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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7화 (76/556)

난 할 수 있어 77화

서원웅은 우민호 주임을 바라보며 항변했다.

“하, 하지만 이 건은 전적으로 우 주임님이……!”

“우민호 주임?”

감사실 직원은 우민호 주임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 주임, 태원수산 사장이 서원웅 사원에게 향응을 제공할 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는 퇴근 후 가족들과 있었습니다. 제 개인 신용카드 내역을 보시면 한 음식점에서 4인 가족 기준의 식사를 주문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민호 주임은 뻔뻔하게 거짓을 읊었다.

그 뻔뻔함에 좀체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는 서원웅도 목에 핏대를 세웠다.

“주임님! 그때 태원수산 사장님이랑……!”

“서원웅 씨, 급한 건 알겠는데 우리 양심까지 팔진 맙시다.”

우민호 주임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서원웅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감사실 직원은 서원웅을 똑바로 바라봤다.

“태원수산 사장인 양태원 씨는 당시 자리에 우민호 주임이 참석하지 않았고, 서청수 회장님의 혈연인 걸 의식해 서원웅 씨에게만 향응을 제공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거, 거짓이에요……!”

“거짓인 걸 증명하고 싶으면 증거를 제시하셔야 합니다. 당사자인 양태원 사장이 그렇게 진술했는데, 그걸 뒤집을 물증이 있습니까?”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서원웅은 턱 끝까지 억울함이 차올랐다.

말을 잇지 못했다.

“물증이 없다면 서원웅 씨는 중징계를 면치 못할 겁니다. 신입 사원 윤리 서약에는 향응 수수 시 즉각 해고 처분을 받겠다는 원 아웃제 조항이 있습니다.”

“아아…….”

“거기에 서명을 하셨을 겁니다. 해고 처분까지 내려질 수 있습니다.”

서원웅은 머리의 피가 일거에 말라 버리는 기분을 느꼈다.

상황을 타개할 수가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감사실 직원은 건조한 눈빛으로 서원웅의 우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봤다.

그에게서 그럴듯한 자기변호를 이끌어 낼 수 없으리란 걸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았다.

“서원웅 사원의 비위 사실을 밝혔으니 일단 1차 징계위원회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일어나려는 찰나, 회의실 문이 똑똑 울렸다.

그리고 대찬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대외협력부 조대찬 사원입니다.”

“대, 대찬아…….”

서원웅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우민호 주임의 얼굴은 있는 대로 구겨졌다.

감사실 직원 역시 미간을 좁혔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찬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룹 본사에서 징계위원회 참관인으로 배석 받았습니다. 자격 있습니다.”

“뭐?”

“서원웅 사원의 무고를 입증하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그 말에 우민호 주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조대찬 씨! 회사는 소꿉장난하는 데가 아닙니다!”

“예, 소꿉장난하는 데가 아니죠. 근데 왜 그러셨습니까, 우민호 주임님?”

“뭐야?”

대찬은 감사실 직원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민호 주임은 당시 향응 수수 현장에 있었고, 태원수산 양태원 사장과 모종의 음모를 꾸며 서원웅 사원을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우민호 주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거듭 말하지만 물증 없는 주장은 공상 소설에 불과합니다.”

“예, 있습니다, 물증.”

대찬은 탁자 위에 인화된 사진 몇 장과 녹음기를 올려놓았다.

“이 사진은 접대가 이뤄지던 날에 찍은 겁니다. 우민호 주임과 양태원 사장이 악수하는 모습이 또렷이 찍혔습니다.”

사진은 우민호 주임과 양태원 사장의 얼굴을 정확히 보여 주고 있었다.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감사실 직원은 우민호 주임을 노려봤다.

왜 거짓말을 했냐는 의미가 아니었다. 왜 들켰냐는 의미였다.

우민호 주임의 입이 합, 다물어졌다.

사진으로 우민호 주임의 입을 막은 대찬은 녹음기를 틀었다.

누가 들어도 우민호 주임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같이 온 서원웅 있죠. 걔, 회장 서자예요.

-서, 서자요?

노골적인 말에 회의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우민호 주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화장실에서의 은밀한 대화를 누군가 엿들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대찬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리고 그가 녹음까지 하고 있을 줄이야.

단순한 향응 수수보다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장을 욕보이고, 서자라는 적나라한 낱말까지 입에 담은 게 더 중죄였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는 녹음기는 계속 우민호 주임과 양태원 사장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윗선에서 영 고깝게 여긴단 말입니다. 호랑이 새끼가 자라기 전에 찍어 누르기를 바랍니다.

-찍어… 누르다뇨?

-싹을 밟아 버리자는 것이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일 때. 사장님이 총대 좀 메 주세요.

-어, 어떻게 말입니까?

-서원웅이 사장님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는 제보가 본사 감사실로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어허, 끝까지 들어 보세요.

갑과 을이 명확했다.

우민호 주임의 으름장에 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서원웅이 도련님인 걸 알고 사장님이 접근한 걸로 합시다. 이거 가지고 판을 튀기면 서자 녀석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사장님이 문제겠죠.

-그, 그러니까요.

-일단 PL존과는 계약이 해지될 겁니다. 아마 다신 PL존에 발을 못 붙이시겠죠.

-그럴 순 없습니다.

-대신, 법인 하나를 더 세우시죠. 고급 건어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브랜드로요.

-그, 그래서요?

-그럼 그 브랜드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필래백화점에 납품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지갑 얇은 백수들이나 씹는 오징어 다리를 편의점에서 팔아 봤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포장만 예쁘게 해서 백화점에 납품하자고요. 단위가 달라집니다, 단위가.

