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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81화 (80/556)

난 할 수 있어 81화

소식을 들은 허운은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거기 요즘 뜨는 회사 아니야? 어떻게 휘어잡았대?”

“아무렴 제 솜씨가 허운 사원님보다 못하려고요?”

“아, 진짜! 꼬박꼬박 사원님, 사원님, 듣기 싫네.”

“이번에 저한테 져 주시면 오빠라고 불러 드릴게요.”

유채경은 실눈으로 웃으면서 큭큭 웃었다.

허운은 꽁한 얼굴이었다.

유채경이 포섭한 고급 샐러드 프랜차이즈는 수제버거나 설렁탕보다 일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주 고객층인 여성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게 강점으로 꼽혔다.

이는 유채경의 수완 덕택도 있지만, 1팀의 팀장인 구용표 과장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그건 서원웅의 소외감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앙숙인 2팀의 오 과장이나 3팀의 송희근 과장과의 대리전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서원웅은 팀원들의 지원은 얻지 못했지만 회사 오너의 지원을 얻었다.

그는 네팔 출신의 사장이 경영하는 유명 인도 커리 레스토랑을 섭외했다.

서원웅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지만, 서청수 회장의 힘으로는 네팔 출신 사장이 거절하기에 어림도 없었다.

자존심 센 이 네팔인에게 한 달간, 7대 1의 경합은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 레스토랑은 격조 높은 서울 필래호텔에 입점하기를 강하게 희망했다.

여러 개의 식당이 경합하는 과정에서, 네팔인 사장은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서청수 회장의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또 허운이 보기에 기가 막혔다.

“세상에! 갠지스 키친을 섭외했다고? 서원웅, 너 혹시 천재니?”

“다 알면서 비꼬지 말아요. 왕따 아들 도와준답시고 아버지가 소매 걷어붙이고 나서셨어요. 부끄러워요, 지금.”

“수저도 능력이야. 받아들이라고.”

“부끄러운 걸 알면서도 냉큼 도움을 받겠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게 더 부끄러워요.”

“처음이 어렵지, 나중 가면 점점 쉬워질 거야. 왜, 아메리카 인디언이 그런다잖아.”

서원웅은 허운이 대단한 위로를 해 주나 싶어 그를 바라봤다.

허운은 씩 웃으며 말했다.

“양심이란 게 심장 안에 삼각형 꼴로 있어서, 한 번 양심을 버릴 때마다 삼각형이 지랄발광을 해서 가슴이 엄청 아프대.”

“그런데요?”

“근데 지랄발광을 할 때마다 삼각형 모서리가 닳고 단대.”

“그래서요?”

“그러니까 양심을 버릴수록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진다는 거지. 원웅아, 지금이 제일 아프고 나중 가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나중에는 양심 없어질 거란 소릴 하는 거잖아요?”

“딩동댕!”

“진짜 밉다.”

서원웅은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허운의 그런 얄미운 농담이 무거운 위로보다 차라리 나았다.

떳떳하지 못한 걸 애써 두둔해 봤자 더 떳떳해지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허운은 서원웅의 등을 툭툭 두드리고는 대찬을 바라봤다.

“네 선배는 어디랑 조인한대?”

유백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찬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남지도 않은 유쾌함이 일거에 증발했다.

그저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게, 어디더라. 아, 포 빌리지.”

“거기도 제법 방귀 좀 뀌는 회사 아니야?”

“훌륭하지. 합리적인 가격에 맛은 베스트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니까. 나도 가서 먹어 봤는데, 쌀국수 맛있더라. 분짜도 그렇고.”

“서원웅이 잡은 갠지스 키친하고 비등한데? 고 주임님 흥부냉면은 상대도 안 되겠다.”

그 말에 대찬의 눈이 커졌다.

“뭐? 고 주임님이 흥부냉면하고 조인했어?”

“어, 몰랐나? 일 안 풀려서 머리 뜯던 차에 흥부냉면하고 얘기가 잘됐다고 방방 뛰시던데.”

“…몰랐어.”

고 주임은 대외협력지원팀 소속이었다.

흥부냉면은 송희근 과장이 직접 그쪽 직원과 자리를 만들 정도로 공을 들이던 곳이었다.

서원웅의 갠지스 키친, 유백기의 포 빌리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초짜 사원들이 낚기는 어려운 대어였다.

