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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2화 (81/556)

난 할 수 있어 82화

지시를 한 지 채 30분이 안 되어 양동식 부장은 그 목록을 확인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거북목을 한 채 직원들이 정한 업체를 살폈다.

“어디 보자…….”

양동식 부장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오호라, 갠지스 키친하고 포 빌리지라. 서원웅이하고 유백기가 단연 앞서나가네. 서원웅이는 비겁한 아빠 찬스, 유백기도 또이또이 비겁한 사장님 찬스 썼고…….”

양동식 부장은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고 주임 흥부냉면 괜찮고, 유채경이 미스 샐러드, 재기발랄하고 괜찮지. 허운, 곽 주임, 인상 깊진 않아도 낙제는 면했고. 자, 그럼 우리 조대찬이는 어떤가 볼까.”

양동식 부장은 대찬이 선정한 업체를 보고 눈이 커졌다.

“뭐? 황금루?”

휴게실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던 허운의 눈이 커졌다.

대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묘한데.”

“뭐가 묘해?”

대찬은 허운에게 물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허운은 구구절절 제 생각을 읊었다.

“황금루가 좋기는 하지. 우리 필래 광고에도 자주 등장한 걸 시작으로 운이 터서 지금은 TV에도 곧잘 나오는 유명인이 됐으니까. 노근기 셰프.”

“그래. 셰프라고 불리시더라, 요즘에는.”

“게다가 예약이 꽉 차 있는데도 어떻게든 한 번 먹어 보겠다고 무작정 줄 서는 사람들이 한 트럭이잖아?”

“그렇지, 그렇지.”

“그런 황금루가 우리 백화점에 지점을 연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하지. 도대체 어떻게 섭외한 거야?”

대찬은 굳이 만몽철학원에서의 첫 만남부터 온라인 게임에서의 대화, 에피니키온에서의 일까지 긴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좀 친해서. 노근기 셰프님이랑.”

셰프라는 말이 어쩐지 입에 붙지 않았다.

“아니, 좀 친해서 될 일이냐구, 이게.”

“됐어. 다음에 편한 자리에서 얘기할게.”

“그래라. 근데 다 좋은데 말이야, 문제가 좀……. 그래서 내가 묘하다고 한 건데.”

“문제?”

대찬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한 답을 갖고 있었다.

“응. 그러니까 문제가 뭐냐면…….”

허운이 입을 열기 전에 유채경이 휴게실로 들어와서 대찬에게 말했다.

“조 사원님.”

“어, 채경아.”

“부장님이 잠깐 보자시는데?”

그 말에 대찬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부장님 자리에서?”

“응, 빨리 가 봐.”

“어어, 그래. 그거 커피 안 마신 거거든? 방금 탄 거야. 너 마시려면 마시고.”

유채경은 커피를 들며 눈을 찡긋했다.

“땡큐.”

대찬도 눈웃음을 짓고는 자리를 떴다.

유채경이 커피를 들고 바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자 허운이 그녀를 불렀다.

“야, 나는 투명인간이니?”

“아닌데요, 허운 사원님?”

“갈 땐 가더라도 커피 한 잔 정돈 괜찮잖아.”

“바빠서요.”

유채경은 어쩐지 다른 느낌이 나는 눈웃음을 허운에게 던지고는 부랴부랴 제자리로 돌아갔다.

허운은 뚱한 표정으로 궁싯거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저러냐고.”

허운의 얼굴이 유독 시무룩하게 부었다.

대찬은 양동식 부장 앞에 섰다.

표정을 보면 대찬보다 오히려 양동식 부장이 긴장한 듯했다.

“자네.”

“네, 부장님.”

“재밌는 패를 쥐었던데.”

“그게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패였습니다.”

양동식 부장은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를 권했다.

“앉지.”

“감사합니다.”

“혹시 찬스 썼나?”

“찬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회장님을 졸랐느냔 말이야.”

“아뇨. 그럴 주제도 안 되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소탐대실이니까요.”

양동식 부장은 손을 모은 채 턱을 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자네는 똘똘한 친구니까. 그럼 도대체 어떻게 황금루를 구워삶은 거야?”

