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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76화 (75/556)

난 할 수 있어 76화

이걸 어떻게 다 먹냐고 하던 유채경은 회를 거의 비워 가고 있었다.

그녀는 입안 가득 음식을 문 채로 대찬에게 물었다.

“변비 있으세요?”

“아니거든요? 그거 때문에 화장실 간 거 아니거든요?”

대찬이 눈을 흘겨도 유채경은 쿡쿡 웃으면서 계속 놀렸다.

“뭘 부끄러워해요. 똥은 누구나 싸요.”

“비위도 좋으셔. 식사하시면서 그런 얘기를 잘도 하시네. 암튼 아니라고요!”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음량을 최소로 하고 녹음한 파일을 재생했다.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유채경도 동공이 천천히 확장되었다.

“이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당장이라도 옆 방 쳐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의외로 과격하신 면이 있네요.”

“과격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서원웅 씨가…….”

“이대로 두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난장을 치는 건 우 주임님한테 너무 자비로운 대처라서요.”

대찬은 크게 심호흡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겸연쩍게 웃었다.

“채경 씨한테는 미안해요. 술 한잔 제대로 사 주지도 못하고 괜히 이리저리 끌고 다녀서.”

“미안해요?”

“그럼요, 미안하죠.”

유채경은 싱긋 웃었다.

“미안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말만 해요.”

유채경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말 놔요. 오빠라고 부르게 해 줘요.”

“아?”

“왜, 싫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 리가.”

“지금부터 놓는 거예요, 대찬 오빠.”

대찬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 그리고 나중에 우리 술 한 번 더 마셔야 돼. 알지?”

“꼼꼼하기는.”

“빨리 대답해!”

“알았어, 알았어.”

유채경의 닦달에 대찬은 백기 투항 했다.

다음 날, 대찬의 출근길은 비장했다.

긴장도 됐다.

완벽한 논리도 처지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대찬은 신입 사원의 처지였다.

독단적으로 무얼 결행하기엔 처지가 너무 하찮았다.

“대리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찬은 한태윤 대리에게 따로 귀띔했다.

“네, 하세요.”

“잠깐 저랑 회의실에 좀…….”

한태윤 대리는 대찬이 허투루 유난을 떨 사람이 아닌 걸 알았다.

그렇기에 군말 없이 일어나 대찬의 뒤를 따랐다.

대찬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회의실 문을 꼭 걸어 잠근 후에야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녹음 파일이 재생될수록 한태윤 대리의 표정도 덩달아 비장해졌다.

“증거, 확실합니까?”

“네. 사진과 녹음 파일 다 확보했습니다.”

“…씁쓸하군요.”

“대리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묻어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태윤 대리는 대찬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도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묻기에는 너무 더러워서.”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셔야 합니다. 조대찬 씨에게도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은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묻어 버리면 제 친구도 같이 묻혀 버려서요.”

한태윤 대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 건은 조대찬 씨에게 일임하겠습니다.”

“하지만…….”

“책임은 저도 질 겁니다. 지기 싫어도 질 수밖에 없고요. 조대찬 씨가 판단을 내려서 판단대로 행동하십시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맡겨 주셔서.”

한태윤 대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마워할 거 없습니다. 우민호 주임하고 저는 1년 터울이에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오래 본 사람을 직접 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후, 대찬은 먼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기다렸다.

먼저 칼을 뽑는 사람에게 고운 시선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정당한 이유가 있어도 그렇다.

대찬은 우민호 주임이 먼저 칼을 뽑을 때까지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이 필요 없었다.

우민호 주임은 바로 칼을 뽑았다.

여느 때처럼 일하고 있던 서원웅에게 양복 입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갑작스러운 내방에 대외협력부 사무실의 분위기가 술렁였다.

정작 부서의 책임자인 양동식 부장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대찬은 잠잠한 양동식 부장 쪽을 흘끗 바라보곤 생각했다.

‘역시 우민호 주임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니야. 양 부장도 묵인하고 있어.’

대찬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원웅은 순식간에 양복 입은 남자들에게 포위되었다.

서원웅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서원웅 씨, 본사 감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예? 감사실이요……?”

“네. 조사할 문제가 있어서 본사까지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 말에 서원웅은 꽁꽁 얼어붙었다.

그 조사할 문제에 대해 서원웅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제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사실은 그 문제를 구태여 고지해 주었다.

“서원웅 씨가 태원수산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그, 그건…….”

“아니라고는 못하시겠죠. 해명하실 부분이 있으면 징계위원회에서 하시죠.”

감사실 직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

서원웅은 그대로 끌려갔다.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허운이 발을 동동 굴렀다.

“으아, 어떡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다만, 대찬의 얼굴에는 미동도 없었다.

그건 유채경도 마찬가지였다.

유채경은 긴장한 눈빛을 대찬 쪽으로 보냈다.

대찬도 착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미묘한 시선을 보고 허운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야, 너는 왜 아무 말도 없어? 네 절친이잖아.”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한태윤 대리와 시선이 맞았다.

한태윤 대리는 무거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도 아랫입술을 살짝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송희근 과장을 바라봤다.

“과장님,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뭐, 뭐? 어딜 나갔다 와?”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질문에 대답할 짬도 없이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한태윤 대리가 대신 대찬을 변호해 주었다.

“제가 급하게 시킨 일이 있어서 경황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러자 천원석 대리가 끼어들었다.