송희근 과장도 앓는 소릴 낼 만큼 쉬운 회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고 주임이 단독으로 낚아 왔을 리는 없고.’

만일 흥부냉면이 필래유통의 마뜩찮은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계속 공을 들여온 송희근 과장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송 과장이 흥부냉면을 따 와서 고 주임한테 넘겼다는 건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밉기로서니 아등바등 따낸 걸 다른 팀에 던져 주나.

‘내가 그렇게 밉나? 아니면…….’

나한테는 절대 주면 안 됐던 걸까. 누군가의 의지가 강하게 작동한 덕분으로.

게다가 한 가지 더.

흥부냉면도 허덕이며 겨우 설득한 송희근 과장이다.

그런데 유백기는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패인 포 빌리지를 쥐었다.

‘역시 포 빌리지도 유백기가 따냈을 리 없어.’

흥부냉면도 버거운 송희근 과장이 포 빌리지를 따내진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송희근 과장의 윗급이 움직였으렷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뒤틀린 속내를 모르는 허운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건 이러나저러나 수제버거 프랜차이즈를 섭외한 덕택에 자신의 몫은 끝냈다는 안도감이 있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자, 이 시점에서 우리의 고독한 에이스 조대찬은 어떤 업체와 컨택 중인지 알아볼까?”

“나?”

“그래.”

대찬은 피식 웃고 대답했다.

“없어.”

“뭐라고?”

“없다고. 안 그래도 쪽팔린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대찬의 표정은 그야말로 참담했다.

허운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번졌다.

대찬이라면 상사들의 도움 없이도 번듯한 곳과 손을 잡았으리라고 생각했다.

전부터 밝지 않던 서원웅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대찬은 여전히 빈손이고, 자기는 경쟁자들보다 우월한 패를 쥐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핏줄의 덕택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대찬을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우위가 서원웅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허운도 당혹감에 얼버무렸다.

“어… 뭐… 잘될 거야! 아무렴!”

“고맙네, 고마워.”

대찬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참담함이었다.

첫 번째 삶에서는 한없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을 시작한 이래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허운이 말한 인디언의 양심처럼 참담함 역시 익숙해지면 무뎌졌다.

그러나 그 참담함이 낯설어지면 다시 서슬 퍼런 칼날이 심장을 후비는 듯 아팠다.

‘아프네…….’

대찬은 쓴 침을 꿀꺽 삼켰다.

퇴근 시간.

서원웅이 대찬의 뒤를 따라붙었다.

“대찬아.”

“어, 원웅.”

대찬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면서 알은체를 했다.

서원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말했다.

“저기 말이야, 네 업체도 아버지한테 부탁해 볼까?”

“회장님께?”

“응. 내가 부탁드리면 해 주실지도…….”

“어. 해 줘.”

대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서원웅은 자기가 제안해 놓고도 놀라서 눈이 커졌다.

“저, 정말?”

“해 줘. 나야 좋지. 회장님께서 1퍼센트라도 네 부탁을 승낙하실 가능성이 있다면 말이야.”

“응? 그게 무슨 뜻이야?”

대찬은 김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네가 부탁해도 회장님 절대 안 들어주셔.”

“어, 어째서?”

“회장님이 물어다 준 업체로 내가 널 이기면 어떻게 되는데?”

“…어?”

“그게 뭐야. 웃기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한 가지 더. 회장님이 나를 네 옆에 두는 건 내가 쓸 만해서야.”

“응?”

“근데 이런 거 하나 해결 못해서 징징거리며 도와 달라고 하면 날 어떻게 생각하시겠어.”

서원웅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건 그렇네…….”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 볼게. 신경 써 줘서 고맙다.”

대찬은 씩 웃으며 서원웅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퇴근길의 무수한 양복쟁이들 사이로 사라졌다.

서원웅은 깜깜한 저녁, 인파 사이로 자취를 감춘 대찬의 뒷모습을 제자리에서 한참 더듬거렸다.

대찬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골목의 익숙한 간판을 올려다봤다.

“하.”

짧게 한숨을 쉰 대찬은 그 간판이 걸린 층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아니, 이게 누구야! 조 선생 아니야!”

“잘 지내셨어요, 사장님?”

“아, 그럼. 덕분에!”

대찬이 찾아간 곳은 노근기 사장의 황금루였다.

노근기에게 대찬은 항상 VVIP였다.

