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78화
우민호의 흉을 보지 않더라도 최소한 서원웅을 다독이고, 직원들도 격려하는 것이 부서장으로서 합당한 조처였다.
대찬은 속에서 불만이 끓었지만 굳이 발설하지는 않았다.
그때 한태윤 대리가 나섰다.
“부장님.”
“어, 한 대리.”
“이번 일로 서원웅 씨가 마음의 상처를 깊게 입었을 겁니다.”
‘역시 한 대리님.’
대찬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양동식 부장은 불편한 구석을 찔린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 어… 그랬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팀 상사에게 당했으니 특히 그럴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어차피 우민호 주임의 일탈로 결론 난 일이니, 부장님께서 다시 한 번 이를 확인해 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한 팀이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그, 그거야 당연하지.”
“감사합니다.”
양동식 부장의 표정도 그렇거니와 특히 볼만한 건 1팀의 팀장인 구용표 과장이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했다.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도 앞으로 업무에 더 유의하겠습니다.”
* * *
우민호 주임이 퇴사한 후, 대찬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건 온전히 긍정적이지도, 온전히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긍정과 부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시선이었다.
우민호 주임이 잘못했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잘잘못을 넘어서는 인정의 영역이 있었다.
대찬은 이제 회사에 들어온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였다.
우민호 주임이 직급이 높지는 않았지만 여러 해 부서의 일익을 맡아 왔다.
잘잘못을 떠나 박힌 돌 빼내는 굴러온 돌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수상한 냄새를 맡고 미행마저 감행하여 녹취를 뜨는 일련의 행동은 직원들이 보기에 치밀하고 독했다.
직원들 모두는 지금까지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이 한 점 얼룩 없이 깨끗했노라고 자신하지 못했다.
몇 점의 얼룩은 갖고 있었다.
훗날 대찬이 그 얼룩을 비집고 들어가 자신을 제2의 우민호로 만들어 버리는 건 아닐까.
직원 각자의 생각에는 근거가 아주 없지 않은 의혹이 싹텄다.
그렇기에 직원들은 대찬을 바라보길, 부서의 환부를 도려 낸 공신보다 다음 먹잇감을 물색하는 사냥꾼으로 인식했다.
한태윤 대리도 대찬을 따로 불러 말했다.
“조대찬 씨.”
“네, 대리님.”
“이번 일에 조대찬 씨 공로가 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들떠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몸가짐에 더 신경 써야 해요.”
대찬은 한태윤 대리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회사는 사람 사는 곳이에요. 이걸 항상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 사는 곳이요?”
한태윤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비합리적인 존재예요. 치사하고 좀스럽습니다. 이번 일은 조대찬 씨에게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유념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래요. 조대찬 씨가 대견하지만 한편으론 무섭다고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무표정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전혀 안 와 닿네요.”
“표정 없는 사람이 겁은 더 많은 법이죠.”
한태윤 대리는 대찬의 어깨에 손을 잠깐 얹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대찬은 난간에 살짝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도 알아, 이게 오히려 독이 될 거란 걸……. 그래도 어떡해, 친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대찬의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꺼리게 됐지만, 서청수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조대찬 그 녀석 덕분에 힘을 아꼈어.”
하마터면 체면을 구길 뻔했다.
서원웅은 회장님의 아드님이지만 공식적으로는 일개 신입 사원이었다.
일개 신입 사원을 징계위원회에서 구제하기 위해 서청수 회장 본인이 직접 끼어들었다면 체면에 상당한 손상이 갔을 터.
그러니 대찬의 존재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청수 회장이 기쁜 만큼 서청규 사장의 분노는 끓었다.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서청규 사장은 사장실의 집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의 측근들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서청규 사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빽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어수룩하게 당하지만, 이젠 아무리 정교하게 덫을 놔도 안 걸릴 거 아니냐고!”
“죄송합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읊으라고 월급 주는 줄 아냐?”
“…죄송합니다. 하, 하지만…….”
“죄송하면 그만이지, 하지만이 왜 붙어!”
