 저 정도로 찌그러진 부하에게는 가차 없었다.

천원석 대리도 낭패감이 얼굴에 가득했다.

유백기만의 실패가 아니었다.

송희근 과장과 천원석 대리도 서청규 사장의 서릿발 같은 야단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야단 한번 시원하게 맞고 끝나면 다행이었다.

향후 출세 가도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필래유통은 울며 겨자 먹기로 노근기의 황금루를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시키기로 결정하고 계약서를 썼다.

게임 폐인으로 죽어 가던 노근기는 이제 백화점 10군데에 매장을 입점한 어엿한 요식업 CEO로 발돋움했다.

대찬은 그를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고마워, 조 선생. 이것도 다 조 선생 덕이야.”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친 건 순전히 사장님 솜씨예요. 존경스럽습니다.”

“허허허, 조 선생 체면치레나 해 주려고 끼어든 건데, 어쩌다 보니 장님 문고리 잡았네.”

“그래도 사장님께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경합이라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그걸 감당할 만큼 결과는 충분히 달콤한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서청규 사장님도 속은 쓰리겠지만 우리 회사에 분명한 이득이 될 겁니다. 모쪼록 잘 도와주십시오.”

“이건 다 조 선생 얼굴 보고 하는 거지, 필래유통 보고 하는 거 아니야. 조 선생이 이 회사 더 안 다닌다고 하면 나도 여기랑 더 안 붙어먹을 거라 이 말이야.”

“말씀만으로도 눈물 나게 고맙네요.”

노근기는 헤벌쭉 웃었다.

“자자,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한잔해야지!”

“사양 안 하겠습니다.”

“좋았어! 이봐, 마누라! 샷다 내려!”

“오오케이!”

노근기의 부인도 남편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녀에게도 대찬은 은인이었다.

담배나 뻑뻑 피워 대며 방구석 폐인으로 신세를 망치던 남편이지 않은가.

그러니 부인에게 대찬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예수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대찬과 남편의 술자리를 위해 최고의 안주를 만들어 주었다.

대찬과 노근기는 동틀 녘까지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식탁 위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곧장 잠에 빠졌다.

항상 긴장하고 경계해야 하는 신입 사원의 처지였지만, 오늘만큼은 한껏 풀어지고 싶었다.

대찬의 공로 아닌 공로는 회사 사람들 사이에서도 파다하게 퍼졌다.

동기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들은 상사들,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으면서 대찬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갖고 있었던 탓이다.

혈혈단신으로 뛰어든 대찬이 처참하게 망해 버렸다면 그 죄의식은 오래갔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진심으로 대찬의 성과를 축하해 줄 수 있었다.

허운은 대찬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이런 위대한 신입 사원이 바로 내 동생이다, 이 말이야.”

“쓸데없이 비행기 태우지 마. 암튼 빈말 하나는 끝내주게 한다니까.”

대찬이 민망하게 웃자 허운은 어깨에 건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비행기 아니야. 진짜 솜씨 끝내줘서 그런 거니까.”

유채경도 대찬을 치켜세워 주었다.

“맞아요, 조 사원님. 웬만하면 질투라도 나겠는데, 넘볼 수가 없으니까 질투도 안 난다니까.”

“샐러드도 좋은 아이템이었어. 컬처인더스트리에서 탐낸다고 하더라.”

“그럼 뭐해요, 내 회사도 아닌데.”

“그만큼 잘 해냈단 뜻이야.”

서원웅도 웃으면서 뿌듯하게 대찬을 바라봤다.

“진짜 막막했을 텐데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구나. 대단해.”

“노근기 사장님은 너도 잘 알잖아. 어쩌면 양보를 받은 거지.”

대찬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서원웅 때문에 노근기를 선택하는 데 부담이 적잖이 따랐다.

대찬이 생각하기에 노근기의 황금루는 필승 카드였다.

이 경합에서 노근기가 덜컥 이겨 버리면 당장 속이야 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이 따랐다.

모처럼 아들에게 힘을 실어 줬더니, 부록으로 딸려 온 대찬이 냉큼 우승을 따가면 속이 불편할 터였다.

그럼에도 대찬은 노근기를 선택했다.

가진 패가 그것밖에 없는 까닭이기도 했고, 서청수 회장에게 자신의 수완을 증명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사정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득이한 선택을 했지만, 서원웅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앙금처럼 남았다.

‘원웅이도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으니 퉁 치지, 뭐.’

대찬은 속 편한 합리화의 길을 선택했다.

노근기의 황금루는 필래백화점 전국 10개 지점에 입점하는 내용의 계약을 필래유통 측과 체결했다.

서청규 사장은 계약이 탐탁지 않았다.

대단한 이득을 보겠다고 추진한 일이 아니었다.

순전히 대찬을 구렁텅이에 빠뜨려 처참한 인사고과를 주기 위한 목적일 뿐이었다.

