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80화
“둘 중에 하나라면 당연히 유백기 아니야?”
“왜지?”
“아무리 한 대리가 조대찬을 편애한다고 해도 1년 먼저 들어온 유백기가 아무렴 조대찬 씨보다 못하려고?”
“편애라니, 그런 적 없어. 말조심해.”
“아이고, 무서워라.”
천원석 대리는 하나도 안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송희근 과장은 작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자, 어쨌든 우린 전략적으로 가자고. 조대찬 씨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 나중에 돌아오는 거니까.”
송희근 과장의 말에 대찬은 허탈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할 말만 하고 곧바로 시선을 거둬 버린 송희근 과장을 향해 대찬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섭섭합니까.”
“뭐, 뭐라고……?”
고분고분할 줄 알았던 대찬이 따갑게 쏘자 송희근 과장은 말을 더듬었다.
대찬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합리적 전략이니 전술이니 해 봤자 당사자가 느끼기에는 왕따나 이지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
천원석 대리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야, 인마, 조대찬, 말이 너무 심하잖아.”
“심했나요. 최대한 순화해서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만해.”
“뭘 그만합니까? 이미 잠정적으로 결정된 일 아닌가요? 이 정도 항변도 못합니까?”
천원석 대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대찬이 불쑥 반기를 들자 도리어 한태윤 대리가 중재자로 나섰다.
“과장님, 제가 조대찬 씨 서포트 하겠습니다. 그 편이 좋겠어요.”
“그, 그래도 전력이 분산되면…….”
그럼에도 송희근 과장은 전략이니 전력이니 케케묵은 소리만 반복하면서 뜻을 꺾지 않았다.
“과장님! 분산이 문제가 아니고……!”
“대리님.”
한태윤 대리의 목소리가 커지자 대찬이 급히 그를 불렀다.
대찬은 한태윤 대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 혼자 하겠습니다. 이미 결정이 났으니 거스르지 않는 편이 좋겠죠.”
“정말 혼자 해낼 수 있겠습니까?”
대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백기는 잠자코 가만히 있었다.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송희근 과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결정을 번복하진 않았다.
“우리 팀은 유백기 쪽을 전적으로 서포트 하는 걸로.”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를 떴다.
천원석 대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저 싸가지 없는 새끼. 인생 혼자 살아?”
1팀 상사들은 유채경을 전적으로 밀어주기로 했다.
서원웅은 서청수 회장의 지원이 붙었다.
2팀 상사들은 곽 주임과 허운을 한꺼번에 밀어주기로 했다.
3팀 상사들은 유백기를 밀어주기로 했다.
대찬은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다.
대찬은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았다.
폐부에 가득 차는 답답한 기운이 도리어 가슴속에 들어찬 더 답답한 기운을 밀어내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거 설마… 나 잡으려고 이러는 거야?”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했지만 돌아가는 판을 보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송희근 과장이 끝끝내 유백기를 전적으로 밀어주겠다는 결정을 밀어붙인 것도 그랬다.
합리적인 전략이니 어쩌니 하면서 갖은 구실을 들이댔지만, 억지는 억지였다.
송희근 과장은 소심하고 남의 눈치를 과하게 본다.
그런 그가 내린 결정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냉혹하고 과감했다.
“꼭 다른 사람이 대신 정해 준 것처럼 말이야.”
대찬은 그 가설이 마냥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라고 여겼다.
일주일간의 업체 선정에 들어갔다.
전국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할 업체를 선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군침을 흘리는 업체들은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양보단 질이었다.
유망한 업체들은 논의를 잘 진행해 나가다가도 모두 같은 지점에 이르러서 말끝을 흐렸다.
“한 달 동안 경합을 진행하라고요? 7개 업체가 경합해서 한 곳만 선정되는 거고요?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조금이라도 유망한 업체들은 이를 모두 고사했다.
7분의 1.
한 달 동안 힘을 쏟기에는 너무 희박한 확률이었다.