“급한 일? 신입한테 시킬 급한 일이 뭐가 있는데?”

“그런 게 있어. 시시콜콜하게 말할 일은 아니고.”

한태윤 대리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천원석 대리는 한쪽 입꼬리만 씰룩이고 관뒀다.

대찬은 서둘러 감사실로 향했다.

감사실은 그 권위를 상징하듯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장실 바로 아래층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어? 조대찬 씨, 어디 가?”

“주임님.”

우민호 주임이었다.

대찬은 굳은 표정으로 우민호 주임을 바라봤다.

“어디 가냐니까?”

“주임님은 어디 가시나요?”

우민호 주임은 씩 웃었다.

“상사 질문에 대답도 안 하고 되묻는 경우가 어디 있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싸늘하고 고압적이었다.

대찬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한 대리님 지시를 받아서 감사실에 가는 중입니다.”

“죄송하다면서 표정은 전혀 안 죄송한 표정인데?”

대찬도 우민호 주임에 대한 감정이 최악인 상황에서 그의 기분을 맞춰 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울기라도 할까요?”

“뭐?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우민호 주임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시비라면 주임님이 한참 전에 먼저 거신 거 같은데요.”

“하하, 조대찬 씨, 미쳤어?”

“안 미쳤습니다.”

우민호 주임은 피식피식 웃으며 대찬을 비꽜다.

“조대찬 씨 좋게 봤는데 영 그렇네. 신입이 벌써 긴장이 풀리면 안 되지. 그러다간 조대찬 씨 친구처럼 몰락해 버리거든. 지금도 자네 친구 때문에 본사까지 가야 하잖아.”

그 말에 하마터면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다.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표정이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유념하죠.”

“나도 감사실 가는 길이거든? 조대찬 씨랑 같이 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조대찬 씨는 조금 있다가 올라오지.”

“그렇게 해 드리죠.”

우민호 주임은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썩은 동아줄 믿고 나대는 모양인데,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새끼야.”

우민호 주임은 닫히는 문틈으로 보이는 대찬의 뒷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흘렸다.

그때까지 우민호 주임은 대찬의 꿍꿍이속을 예상하지 못했다.

대찬은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건 곳은 필래유통이 아니었다.

필래그룹 기획조정실이었다.

서청수 회장의 비서실장에게 전화가 연결되었다.

“어, 조대찬 씨.”

“원웅이가 지금 필래유통 감사실로 불려갔습니다. 곧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비서실장의 동공이 커졌다.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뭐?”

“그룹 본사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이례적으로 징계위원회를 단기간에 열었습니다. 시간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대찬은 가는 동안에 자초지종을 그대로 고했다.

대찬의 증거는 확실했지만 위에서 깔아뭉개려 한다면 못 깔아뭉갤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그 윗선의 부당한 압력을 예방할 필요가 있었다.

필래유통은 신입 사원인 대찬에게는 아득히 넓은 터전이었다.

하지만 필래그룹 차원에서는 일개 계열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룹에서 이 일을 알고 있다는 신호만으로도 충분한 제어가 가능했다.

비서실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회장님께 보고드리고, 조대찬 씨가 징계위원회에 참관인으로 배석할 수 있도록 조치하지. 정말 그거면 되는 건가?”

“네, 그거면 됩니다.”

“자네 덕분에 부담스러운 수단을 쓰지 않아도 되겠군. 고맙네.”

“별말씀을요.”

서청수가 직접 나서면 향응이야 흠결도 되지 않는다.

회사의 주인이 대충 뭉개라고 하면 못 뭉갤 것도 없었다.

하지만 권력에는 반대급부가 따르는 법이었다.

아들내미 감싸느라 똥오줌도 못 가린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퍼질 터였다.

그건 서청수의 입장에서 분명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젊고 건강한 수사자에게 생채기는 그야말로 생채기다.

하지만 덧나고 흉 진 생채기는 훗날 사자가 늙었을 때 치명상 구실을 한다.

대찬은 그 가능성을 불식시킬 존재였다.

그러니 비서실장의 감사가 과한 예의는 아니었다.

대찬은 지체 없이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로 향했다.

이미 그룹 본사의 통보를 받은 감사실의 직원은 일개 신입 사원에 불과한 대찬을 깍듯하게 에스코트했다.

뭐라도 된 듯한 기분에 우쭐하기 마련이지만, 대찬은 그런 기분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징계위원회는 이미 열렸나요?”

“네, 지금 진행 중입니다.”

직원의 대답에 대찬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회의실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감사실의 직원들은 사람을 압박하는 법을 알았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냉철한 논리와 위압적인 목소리, 그리고 필요할 때 적절한 인신공격으로 서원웅을 궁지로 몰아갔다.

“이 사건은 굉장히 질이 나쁩니다. 고용 계약서에 잉크도 안 마른 신입 사원이 벌써부터 협력 업체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다니.”

“더군다나 회장님의 아드님이란 분이…….”

서원웅이 서청수의 혼외자라는 사실은 결코 득이 되지 않았다.

도리어 독이었다.

필래유통의 감사실 직원들은 대개 서청규의 직속 라인이었다.

이 사건은 키우면 키울수록 서청수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때문에 그들은 있는 힘껏 서원웅을 압박했다.

“신입 연수 때 윤리강령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양심이 있습니까?”

전방위로 들어오는 압박에 서원웅을 맥을 추지 못했다.

그 자리에는 우민호 주임 역시 배석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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