부하 직원은 침을 꼴딱 삼키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녹취 파일만 없었으면 성공했을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서청규 사장은 다시 재떨이를 냅다 집어 던지려다가 손을 거둬들였다.
“그렇지. 그 조대찬인가 뭔가 하는 새끼 때문에 실패한 거지.”
“마, 맞습니다. 그놈이 아니었으면 틀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좋아. 일단 가지치기부터 하지.”
“그럼…….”
서청규 사장은 입술을 악물었다.
“조대찬인지 뭔지 그 자식부터 도려 낸다. 조대찬이 어디 소속이야?”
“대외협력부 대외협력 3팀입니다.”
“거기 팀장이 누구더라?”
“송희근 과장입니다.”
그 말에 서청규 사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쪼다 새끼? 치우고. 그다음, 그 밑에 내가 알 만한 사람이 있나?”
“천원석 대리, 한태윤 대리가 있습니다만, 사장님께서 알 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서청규 사장은 마뜩찮은 듯 혀를 찼다.
“새로운 놈을 끌어들이기에는 위험부담이 있어. 그러니까 우민호 그 새끼가 있을 때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 팀에 사장님께 적극 동조할 만한 직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누구야?”
“유백기 사원입니다.”
“유백기…….”
유백기의 이름을 발음하는 서청규 사장의 얼굴에 천천히 웃음이 번졌다.
“유백기가 그 팀에 있었군그래.”
“일부러 그렇게 안배를 했습니다. 우민호 팀에는 서원웅을, 유백기 팀에는 조대찬을 배치했습니다.”
“그건 잘한 일이야. 좋아, 유백기 오라고 해.”
서청규 사장의 명령에 바로 유백기가 소환됐다.
유백기는 긴장한 얼굴로 사장실을 찾아갔다.
서청규 사장은 웃음을 머금으며 그를 맞았다.
“어, 백기, 일은 좀 할 만한가?”
“아, 예. 덕분에.”
“내가 뭘 했다고. 커피나 한잔하지.”
“옙. 감사합니다.”
유백기는 바짝 얼어서 두 다리를 오므리고, 커피도 술을 마시듯 고개를 뒤로 돌려서 마셨다.
서청규 사장은 그런 과한 예의가 마음에 드는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조대찬이 대학 선배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같은 과, 같은 동아리였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빙글빙글 웃었다.
“그럼 제법 친하겠네?”
“…아뇨, 그다지 친하진 않습니다.”
서청규 사장도 부하에게 들어 유백기와 대찬의 악연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친하냐는 질문은 조롱조였다.
유백기는 어색한 웃음만 걸칠 뿐이었다.
“자네가 조대찬이한테 악감정이 좀 있다고 들었는데.”
“예, 많습니다.”
“그럼 나랑 쿵짝이 잘 맞을 것 같군.”
“…예?”
“우리 힘을 합쳐서 조대찬이를 한번 수술해 보자고.”
서청규 사장은 후덕한 미소를 유백기에게 지어 보였다.
“수, 수술이라면…….”
“요즘 세상 법도가 더러워서 사장님이 직원 하나 맘대로 못 자르잖은가.”
“예, 그, 그렇죠.”
“그래서 자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해.”
“어떻게 말입니까?”
“아, 어떻게 보면 내가 자넬 돕는 걸 수도 있겠군. 조대찬이 몰락하는 걸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닌가, 자네가.”
유백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사장님.”
“당장 뭐 어쩌지는 않을 거야. 다만, 항상 마음에 준비는 하고 있도록.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사장님.”
유백기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철천지원수인 조대찬을 담가 버리는 동시에 사장의 신뢰와 총애를 얻을 수 있는 기회.
유백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유백기의 시선이 자연스레 대찬에게로 향했다.
대찬은 애써 그 시선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거듭 따갑게 쪼이는 터.
고개를 들어 유백기를 바라봤다.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아니, 없어.”
“예.”
대찬은 무 자르듯 대꾸하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유백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로울 수 있나 보자고.’