게다가 이미 잘되고 있는 업체들은 이런 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확률도 확률이지만 자존심이 상한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가 필래백화점 자회삽니까? 그런 오만한 요구를 어떻게 그리도 당당하게 하세요?”
열심히 전화를 돌리는 직원들은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게다가 연락을 해 오는 직원들의 직급이 고작해야 주임, 대개는 신입 사원이었으니 그것부터 자존심이 팍 상하는 업체들이 다수였다.
그런 업체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고 나니 남은 건 되레 필래유통 측에서 영 구미가 당기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뿐이었다.
“하… 돌겠네.”
허운은 평소보다도 더 자주 흡연장을 들락날락거렸다.
연거푸 줄담배도 잦아졌다.
허운은 동행한 대찬에게 투정을 부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내가 업체 사장이라도 신입 사원이 전화 걸어오면 지금 무시하는 건가 싶겠어.”
“그렇지? 업무 방식이 불합리해.”
“윗선에서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우리보다 잘난 양반들이 우리가 아는 걸 모를 리가 없지.”
“그럼 일부러 불합리한 방식을 택했다는 거야? 뭘 위해서?”
허운의 물음에 대찬은 답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 답을 떠올렸다.
‘서원웅을 담그기 전에 방해꾼부터 천천히 떼어 내려는 생각이 분명해.’
물론 그 방해꾼이란 대찬 자신이었다.
대찬은 서청규 사장이 대대적으로 전략을 수정했다고 판단했다.
속전속결로 서원웅을 짓뭉개려는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아예 전략을 180도 바꾼 것이다.
속전속결에서 만만디로.
서원웅 본인이 아니라 걸림돌이 되는 대찬부터 서서히 제거해 나가겠다는 복안이 분명했다.
고작 신입 사원 하나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서 이런 까다로운 길을 걷는 것이 처음에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청규 사장, 그리고 서승학에게 서원웅은 고작 신입 사원 하나가 아니었다.
서청수 이후, 필래그룹의 후계 구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잠재적인 독소였다.
그런 서원웅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소 수고스럽더라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특히 서청규 사장의 입장에서는 몇 마디 말로 명령하면 그만이었다.
그 수고스러움마저도 아랫사람이 감당할 일이지, 서청규 사장의 몫은 아니었다.
대찬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허운은 푸념만 했다.
“죽을 맛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안 잡히고 앞길은 막막하고…….”
“그래도 형은 알콜 의형제들이 도와주잖아. 나보다 훨씬 나은 신세거든.”
“물론 그거야 그렇지만…….”
허운은 받아칠 말이 없어 쩝, 입맛만 다셨다.
대찬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외로운 싸움이었다.
막막한 상황이란 건 대찬이나 허운이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고난을 함께 나누는 것과 오롯이 혼자 짊어지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안녕하십니까. 국일명가 영업팀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저는 필래유통의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일명가 측에서 저희 필래백화점 10개 지점에 입점하실 의향이 있으신지 여쭙기 위해서 전화드렸습니다.”
“아… 필래백화점이요?”
“네. 귀사가 저희 백화점 전 지점에 입점한다면 상호 간에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제안드리는 겁니다.”
“이 제안은 저희한테만 단독으로 유효한가요?”
약점을 찔리자 대찬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그건 아닙니다. 7개 업체 중 한 곳하고만 계약을 체결할 겁니다.”
“그럼 저희가 남들보다 낫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면 되죠? PT라도 해야 합니까?”
“PT는 아니고 한 달간의 임시 영업을 통해 그 매출을…….”
“휴.”
대찬의 말은 상대방의 한숨에 가로막혔다.
“…….”
“전화 주신 분이 누구시라고…….”
“필래유통 대외협력 3팀 조대찬이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젊으신데, 조대찬… 대리님?”
“…사원입니다.”
“하!”
한숨에 이어 기가 차다는 듯한 웃음.
대찬의 목젖이 일렁거렸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무례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죄송합니다.”