“면식이 좀 있습니다. 사장님 찾아 봬서 설득했습니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수완 자체는 좋았어. 그런데 문제가 좀 있거든.”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황금루가 이름값 자체는 다른 업체들보다 훨씬 낫지. 근데 어쨌거나 고작 동네 중국집이잖아?”

“그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뚝딱 10개 지점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냔 말이야. 적어도 허울이나마 조직을 갖춘 곳이랑 일을 해야지.”

양동식 부장이 짚은 문제는 허운이 짚은 문제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찬은 답을 갖고 있었다.

해결책이 아니라 답변을 갖고 있었다.

“부장님, 죄송하지만…….”

“응?”

“그건 제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닙니다.”

“뭐, 뭐야?”

되바라진 대답에 양동식 부장의 목덜미가 뜨끔했다.

대찬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말했다.

“사장님의 지시는 한 달간의 임시 영업을 할 수 있는 업체를 구해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을 뿐입니다.”

“으음…….”

“그리고 사장님은 그 업체들 중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린 업체를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

“저는 거기까지만 알고 있을 뿐, 그 외는 제 능력과 권한 밖입니다.”

“물론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다만, 황금루 사장님께서는 적당한 말미만 주어진다면 백화점 10개 지점 입점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공언하셨습니다.”

“으음, 알았어. 그만 가 봐.”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양동식 부장은 돌아가는 대찬을 묘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흥, 얄미우면서도 기특하고… 복잡하군.”

필래플렉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필래그룹의 복합 문화시설이었다.

필래그룹의 계열사인 필래컬처인더스트리에서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의 상설 전시 공간에서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그곳에서 햄버거 패티가 구워지고, 사골이 고아지고, 쌀국수가 삶아지고, 냉면이 뽑아지고, 커리가 끓고, 샐러드가 담아지고, 탕수육이 튀겨졌다.

먹음직한 음식의 향연에 파리 날리던 상설 전시 공간에 남녀노소가 북적였다.

모두가 음식을 탐닉하는 그 현장에서 단 7명만이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건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말단 직원의 손끝에서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할 업체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인사고과에 적극 반영될 것이고, 서로 알력이 심한 팀의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알게 모르게 서로는 서로를 의식하고 신경 썼다.

각 팀의 팀장들도 제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그쪽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송희근 과장이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천원석 대리에게 말했다.

“하, 고놈, 어떻게 황금루를 구워삶은 거지?”

“그러게요. 진짜 정 안 간다.”

천원석 대리의 표정도 뚱했다.

“이러다 조대찬이가 유백기 뒤통수 후리고 1등 먹는 거 아니야?”

“그러면 진짜 나가린데요. 사장님이 우리 능지처참할지도 몰라요.”

“아, 진짜 짜증나네! 그냥 적당히 당해 주면 좀 좋아?”

“이런 일에 죽어라 달려드는 꼬락서니, 진짜 맘에 안 듭니다.”

천원석 대리는 담배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말대로 대찬은 죽어라 달려들었다.

그들에게 그들의 사정이 있듯, 대찬에게도 대찬의 사정이 있었다.

이 지옥도에서 당당히 머리를 내밀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서원웅의 정수리에 올라탄 빈대가 아니라, 누구든 대찬을 보고 이놈 쓸 만하다는 말을 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대찬은 사무실에서보다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아침 7시에 도착해서 영업이 끝나고 뒷정리까지 마무리한 밤 11시에 퇴근했다.

당사자인 노근기 사장이 그를 말릴 정도였다.

“조 선생, 고마운 거 알았으니까 너무 몸 혹사시키지 마.”

“어디 사장님께 잘 보이려고 이러나요. 저한테도 중요해요, 이 일.”

대찬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든 세월을 겪어 온 노근기 사장은 그의 미소에서 힘든 세월을 감지했다.

그러니 되레 대찬의 자가 혹사를 말리지 못했다.

대찬은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필래플렉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래도 주말이라고 아침 7시가 아니라 필래플렉스 개점 시간인 9시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날, 대찬의 눈에 낯선 풍경이 펼쳤다.

“뭐야, 저게?”

필래플렉스의 후문 앞, 텐트들이 쳐져 있었다.

텐트는 5개나 되는 데다, 색까지 칙칙해서 누가 보면 길 잃은 소대가 저기서 숙영을 하나 보다 여길 정도였다.