양태원 사장의 침 삼키는 소리가 녹음기에까지 담겼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녹음기 속 우민호 주임은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 자리에 없었던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물론이죠.

탁.

대찬은 녹음기를 껐다.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먼저 나서서 뭐라 말하지 못했다.

우민호 주임은 다른 차원으로 빨려드는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 놓은 대찬이 말했다.

“서원웅 사원의 향응수수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리에는 사수인 우민호 주임이 있었습니다. 사수가 요구했겠죠. 물정 모르는 신입 사원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순 없습니다.”

“…….”

조금의 오류도 없는 주장에 감사실의 직원들도, 우민호 주임도 항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민호 주임의 추태가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이 징계위원회가 누굴 위한 징계위원회여야만 하는지, 모르는 분은 없을 겁니다.”

“…….”

대찬은 우민호 주임을 쏘아봤다.

“모르고 싶은 분은 계실 수도 있지만.”

대찬은 그 이후로 더 말하지 않았다.

감사실의 직원들은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이 흉계를 지시한 장본인이 서청규 사장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원웅을 징계위원회에서 단죄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꼬리를 자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꼬리는 물론 우민호 주임이었다.

우민호 주임의 얼굴에는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서원웅은 떨리는 눈동자로 대찬을 바라봤다.

그는 따뜻한 눈빛을 보내며 그를 안심시켰다.

대찬은 흡사 중세 서사시에 등장하는 기사 같았다.

마왕성에 잡힌 공주를 구해내 당당히 왕성으로 귀환하는 기사.

당연히 그 공주는 서원웅이었다.

그의 눈에 물기가 글썽글썽 맺혀 있었다.

“대찬아…….”

“됐어. 다 끝났어. 이제 안심해도 돼.”

“미안.”

대찬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서원웅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렇게 찬바람 맞힐 생각 하지 마. 진짜 안 어울리니까.”

서원웅은 맥없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렁텅이에 빠진 서원웅을 구한 대찬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를 바라보는 대외협력부 직원들의 시선이 묘했다.

그들의 시선을 등진 채로 허운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조만간 소식이 들려올 거야. 내 입으로 주절대기는 좀 그래.”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허운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서원웅에게 물었다.

“원웅 씨,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대찬이 덕분에…….”

“우민호 주임님은 왜 여태 안 오시는 거지?”

허운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아마 안 올지도 모르지, 계속.”

“뭐? 그게 무슨 말이야?”

허운이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건 다음 날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자신의 아픈 손가락을 해치려던 시도를 묵과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 사건의 몸통이 서청규 사장이란 걸 알았지만, 그를 직접 건드리진 못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세간에선 그 시각부로 필래그룹 형제의 난에 대해 왈가왈부할 테니까.

하지만 그는 벌어진 사건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게 추궁했다.

필래유통 사옥 전 층에 이번 징계위원회에 대한 결과가 게시되었다.

본래 서원웅을 대상으로 한 징계는 최종적으로 우민호 주임에게 내려졌다.

우민호 주임은 그대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두려움과 부끄럼 때문에 인수인계 기간도 준수하지 않고 그대로 내뺐다.

그의 자리는 감사실로 향했던 그날의 모습 그대로였다.

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온 주말.

늦은 오후, 대찬은 회사에 나가 남은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때 우민호 주임이 도둑처럼 살금살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대찬과 눈이 딱 마주쳤다.

대찬은 심드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 짐 가지러 오셨어요?”

“…….”

우민호 주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부끄러움인 동시에 분노였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대찬만 아니었어도 그의 계획은 성공했을 거다. 서원웅은 절차대로 회사에서 쫓겨났을 테고.

큰 공을 세운 대가로 서청규 사장의 총애를 얻어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다.

‘저 자식만 아니었어도, 저 자식만…….’

우민호 주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찬은 업무를 처리하느라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민호 주임은 대찬의 그런 무심함에 더 열이 올랐다.

누구는 이렇게 바짝 약이 올라 있는데 누구는 저렇게 천하태평이라니.

한마디 쏘아 주지 않고 회사를 떠난다면 화병이 도질 것만 같았다.

“조대찬.”

“네?”

“그렇게 모가지 뻣뻣이 세우지 마. 너라고 언젠가 이 꼴 안 날 거 같아?”

“네, 안 날 거 같은데요.”

“건방진……!”

대찬은 우민호를 흘끗 보고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제일 속 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짓고 야반도주하는 주제에 미주알고주알 투덜대지 마요. 진짜 없어 보이거든.”

“뭐야? 이 개새끼가……!”

우민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자 순간 대찬의 눈에서 불빛이 튀겼다.

“얻다 대고 쌍욕이야? 네놈 새끼가 아직도 내 상산 줄 알아? 신경 꺼 줄 때 잠자코 꺼져.”

“이, 이……!”

대찬은 업무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뚜벅뚜벅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면서 우민호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이만 퇴근할게요. 퇴직 잘하세요, 우민호 씨.”

“야! 조대찬!”

잔뜩 성마른 목소리에 대찬은 뒤도 안 돌아보고 손만 휘휘 흔들어 주었다.

우민호의 눈두덩에 눈물이 왈칵 고였다.

월요일이 되자 우민호 주임의 명패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텅 빈 책상을 보는 대외협력부 직원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부서 전체 회의 시간에 양동식 부장은 착잡한 얼굴로 이를 짚고 넘어갔다.

“우리 부서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업무에 지장을 받아선 안 되겠죠. 다들 힘내서 한 주 시작하도록 합시다.”

“넵.”

양동식 부장의 말은 대찬의 입장에서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물론 그의 말 그대로 불미스러운 일이기에 자세히 언급하기에는 부담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의 부하 직원인 서원웅이 이 일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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