딸깍.
상대방은 대찬의 말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대찬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외투를 걸치고 비장하게 사무실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송희근 과장과 천원석 대리는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
유백기도 헤벌쭉 웃다가 한태윤 대리의 눈총을 맞고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찬은 무작정 국일명가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통화했던 상대방을 찾아냈다.
국일명가 영업팀장.
그는 대찬을 보더니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보니 무례함과 동시에 무모하시네요. 여기엔 왜 왔습니까?”
“유선보다는 직접 뵙고 설명을 드리고 싶어서 무례하고 무모한 걸 감수하고 찾아왔습니다.”
“아, 예. 유선보다 대면이 좋은 점은 그쪽 신수가 훤하고 잘생겼다는 걸 알게 된 거 하나뿐입니다. 그게 저희 논의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에요.”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7개 업체 중에 한 군데, 그것도 한 달간 임시 영업. 이건 너무하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영업팀장은 대찬의 말을 싹둑 잘랐다.
“미안해요. 바빠서. 급이라도 맞추시든지. 사원은 모멸감까지 드네요.”
국일명가의 영업팀장은 그 이후로 대찬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두었다.
대찬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잠깐이면 됩니다!”
“아, 사무실이 좀 시끄럽네.”
영업팀장의 혼잣말에 그의 부하 직원 중에서 덩치 좋은 사람이 대찬에게 접근했다.
“나가 주시죠.”
“…….”
대찬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가 이내 스르르 풀렸다.
아무 소득 없이 대찬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찬의 수완이 남들보다 낫다고 해도, 아무 무기도 없이 전장에 나서서는 도리가 없었다.
국회와 정부 부처를 오가느라 바쁜 3팀은 그 와중에도 유난히 유백기를 챙겼다.
칼퇴근을 종교처럼 신봉하던 천원석 대리도 야근을 자청해 가면서 유백기를 도왔다.
송희근 과장은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뒷바라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흥부냉면 컨택 어떻게 됐어?”
“좀 주저하던데요.”
“그래? 내가 그쪽 한번 만나 볼게. 대학 선배가 그쪽 영업부에 있거든.”
송희근 과장은 외투를 챙기며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전화를 걸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형님? 저 송희근입니다! 하하! 예.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고 저희가 이번에 흥부냉면이랑…….”
대찬이 일한 몇 달 사이, 그리고 첫 번째 삶에서 10년 동안 지켜본 송희근 과장의 모습 중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다.
‘저런 자세면 만년 과장이지도 않았겠지.’
대찬은 사무실을 나서는 송희근 과장을 심드렁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때 송희근 과장과 눈이 잠깐 마주쳤다.
송희근 과장은 그 순간 목을 자라처럼 집어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는 더 잰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대찬은 깊은 숨을 뱉었다.
‘저렇게 자발적으로 나설 사람은 아니고, 결국 누군가의 압력을 받았다고밖에는 생각이 안 되잖아.’
대찬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업무 시작 닷새 후.
7명의 직원들은 업체 선정에 매진한 결과, 서서히 결과를 도출해 내기 시작했다.
허운은 한 수제버거 프랜차이즈를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한 대학 앞에서 오랫동안 수제버거를 만들어 온 가게에서 출발한 업체였다.
전국에 약 10개 지점을 보유한 중소 프랜차이즈였다.
물론 허운에게도 더 나은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여러 현실의 문제에 부닥쳐 이 업체가 허운의 짝꿍이 되었다.
2팀의 상사들이 물심양면으로 허운을 도왔지만 결국 그들도 과장, 대리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다.
2팀의 곽 주임은 한 설렁탕 프랜차이즈와 논의를 심화해 나갔다.
허운의 수제버거 프랜차이즈와 오십보백보인 업체였다.
1팀의 유채경은 야무진 솜씨답게 여심을 파고든 고급 샐러드 프랜차이즈 업체와 막바지 논의를 진행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