별일 다 있다 여기면서 스쳐 지나가려는 순간, 텐트에서 누군가 기어 나왔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그는 텐트에서 나와 하마처럼 입을 벌리며 기지개를 켰다.

“흐아암, 잘 잤다. 야! 다들 일어나.”

대찬은 그를 멀뚱히 바라봤다.

“…야, 마강국.”

“응?”

마강국은 덜 뜬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쉿!”

마강국은 대찬을 보고 급히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쉿은 뭐가 쉿이야.”

“조용히 해! 여기서는 너랑 나랑 모르는 사이야. 알겠어?”

“뭐……?”

마강국은 끝내 대찬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대신 텐트를 마구 흔들며 그 안에 있는 덜 깬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놨다.

“야! 나오라고!”

마강국의 성화에 텐트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이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그들 역시 대찬이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에피니키온 후배들이었다.

대찬은 어안이 벙벙했다.

“너, 너네 뭐야……?”

“쉿!”

후배들은 마강국과 똑같이 굴었다.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필래플렉스 매장 안으로 진격했다.

마강국은 대열의 마지막에 서서 들어갔다.

그는 들어가면서 대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오늘 단단히 매출 올려 주러 왔어. 오늘이 1진, 내일이 2진, 참고로 10진까지 있다.”

“아이고,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대찬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마강국의 등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아침부터 황금루의 테이블에 활기가 돌았다.

필래그룹의 CF를 찍었을 당시 에피니키온 부원들과 면식이 있던 노근기는, 그들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자 마강국을 비롯한 에피니키온 부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노근기도 그 뜻을 알아채곤 합, 입을 다물었다.

아침 9시는 정말 이른 시간이었다.

특히 주말 아침은 식사는커녕 대개가 아직 이불 속을 헤매고 있는 시간이었다.

때문에 마강국 일당은 우선 매장 구석구석으로 흩어져 이른 점심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그걸 보고 대찬은 혼자 생각했다.

‘저럴 거면 왜 텐트 치고 잔 거야?’

대찬은 그들의 아마추어 같은 작전이 오히려 정겨웠다.

필래플렉스 매장 곳곳에 퍼진 그들은 다른 손님들에게 다 들리도록 부러 큰 소리로 말하면서 다녔다.

“야, 5층에서 맛집들 다 나와서 음식 판다는 거 들었어?”

“와, 정말? 대박이다, 진짜!”

“노근기도 온대!”

“진짜? 대박이야!”

후배들의 대화를 들은 마강국은 그들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씩 때렸다.

“야, 연기를 그거밖에 못해?”

“저희가 무슨 연극영화관 줄 알아요?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세요.”

“그러니까 너희가 발전이 없는 거야.”

“그렇게 자신 있으면 선배가 해 보시든가요!”

“내가 이 짬밥에 연기하고 있으리?”

“짬밥은 무슨 짬밥이에요! 여기가 군대예요? 여긴 평등하고 민주적인 에피니키온이거든요.”

“아오, 말이나 못하면!”

마강국은 후배들의 연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장 고객들의 귀에 솔깃하게 들리기는 했다.

아침 일찍 시간이나 때울 겸 필래플렉스를 찾은 고객들은 점심으로 노근기가 하는 음식이나 먹어 볼까, 의견을 나눴다.

오전 11시 20분.

에피니키온 부원들이 황금루의 부스 앞에 놓인 테이블을 잔뜩 점령했다.

그들은 이른 점심을 주문했다.

미리 합을 맞춘 대로 대사를 읊었다.

“여기 잡탕밥하고 멘보샤가 그렇게 맛있대.”

“아, 나도 그 소문 들었어. 안 먹고 가면 후회한다고!”

“그럼 먹어야지! 사장님! 여기 잡탕밥이랑 멘보샤 주세요!”

짜장, 짬뽕을 시키려던 손님들의 귀가 쫑긋 곤두섰다.

그들도 에피니키온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수줍게 잡탕밥과 멘보샤를 찾았다.

짜장, 짬뽕은 단가가 낮았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팔아 봤자 갈 길 바쁜 대찬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그래서 에피니키온 부원들이 생각해 낸 게 잡탕밥과 멘보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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