대찬은 구렁텅이에 빠진 그의 인생을 건져 낸 장본인이었다.

대통령이 와도 그보다 귀하진 않았다.

“저녁 먹으러 왔어?”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리네요. 대단하세요.”

대찬은 들어오면서 가게 앞에 장사진을 친 손님들을 봤다.

저 자식은 뭔데 대기 손님들 무시하고 하이패스야?

줄을 선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황금루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근기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이게 다 조 선생 덕분이지. 앉아. 뭐 먹을래? 짜장, 짬뽕은 금지야.”

“식사는 괜찮고, 잠깐 밖에서 커피 한잔하실래요? 바쁘시면 영업 끝나고 찾아뵙고요.”

“어쩐지 저녁 먹으러 왔냐니까 말 돌리더라니.”

“하하, 안 되시나요? 시간.”

“마누라한테 맡겨 놓음 돼. 나가서 얘기하자.”

대찬은 근처의 카페로 향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는 입술을 뗐다.

황금루까지 오는 덴 수도 없이 주저했지만, 이미 온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사장님께서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해 주셨으면 해요.”

“으잉?”

“너무 갑작스러우시죠.”

“갑작스럽긴 하네…….”

노근기는 민망한 듯 웃으며 광대를 긁었다.

대찬의 얼굴에도 노근기의 웃음이 전염됐다.

“충분히 그러실 만합니다. 그래도 잠깐만 참고 들어 주세요. 여기 자료 보시면…….”

“잠깐.”

노근기는 대찬이 착실히 준비한 서류 뭉치 위에 손을 턱 올려놨다.

대찬은 긴장한 얼굴로 노근기를 바라봤다.

노근기는 씩 웃었다.

“됐고, 두 가지만 물어보자.”

“네, 물어보세요.”

“하나, 내가 이거 하면 내가 망할 수도 있나?”

“…그럴 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오히려 금전적으로는 훨씬 많은 이득을 가져다드릴 거라고 확신해요.”

“좋아. 둘, 내가 이거 하면 자네한테 좋나?”

“예, 좋습니다. 많이.”

“으음.”

노근기는 팔짱을 끼고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침묵은 좋지 않은 신호라고 여긴 대찬이 부랴부랴 말을 이으려 했다.

“사장님,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 거냐면…….”

“아, 됐어, 됐어. 시끄러워!”

노근기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준비해 온 영업용 멘트를 줄줄 읊으려던 대찬의 입술이 뚝 멈췄다.

당황스러웠다.

얘기도 안 들어 보고 거절하려는 건가?

대찬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노근기는 잔뜩 짜증난 얼굴로 말했다.

“뭘 그렇게 시시콜콜 말해싸. 그냥 내면 내는 거지!”

“사장님…….”

“조 선생은 날 아주 은혜도 모르는 짐승 새끼로 아는 모양이지? 그냥 해 달라, 세 글자면 될 일을 구구절절 읊고 있어. 우리가 남도 아니고.”

대찬은 눈물이 핑 돌았다.

노근기의 호의를 기대한 건 사실이었지만 과한 기대는 삼가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건 거래가 아니라 대찬의 일방적인 요구였다.

만약 노근기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거절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찬은 거절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었다.

그런데 노근기는 앞뒤 재지 않고 덜컥 대찬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는 못마땅한 듯 콧잔등을 씰룩였다.

“이마만큼 먹고사는 게 다 누구 덕택인데? 나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사람이야.”

“감사합니다, 사장님.”

“고마워할 거 없어, 조 선생. 내가 받은 거 조금이나마 갚게 해 줄 기회를 줘서 내가 도리어 고맙지.”

노근기는 흔쾌히 대찬의 부탁, 아니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근기는 대찬의 손목을 잡고 휙 잡아당겼다.

“가게로 가자. 내가 알아야 될 부분은 식사하면서 듣자고.”

대찬도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노근기 사장은 대찬이 누차 사양하는 걸 바득바득 우겨 대찬의 입에 가장 비싼 코스 요리를 욱여넣었다.

업체 선정을 시작한 지 일곱째 날.

마감일이었다.

양동식 부장은 출근하면서 각 팀의 팀장들에게 툭 던지듯 말했다.

“주임들, 사원들이 선정한 업체 목록 페이퍼 하나로 만들어서 내 메일로 보내 놔.”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렇게 대답하는 각 팀장들은 동시에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표정인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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