그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대찬은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점심시간.
대찬은 오랜만에 동기들과 함께 식사했다.
신입 사원 월급으로는 조금 부담스러운 식당을 일부러 잡았다.
대찬, 허운, 유채경, 서원웅이 상사 눈치 보지 않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서원웅이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제가 쏠 테니까 마음껏 드세요.”
그러자 허운이 말을 받았다.
“당연하지! 오늘 지갑 단단히 털릴 준비 해요, 원웅 씨.”
대찬이 허운 쪽을 흘끗 보며 말했다.
“형은 뭔데 그렇게 당당하게 밥을 얻어먹어?”
“당연히 당당하지. 나 아니었으면 서원웅 씨 벌써 골로 갔어.”
“허운 씨가 왜요? 대찬 오빠가 다 해결한 일인데?”
유채경의 공격에 허운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내가 소개팅 날려가면서 회사에 눌러앉은 덕에 조대찬한테 정보 넘겼잖아요. 그거 아니었음 조대찬도 눈 뜨고 코 베였을걸?”
“누가 들으면 일부러 소개팅 안 나간 줄 알겠네요. 못 나갔으면서!”
“어쨌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언제부터 대찬 오빠야?”
허운과 유채경의 언성이 조금씩 올라갔다.
“제가 대찬 오빠 부르는 호칭까지 시시콜콜하게 허운 씨한테 보고해야 해요?”
“아, 섭섭하네. 나한테도 오빠라고 해요.”
“싫은데요, 허운 사원님.”
“슬프다, 진짜.”
그러거나 말거나 유채경은 허운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운은 잔뜩 뿔이 나서 전투적으로 메뉴판을 잡았다.
“여기 있는 거 다 시킬 거니까 각오해요, 원웅 씨. 먹을 걸로라도 풀어야지.”
“네네. 허운 씨한테는 고맙게 생각해요. 허운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서원웅은 멋쩍게 웃으면서 대찬과 유채경에게도 감사를 표했다.
“채경 씨, 대찬이한테도 다시 고맙단 말 할게요. 저, 동기는 정말 잘 둔 거 같아요.”
대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드림팀 수준이지.”
유채경은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우민호 주임이 그런 시커먼 사람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진짜 믿을 사람 하나 없어요, 우리 동기들 빼고는.”
“그러게 말이야. 회사 생활이 꼭 운전 같아. 나 혼자 조심한다고 사고 안 당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최소한 몸을 사리고 살아야겠어요. 천방지축 날뛰다간 큰코다치겠어, 정말.”
나머지 세 남자는 유채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웅은 거하게 중국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전채부터 후식까지 짜임새 있는 코스였다.
물론 그만큼 값이 비쌌다.
서원웅의 지갑을 털어 버리겠노라 당당히 선언했던 허운도 가격을 보고는 움츠러들었다.
“원웅 씨, 정말 괜찮겠어? 여기 가격이 장난 아닌데. 아무리 원웅 씨가 회장님 아들이라도 그렇지.”
그러자 대찬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하나도 할 거 없어.”
“와, 조대찬, 자기 돈 아니라고 아주 천하태평한 거 보게.”
“이거 원웅이 돈으로 사는 거 아니야.”
“뭐?”
대찬은 젓가락으로 식당 구석에 쓰인 현판을 가리켰다.
한자로 세 글자였다.
“저거 읽어 봐.”
“황금… 황금수?”
“루. 황금루.”
“지금 한자 잘 안다고 유세 떠는 거냐?”
“아니. 이 가게가 원웅이랑 내가 잘 아는 곳이거든.”
그러자 유채경이 눈을 깜빡거리면서 물었다.
“잘 안다니?”
“노근기 셰프라고 알아?”
“어? 들어 봤는데? 무슨 요리 프로그램에서 본 거 같아.”
사랑의 자장면 CF를 계기로 노근기는 제법 유명해졌다.
계기만 있으면 유명해질 만한 실력이었다.
그 덕택으로 노근기의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간혹 만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