대찬은 당연하고, 운이 좋으면 서원웅까지 손볼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런데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대찬이 추진한 업무가 달성되고, 그 달성된 업무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니 오장육부가 배배 꼬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해 버리자니 득보다 실이 컸다.

특히 대기업의 횡포에 날이 바짝 서 있는 언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서청규 사장은 뚱한 표정으로 날인했다.

그런 대단한 유희거리를 놓칠 서청수 회장이 아니었다.

그는 사장단 회의에서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서청규 사장에게 한마디 했다.

“어, 요즘 유통에 좋은 일 있다면서? 축하해요, 그 유명한 노근기 사장하고 같이 일하게 된 거.”

“…고맙습니다, 회장님.”

사장단 회의를 마치고 회장실로 돌아온 서청수 회장은 팔짱을 낀 채로 비식비식 마른 웃음을 지었다.

“웃기는 놈이야, 웃기는 놈.”

비서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말입니까?”

“조대찬이 말이야.”

비서실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일도 다 있군요. 회장님이 일개 말단 사원 이름을 그렇게 자주 말하시는 건 처음 봅니다.”

“아, 그럼 자주 말 안 하게 생겼나? 기똥차잖아, 솜씨가.”

“그렇긴 합니다만.”

“자네 신입 때 보는 거 같아.”

“아이고, 빈 말씀 하지 마십시오.”

“맞아, 빈말이었네. 자네보다 훨씬 낫지.”

서청수 회장과 비서실장은 서로를 보며 격의 없이 웃었다.

서청수 회장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던 무렵, 서청규 사장의 낯빛은 흙빛, 아니 똥 먹은 표정이 되었다.

먹은 똥은 그대로 아래로 배출됐다.

이 아이디어를 냈던 심복 중 하나는 몇 시간 동안 욕을 얻어먹고, 수차례의 손찌검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홀로 소주를 푸면서 울분을 토했다.

“씨이발, 손찌검이 집안 내력이야? 엿같은 서씨 새끼들!”

아랫것에게 서슴없는 손찌검을 해도 서청규 사장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서청규 사장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다른 놈도 아니고 고작 신입 새끼 하나 때문에……!’

지체 높은 자신이 평소 취급도 하지 않던 신입 사원 때문에 속을 썩는 이 상황이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양동식 부장의 내선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양동식 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양 부장입니다.”

“어, 나 사장인데.”

“예, 예엣! 사장님!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의외로 성과가 좋더군?”

“어, 어떤 성과 말씀이신지…….”

“필래백화점에 입점할 프랜차이즈 말이야. 그쪽 업무도 아니고 조건도 까다로웠는데 잘해 줬단 말이지.”

그걸 알기는 하냐?

양동식 부장은 건방진 생각은 생각으로 끝내고 혀끝에는 꿀을 발랐다.

“이게 다 사장님이 적절한 지시를 내려 주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하하.”

“이게 왜 내 덕분이야? 조대찬 덕분이지.”

“아, 하하, 조대찬 사원이 잘 해낸 건 사실이지만…….”

“그 녀석 수완이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 좋은 수완 썩혀서 뭐해?”

“예?”

“좋은 수완에는 그만큼 막중한 임무를 맡기는 게 회사 입장에서 좋지 않나?”

“아, 그렇기야 합니다마는, 그래봐야 아직 신입 사원이라…….”

“양 부장,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 응?”

서청규 사장은 짐짓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양동식 부장은 반사적으로 가랑이를 오므렸다.

“아, 알겠습니다. 적절한 업무를 부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수완에 맞는 막중하고 막중한 임무 말이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래요. 내가 직접 보고받을 거야.”

“…옙.”

양동식 부장은 필래유통의 직원으로 20년 넘게 근무한 사람이었다.

서청규 사장의 말에 담긴 속뜻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대찬에게 과중한 업무로 줘 아주 짓눌러 버리라는 지시.

그런 치사한 지시를 직통으로 전달하다니.

양동식 부장은 서청규 사장의 옹졸함에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조대찬이가 오죽 미우면 저럴까……. 장단을 맞춰 줘야지.’

임원 승진의 문턱에 있는 처지였다.

정이 깊지 않은 신입사원을 위해 사장의 지시를 묵살할 만큼 양동식 부장은 비범하지 않았다.

양동식 부장은 팀장들에게 지시했다.

“각 팀 별로 까다로운 이슈 있으면 간단히 정리해서 내 메일로 보내 놔.”

“알겠습니다, 부장님.”

팀장들의 보고를 받은 양동식 부장은 하나하나 꼼꼼히 따졌다.

사장이 직접 보고를 받겠다고 공언했으니 어설픈 수작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대찬에게 정말 무거운 과업을 내려야만 했다.

양동식 부장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꼼꼼히 현재 제기된 문제들을 따져 보았다.

그러다 그의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불똥은 안 튀겠어.”

양동식 부장은 대찬의 자리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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